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스페셜] 홋카이도 탄광의 비밀…“제2의 군함도였다”

입력 2018.08.25 (22:09) 수정 2018.08.25 (22:39)

읽어주기 기능은 크롬기반의
브라우저에서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앵커]

북해도, 일본말로 홋카이도라고 하면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삿포로 눈축제? 끝없이 펼쳐진 라벤더밭?

낭만적 정취가 가득한 자연 친화적인 '관광지'가 대개 먼저 떠오르실 겁니다.

하지만 홋카이도는 우리에겐 아픈 역사가 숨겨진 곳입니다.

이른바 '군함도'보다 더 가혹했던 강제 징용이 이뤄진 곳인데요,

홋카이도 탄광들에서의 조선인 수난사를 이승철 특파원이 현장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끝없이 펼쳐진 꽃밭.

라벤더 향기가 가득 스며듭니다.

평원을 뛰노는 사슴들과 끝없이 펼쳐진 목초지.

일본 홋카이도는 대자연의 축복 속에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곳입니다.

하지만 불과 70여 년 전 홋카이도는 지금과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채홍철/강제징용 2세 : "아버지가 햇빛을 본 적이 없다고... 새벽에 일어나서 캄캄한 갱안에 들어가서 갱에서 나올 때는 밤이니까."]

수풀을 헤치고 들어가자 갱도 입구가 나타납니다.

["미쓰비시 마크가 보이죠?"]

1941년 이곳 갱도 쪽에서 대규모 폭발사고로 한반도 출신 징용자 32명이 숨졌습니다.

불이 꺼지지 않자 그대로 물을 부어버립니다.

[시라이토/홋카이도 강제 징용 연구자 : "깊은 곳에 있던 사람들은 그대로 수몰된 거죠."]

같은 광산의 또 다른 입구.

땅 밑 170m 갱도에서 1944년 다시 대규모 가스 폭발사고가 일어났습니다.

107명이 숨졌는데, 71명이 한반도 출신이었습니다.

[시라이토/훗카이도 강제징용 연구자 : "이런 사고 상황에서는 어떻게 달아나야 한다는 교육을 받지 못한 (한반도 출신) 사람들이 희생된 겁니다."]

바다 밑 탄광에서 석탕을 캐고, 죽어서야 나올 수 있었다던 군함도.

군함도를 포함해 규슈 지역에 동원된 강제 징용자가 20만 명인데, 홋카이도에도 비슷한 규모의 사람들이 끌려온 것으로 추산됩니다.

특히 조직적인 동원 정도는 홋카이도 쪽이 훨씬 심각했습니다.

홋카이도에서 가장 큰 규모로 탄광을 운영했던 회사의 서륩니다.

부산출장소가 작성한 것인데, 각 지역별로 사람을 강제 할당해 보낸 기록이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1944년 8월 전북 고창의 경우를 보면,

["(고창에) 100명을 할당해서 100명을 동원했고, 조선 내에서 28명이 도망, 또 일본 내에서 9명이 도망, 탄광에 도착한 것은 63명."]

도망간 인원은 숫자를 채울 때까지 사람을 끌어갔습니다.

[다케우치/강제동원연구가 : "조선 총독부의 동원 때문에 지역별로 100명, 50명 등을 회사가 받는 겁니다. 받아서 열차로 부산으로 보내는 거죠."]

안동 등지의 서류에는 "인적 자원이 고갈됐다."라는 표현까지 등장할 정돕니다.

이 한 회사가 1944년 9월 23일부터 약 10일간 부산 등을 통해 홋카이도 탄광으로 보낸 강제 징용자 숫자만 만 7천 명에 이르는 것으로 돼 있습니다.

그리고 탄광에는 위안소를 만들어 우리 여성들까지 동원했습니다.

한적한 옛 광산촌 한쪽에 자리 잡은 붉은 지붕의 집 한 채.

["지금은 이 부분만 남아 있는 겁니다."]

2천여 명의 한반도 출신 강제 징용자가 있었던 아시베츠 탄광.

