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 책방] 111년 만에 가장 더웠던 여름, 우리도 ‘폭염사회’

입력 2018.09.08 (08:02) 수정 2018.09.09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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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여름 더위가 절정이었던 지난 8월 1일, 그날 아침부터 보도국은 술렁거렸습니다. 서울의 낮 최고기온이 39도로 예보되면서 과연 기록을 세울 것인지 시간대별로 업데이트되는 기온을 보면서 촉각을 곤두세웠는데요. 오후 2시가 넘자 강원도 홍천의 기온이 40도를 넘어섰습니다. 결국 수은주가 41도까지 올라가 1942년 대구에서 관측된 40도를 뛰어넘었습니다. 폭염도시 대구의 '넘사벽' 기록이 '시원함'의 대명사인 강원도에서 깨진 겁니다.

서울은 기상청 예보보다 조금 더 높은 39.6도까지 올라가 1907년 기상 관측 이후 111년 만에 최고를 기록하고야 맙니다. 그날 수십 년 경력의 기상청 예보관도, 전직 기상청장도, 베테랑 기상전문기자 선배도 '내 생애에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다'는 탄식을 내뱉었답니다. 40도 정도의 여름 더위는 머지않아 일상이 되겠구나 이런 안 좋은 예감도 들었고요. 기상전문기자 계속 해야 하나 이런 두려움도 솔직히 몰려왔습니다.

기록적 폭염의 한가운데, '폭염사회'를 만나다

101살 할머니가 정전 상태의 아파트에 고립돼 있다가 극적으로 구출됐다. (출처: Chicago Tribune )101살 할머니가 정전 상태의 아파트에 고립돼 있다가 극적으로 구출됐다. (출처: Chicago Tribune )

이런 와중에 여의도책방에서 '폭염사회'라는 책을 발견했습니다. 사실 너무 바빠서 읽을 시간이 없었어요. 폭염 이후에는 태풍 '솔릭' 상륙, 그리고 가을장마까지 엄청나게 퍼부어서 또 접어둬야 했습니다. 비는 왜 기다릴 때는 안 오고 변덕을 부리는 걸까요? 효자태풍, 효자태풍 했는데 우리가 기다리는 태풍은 왜 오지 않는 걸까요?

9월 들어 얼른 책을 펼쳤습니다. 1994년 우리나라에서는 전국 평균 폭염 일수가 31.1일이라는 엄청난 기록이 나왔는데요.(물론 올해 깨졌지만) 미국은 그 이듬해인 1995년에 시카고에서 최악의 폭염 피해를 겪었습니다. 뉴욕대 사회학과 교수인 저자는 왜 시카고라는 도시에서 당시 521명이라는 사망자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는지 사회학자의 눈에서 심층적인 조사를 수행한 결과를 이 책에 담았습니다.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점이 많습니다.

폭염 희생자들은 "어차피 죽을 사람?"

경찰이 폭염으로 사망한 시신을 운반하고 있다. (출처: Chicago Tribune)경찰이 폭염으로 사망한 시신을 운반하고 있다. (출처: Chicago Tribune)

당시 시카고에는 7월 14일부터 1주일 남짓 40도 안팎의 폭염이 이어졌습니다. 습도가 높아서 체감온도는 더 높았는데 날씨를 감안하더라도 사망자 수가 너무 많은 것이 학자들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시신이 넘쳐나 안치소의 공간이 부족했고 급하게 냉동차량이 동원되기도 했습니다. 무연고 시신의 경우 몇 달이 지나도 찾아가는 사람이 없어 공동묘지에 안치됐는데요. 가난하고 혼자 사는 남성 노인의 피해가 가장 컸습니다.

당시 시카고에는 독거노인이 11만 명 정도였습니다. 병을 앓고 있고 엘리베이터가 없고 냉방장비가 없는 열악한 주거시설에 혼자 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게다가 시카고는 미국 내에서도 범죄율이 높기로 유명했습니다. 바깥은 위험하기 때문에 스스로 자택 연금 상태로 고립된 채 생활했고 기록적인 폭염의 가장 쉬운 희생자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학자들은 연구 끝에 실제 사망자는 정부 발표보다 200명 이상 많은 739명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어차피 죽을 사람들이었다." "평소 지병이 있던 노인들의 죽음을 폭염과 연관시킬 근거가 없다." 등의 반대 주장도 나왔습니다. 또 시카고 시장은 1996년 열릴 민주당 전당대회를 앞두고 도시의 이미지가 실추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지요. 폭염에 대한 연구가 흐지부지되고 생존자들도 입을 다물어버렸습니다.

