국군포로·전시납북자 6가족도 눈물 속 첫만남

입력 2018.08.20 (15:28) 수정 2018.08.20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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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에서 2박3일 일정으로 열리는 이번 이산가족 상봉 행사에서 국군포로 한 가족과 전시납북자 다섯 가족도 눈물의 상봉을 했습니다. 국군포로와 전시납북자 당사자들은 모두 세상을 떠나 남북의 가족끼리 만났습니다.

최기호(83) 씨는 의용군으로 납북된 세 살 위 큰 형 최영호 씨의 자녀들과 만났습니다. 형 최 씨는 2002년 숨졌습니다. 최 씨는 취재진에게 "어머님이 형을 특히 그리워하셨다. 끼니마다 꼭 형이 먹을 밥을 떠서 상에 올리고 '밥공기에 물이 맺히면 네 형은 살아있는 것'이라 말씀하셨다"면서 "밥이 뜨거우니 당연히 물방울이 맺히지. 잘 살아있으리라 생각하신 걸 그리 표현하신 것 같다"고 회고했습니다. 어린 시절 장난을 친다고 형에게 오줌을 누다가 미끄러진 일을 기억해내며 "형 성격이 참 순했다. 이렇게 조카라도 상봉이 돼서 감개가 무량하다"고 심경을 밝혔습니다. 최 씨는 북측 조카들이 형의 사진을 가져다주기를 간절히 바라며 상봉에 나섰습니다.

이재일(85) 씨는 납북된 형 이재억 씨가 1997년 사망해 대신 조카들을 만났습니다. 이 씨는 형이 1950년 6∼7월께 18세의 나이로 납북된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이후 이 씨의 부친은 "제대로 먹이지도 못하고 고생만 시키다가 사라졌다"며 앓기 시작했고 납북된 아들을 간절히 기다리다가 1954년 52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씨는 유일하게 남아 있던 형의 사진 한 장을 석연찮게 도둑맞는 바람에 조카에게 확인할 증거가 없어졌다며 안타까워했습니다.

곽호환(85) 씨도 전쟁통에 납북된 형이 1981년 사망해 조카들을 만나게 됐습니다. 당시 21세였던 형은 인민군 관계자들의 회의에 갔다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곽 씨의 아들은 "아버님이 큰아버지를 많이 보고 싶어하셨는데 그 자녀들이라도 만나게 돼 소원 풀이하시게 됐다"고 전했습니다.

아버지가 납북된 이영부(76) 씨는 북측의 조카들과 마주 앉았습니다. 평북 용천이 고향인 이 씨는 전쟁 때 아버지가 서울 종로구 혜화동에서 동네 통장으로 일하다 자신이 열 살 때인 1950년 9월 납북됐다고 설명했습니다. 이 씨의 어머니는 생활고로 30대 후반인 1962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씨는 장남인 줄 알고 살다가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북측에 형이 둘 있는 것을 알고 상봉 신청을 했습니다.

남편이 납북된 홍정순(95) 씨도 북쪽의 가족을 만났습니다. 공무원이었던 홍 씨의 남편은 6·25 발발 직후 북한으로 끌려갔고 생사가 확인되지 않는다고 홍 씨는 전했습니다.

부친이 국군포로인 이달영(82) 씨는 이복동생들과 상봉했습니다. 1987년 별세한 것으로 추정되는 부친과는 전쟁이 나고 1952년께 헤어졌고 국군포로라는 걸 전해 들었습니다. 이 씨는 어린 시절 부친에게 천자문을 배웠던 기억을 들려주면서 아버지 사진을 가지고 가 이복동생들에게 보여주겠다고 했습니다.

남측은 이번 상봉 행사를 준비하면서 국군포로와 납북자 50명을 선정해 북측에 생사확인을 의뢰했고 이 중 21명의 생사가 확인돼 6가족의 상봉이 성사됐습니다. 2015년 10월까지 20차례 진행된 상봉에서 남측은 350명의 국군포로와 납북자 생사를 북측에 의뢰해 112명이 확인됐고 이 중 54가족이 만났습니다. 북한은 납북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입니다.