1944년 미쓰이 그룹이 이곳 광산을 인수하면서 위안소를 만들었습니다.

[하세야마/위안소 관련 증언 청취 기록자 : "여성이 4~5명이 있었고, 한복을 입었었다고..."]

탄광 측이 쉬지 않고 일한 광부들에게 위안소 할인권을 지급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지금까지 홋카이도에 설치된 것으로 확인된 산업 위안소만 19곳에 이릅니다.

홋카이도 탄광의 혹독한 강제 노역을 견디다 못해 도망도 쳤지만,

[다케우치/강제 징용 연구자 : "(홋카이도 탄광에서) 도망쳤다가 잡혀 맞아 죽은 사람이 있고, 죽지 않은 사람은 쿠릴 열도로 보냈다는 기록이..."]

제 바로 뒤 저 바다 건너편에 쿠릴열도의 최남단 섬이 있습니다.

저 쿠릴열도 인근 바다에서 태평양 전쟁 중 강제 징용과 관련된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납니다.

일본 홋카이도 북부에서 캄차카 반도까지 뻗어 있는 쿠릴 열도.

일본군이 작성한 쿠릴열도 징용자 사망 명붑니다.

1944년 7월 9일 같은 날 한꺼번에 180여 명이 숨진 걸로 나옵니다.

강원도와 황해도 일원에서 징용돼 배로 쿠릴열도로 가던 중 '어뢰' 공격을 받은 것으로 돼 있습니다.

그 뒤에도 9월에 579명, 10월에도 312명이 숨졌습니다.

모두 징용선에 타고 있다 희생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사망 기록이 남아 있는 쿠릴 열도 징용자는 모두 1,189명입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배 안에서 최후를 맞이해야 했던 조선의 강제 징용자들.

또 홋카이도의 탄광 등지에서 쓰러져간 우리의 할아버지들.

잊혀질 수도 외면할 수도 없음을 역사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홋카이도에서 이승철이었습니다.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특파원 스페셜] 홋카이도 탄광의 비밀…“제2의 군함도였다”
    • 입력 2018-08-25 22:21:11
    • 수정2018-08-25 22:39:51
    특파원 보고 세계는 지금
[앵커]

북해도, 일본말로 홋카이도라고 하면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삿포로 눈축제? 끝없이 펼쳐진 라벤더밭?

낭만적 정취가 가득한 자연 친화적인 '관광지'가 대개 먼저 떠오르실 겁니다.

하지만 홋카이도는 우리에겐 아픈 역사가 숨겨진 곳입니다.

이른바 '군함도'보다 더 가혹했던 강제 징용이 이뤄진 곳인데요,

홋카이도 탄광들에서의 조선인 수난사를 이승철 특파원이 현장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끝없이 펼쳐진 꽃밭.

라벤더 향기가 가득 스며듭니다.

평원을 뛰노는 사슴들과 끝없이 펼쳐진 목초지.

일본 홋카이도는 대자연의 축복 속에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곳입니다.

하지만 불과 70여 년 전 홋카이도는 지금과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채홍철/강제징용 2세 : "아버지가 햇빛을 본 적이 없다고... 새벽에 일어나서 캄캄한 갱안에 들어가서 갱에서 나올 때는 밤이니까."]

수풀을 헤치고 들어가자 갱도 입구가 나타납니다.

["미쓰비시 마크가 보이죠?"]

1941년 이곳 갱도 쪽에서 대규모 폭발사고로 한반도 출신 징용자 32명이 숨졌습니다.

불이 꺼지지 않자 그대로 물을 부어버립니다.

[시라이토/홋카이도 강제 징용 연구자 : "깊은 곳에 있던 사람들은 그대로 수몰된 거죠."]

같은 광산의 또 다른 입구.

땅 밑 170m 갱도에서 1944년 다시 대규모 가스 폭발사고가 일어났습니다.

107명이 숨졌는데, 71명이 한반도 출신이었습니다.