시카고 폭염 계기로 '초과 사망자' 개념 등장

폭염으로 사망한 무연고 시신 100여 구에 대한 집단 장례가 이뤄지고 있다.  (출처: Chicago Tribune)폭염으로 사망한 무연고 시신 100여 구에 대한 집단 장례가 이뤄지고 있다. (출처: Chicago Tribune)

엄청난 혼란 속에도 일부 양심적인 학자들에 의해 '초과 사망자'라는 개념이 만들어집니다. 그 시기 평균적인 사망률과 비교해 폭염이라는 변수로 얼마나 많은 사망자가 추가로 발생했는지 비교하는 방법인데요. 현재 학계에서는 가장 정확한 폭염 사망자 수 집계법으로 인정받아 활발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폭염 피해는 기상이라는 자연적인 요인뿐만 아니라 고립과 가난이라는 사회적인 병인을 만나 폭발적으로 증폭됩니다. 폭염 사망자를 생물학적으로 부검해 원인을 밝히는 일도 중요하지만 과연 이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또 다른 원인이 없는지 '사회적인 부검'도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질병관리본부가 집계한 올해 국내 온열질환 사망자 수는 48명(9월 4일 기준)입니다. 피해자들의 성별이나 연령, 지역뿐만 아니라 소득 수준이나 거주 형태 등에 대한 심층적인 분석이 이뤄져야 매년 피해가 반복되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또 응급기관뿐만 아니라 일반 병원이나 경찰서 등에서 집계되는 폭염 관련 변사 등 사망 자료도 더해져야 더욱 신뢰할 수 있는 통계가 될 겁니다. 저자는 "가장 위험에 처한 사람이 가장 도움받기를 꺼린다"고 말합니다. 주변에 무더위 쉼터가 아무리 많아도 거동이 힘들고 사회활동이 전무한 소외계층이 접근 가능한지부터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요.

『폭염사회』에릭 클라이넨버그 씀, 홍경탁 옮김, 글항아리,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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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의도 책방] 111년 만에 가장 더웠던 여름, 우리도 ‘폭염사회’
    • 입력 2018-09-08 08:02:12
    • 수정2018-09-09 13:55:06
    여의도책방
올여름 더위가 절정이었던 지난 8월 1일, 그날 아침부터 보도국은 술렁거렸습니다. 서울의 낮 최고기온이 39도로 예보되면서 과연 기록을 세울 것인지 시간대별로 업데이트되는 기온을 보면서 촉각을 곤두세웠는데요. 오후 2시가 넘자 강원도 홍천의 기온이 40도를 넘어섰습니다. 결국 수은주가 41도까지 올라가 1942년 대구에서 관측된 40도를 뛰어넘었습니다. 폭염도시 대구의 '넘사벽' 기록이 '시원함'의 대명사인 강원도에서 깨진 겁니다.

서울은 기상청 예보보다 조금 더 높은 39.6도까지 올라가 1907년 기상 관측 이후 111년 만에 최고를 기록하고야 맙니다. 그날 수십 년 경력의 기상청 예보관도, 전직 기상청장도, 베테랑 기상전문기자 선배도 '내 생애에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다'는 탄식을 내뱉었답니다. 40도 정도의 여름 더위는 머지않아 일상이 되겠구나 이런 안 좋은 예감도 들었고요. 기상전문기자 계속 해야 하나 이런 두려움도 솔직히 몰려왔습니다.

기록적 폭염의 한가운데, '폭염사회'를 만나다

101살 할머니가 정전 상태의 아파트에 고립돼 있다가 극적으로 구출됐다. (출처: Chicago Tribune )
이런 와중에 여의도책방에서 '폭염사회'라는 책을 발견했습니다. 사실 너무 바빠서 읽을 시간이 없었어요. 폭염 이후에는 태풍 '솔릭' 상륙, 그리고 가을장마까지 엄청나게 퍼부어서 또 접어둬야 했습니다. 비는 왜 기다릴 때는 안 오고 변덕을 부리는 걸까요? 효자태풍, 효자태풍 했는데 우리가 기다리는 태풍은 왜 오지 않는 걸까요?