[금강산 공동취재단]

[사진 출처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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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8-20 15:28:29
    • 수정2018-08-20 15:29:31
    정치
금강산에서 2박3일 일정으로 열리는 이번 이산가족 상봉 행사에서 국군포로 한 가족과 전시납북자 다섯 가족도 눈물의 상봉을 했습니다. 국군포로와 전시납북자 당사자들은 모두 세상을 떠나 남북의 가족끼리 만났습니다.

최기호(83) 씨는 의용군으로 납북된 세 살 위 큰 형 최영호 씨의 자녀들과 만났습니다. 형 최 씨는 2002년 숨졌습니다. 최 씨는 취재진에게 "어머님이 형을 특히 그리워하셨다. 끼니마다 꼭 형이 먹을 밥을 떠서 상에 올리고 '밥공기에 물이 맺히면 네 형은 살아있는 것'이라 말씀하셨다"면서 "밥이 뜨거우니 당연히 물방울이 맺히지. 잘 살아있으리라 생각하신 걸 그리 표현하신 것 같다"고 회고했습니다. 어린 시절 장난을 친다고 형에게 오줌을 누다가 미끄러진 일을 기억해내며 "형 성격이 참 순했다. 이렇게 조카라도 상봉이 돼서 감개가 무량하다"고 심경을 밝혔습니다. 최 씨는 북측 조카들이 형의 사진을 가져다주기를 간절히 바라며 상봉에 나섰습니다.

이재일(85) 씨는 납북된 형 이재억 씨가 1997년 사망해 대신 조카들을 만났습니다. 이 씨는 형이 1950년 6∼7월께 18세의 나이로 납북된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이후 이 씨의 부친은 "제대로 먹이지도 못하고 고생만 시키다가 사라졌다"며 앓기 시작했고 납북된 아들을 간절히 기다리다가 1954년 52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씨는 유일하게 남아 있던 형의 사진 한 장을 석연찮게 도둑맞는 바람에 조카에게 확인할 증거가 없어졌다며 안타까워했습니다.

곽호환(85) 씨도 전쟁통에 납북된 형이 1981년 사망해 조카들을 만나게 됐습니다. 당시 21세였던 형은 인민군 관계자들의 회의에 갔다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곽 씨의 아들은 "아버님이 큰아버지를 많이 보고 싶어하셨는데 그 자녀들이라도 만나게 돼 소원 풀이하시게 됐다"고 전했습니다.

아버지가 납북된 이영부(76) 씨는 북측의 조카들과 마주 앉았습니다. 평북 용천이 고향인 이 씨는 전쟁 때 아버지가 서울 종로구 혜화동에서 동네 통장으로 일하다 자신이 열 살 때인 1950년 9월 납북됐다고 설명했습니다. 이 씨의 어머니는 생활고로 30대 후반인 1962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씨는 장남인 줄 알고 살다가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북측에 형이 둘 있는 것을 알고 상봉 신청을 했습니다.

남편이 납북된 홍정순(95) 씨도 북쪽의 가족을 만났습니다. 공무원이었던 홍 씨의 남편은 6·25 발발 직후 북한으로 끌려갔고 생사가 확인되지 않는다고 홍 씨는 전했습니다.

부친이 국군포로인 이달영(82) 씨는 이복동생들과 상봉했습니다. 1987년 별세한 것으로 추정되는 부친과는 전쟁이 나고 1952년께 헤어졌고 국군포로라는 걸 전해 들었습니다. 이 씨는 어린 시절 부친에게 천자문을 배웠던 기억을 들려주면서 아버지 사진을 가지고 가 이복동생들에게 보여주겠다고 했습니다.

남측은 이번 상봉 행사를 준비하면서 국군포로와 납북자 50명을 선정해 북측에 생사확인을 의뢰했고 이 중 21명의 생사가 확인돼 6가족의 상봉이 성사됐습니다. 2015년 10월까지 20차례 진행된 상봉에서 남측은 350명의 국군포로와 납북자 생사를 북측에 의뢰해 112명이 확인됐고 이 중 54가족이 만났습니다. 북한은 납북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입니다.

[금강산 공동취재단]

[사진 출처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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