[시라이토/훗카이도 강제징용 연구자 : "이런 사고 상황에서는 어떻게 달아나야 한다는 교육을 받지 못한 (한반도 출신) 사람들이 희생된 겁니다."]

바다 밑 탄광에서 석탕을 캐고, 죽어서야 나올 수 있었다던 군함도.

군함도를 포함해 규슈 지역에 동원된 강제 징용자가 20만 명인데, 홋카이도에도 비슷한 규모의 사람들이 끌려온 것으로 추산됩니다.

특히 조직적인 동원 정도는 홋카이도 쪽이 훨씬 심각했습니다.

홋카이도에서 가장 큰 규모로 탄광을 운영했던 회사의 서륩니다.

부산출장소가 작성한 것인데, 각 지역별로 사람을 강제 할당해 보낸 기록이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1944년 8월 전북 고창의 경우를 보면,

["(고창에) 100명을 할당해서 100명을 동원했고, 조선 내에서 28명이 도망, 또 일본 내에서 9명이 도망, 탄광에 도착한 것은 63명."]

도망간 인원은 숫자를 채울 때까지 사람을 끌어갔습니다.

[다케우치/강제동원연구가 : "조선 총독부의 동원 때문에 지역별로 100명, 50명 등을 회사가 받는 겁니다. 받아서 열차로 부산으로 보내는 거죠."]

안동 등지의 서류에는 "인적 자원이 고갈됐다."라는 표현까지 등장할 정돕니다.

이 한 회사가 1944년 9월 23일부터 약 10일간 부산 등을 통해 홋카이도 탄광으로 보낸 강제 징용자 숫자만 만 7천 명에 이르는 것으로 돼 있습니다.

그리고 탄광에는 위안소를 만들어 우리 여성들까지 동원했습니다.

한적한 옛 광산촌 한쪽에 자리 잡은 붉은 지붕의 집 한 채.

["지금은 이 부분만 남아 있는 겁니다."]

2천여 명의 한반도 출신 강제 징용자가 있었던 아시베츠 탄광.

1944년 미쓰이 그룹이 이곳 광산을 인수하면서 위안소를 만들었습니다.

[하세야마/위안소 관련 증언 청취 기록자 : "여성이 4~5명이 있었고, 한복을 입었었다고..."]

탄광 측이 쉬지 않고 일한 광부들에게 위안소 할인권을 지급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지금까지 홋카이도에 설치된 것으로 확인된 산업 위안소만 19곳에 이릅니다.

홋카이도 탄광의 혹독한 강제 노역을 견디다 못해 도망도 쳤지만,

[다케우치/강제 징용 연구자 : "(홋카이도 탄광에서) 도망쳤다가 잡혀 맞아 죽은 사람이 있고, 죽지 않은 사람은 쿠릴 열도로 보냈다는 기록이..."]

제 바로 뒤 저 바다 건너편에 쿠릴열도의 최남단 섬이 있습니다.

저 쿠릴열도 인근 바다에서 태평양 전쟁 중 강제 징용과 관련된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납니다.

일본 홋카이도 북부에서 캄차카 반도까지 뻗어 있는 쿠릴 열도.

일본군이 작성한 쿠릴열도 징용자 사망 명붑니다.

1944년 7월 9일 같은 날 한꺼번에 180여 명이 숨진 걸로 나옵니다.

강원도와 황해도 일원에서 징용돼 배로 쿠릴열도로 가던 중 '어뢰' 공격을 받은 것으로 돼 있습니다.

그 뒤에도 9월에 579명, 10월에도 312명이 숨졌습니다.

모두 징용선에 타고 있다 희생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사망 기록이 남아 있는 쿠릴 열도 징용자는 모두 1,189명입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배 안에서 최후를 맞이해야 했던 조선의 강제 징용자들.

또 홋카이도의 탄광 등지에서 쓰러져간 우리의 할아버지들.

잊혀질 수도 외면할 수도 없음을 역사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홋카이도에서 이승철이었습니다.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오늘의 핫 클릭

실시간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뉴스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수신료 수신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