9월 들어 얼른 책을 펼쳤습니다. 1994년 우리나라에서는 전국 평균 폭염 일수가 31.1일이라는 엄청난 기록이 나왔는데요.(물론 올해 깨졌지만) 미국은 그 이듬해인 1995년에 시카고에서 최악의 폭염 피해를 겪었습니다. 뉴욕대 사회학과 교수인 저자는 왜 시카고라는 도시에서 당시 521명이라는 사망자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는지 사회학자의 눈에서 심층적인 조사를 수행한 결과를 이 책에 담았습니다.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점이 많습니다.

폭염 희생자들은 "어차피 죽을 사람?"

경찰이 폭염으로 사망한 시신을 운반하고 있다. (출처: Chicago Tribune)
당시 시카고에는 7월 14일부터 1주일 남짓 40도 안팎의 폭염이 이어졌습니다. 습도가 높아서 체감온도는 더 높았는데 날씨를 감안하더라도 사망자 수가 너무 많은 것이 학자들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시신이 넘쳐나 안치소의 공간이 부족했고 급하게 냉동차량이 동원되기도 했습니다. 무연고 시신의 경우 몇 달이 지나도 찾아가는 사람이 없어 공동묘지에 안치됐는데요. 가난하고 혼자 사는 남성 노인의 피해가 가장 컸습니다.

당시 시카고에는 독거노인이 11만 명 정도였습니다. 병을 앓고 있고 엘리베이터가 없고 냉방장비가 없는 열악한 주거시설에 혼자 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게다가 시카고는 미국 내에서도 범죄율이 높기로 유명했습니다. 바깥은 위험하기 때문에 스스로 자택 연금 상태로 고립된 채 생활했고 기록적인 폭염의 가장 쉬운 희생자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학자들은 연구 끝에 실제 사망자는 정부 발표보다 200명 이상 많은 739명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어차피 죽을 사람들이었다." "평소 지병이 있던 노인들의 죽음을 폭염과 연관시킬 근거가 없다." 등의 반대 주장도 나왔습니다. 또 시카고 시장은 1996년 열릴 민주당 전당대회를 앞두고 도시의 이미지가 실추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지요. 폭염에 대한 연구가 흐지부지되고 생존자들도 입을 다물어버렸습니다.

시카고 폭염 계기로 '초과 사망자' 개념 등장

폭염으로 사망한 무연고 시신 100여 구에 대한 집단 장례가 이뤄지고 있다.  (출처: Chicago Tribune)
엄청난 혼란 속에도 일부 양심적인 학자들에 의해 '초과 사망자'라는 개념이 만들어집니다. 그 시기 평균적인 사망률과 비교해 폭염이라는 변수로 얼마나 많은 사망자가 추가로 발생했는지 비교하는 방법인데요. 현재 학계에서는 가장 정확한 폭염 사망자 수 집계법으로 인정받아 활발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폭염 피해는 기상이라는 자연적인 요인뿐만 아니라 고립과 가난이라는 사회적인 병인을 만나 폭발적으로 증폭됩니다. 폭염 사망자를 생물학적으로 부검해 원인을 밝히는 일도 중요하지만 과연 이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또 다른 원인이 없는지 '사회적인 부검'도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질병관리본부가 집계한 올해 국내 온열질환 사망자 수는 48명(9월 4일 기준)입니다. 피해자들의 성별이나 연령, 지역뿐만 아니라 소득 수준이나 거주 형태 등에 대한 심층적인 분석이 이뤄져야 매년 피해가 반복되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또 응급기관뿐만 아니라 일반 병원이나 경찰서 등에서 집계되는 폭염 관련 변사 등 사망 자료도 더해져야 더욱 신뢰할 수 있는 통계가 될 겁니다. 저자는 "가장 위험에 처한 사람이 가장 도움받기를 꺼린다"고 말합니다. 주변에 무더위 쉼터가 아무리 많아도 거동이 힘들고 사회활동이 전무한 소외계층이 접근 가능한지부터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요.

『폭염사회』에릭 클라이넨버그 씀, 홍경탁 옮김, 글항아리,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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