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돋보기] 유기견 ‘상암이’의 죽음과 ‘윌버포스’의 영국

입력 2018.10.04 (17:19) 수정 2018.10.04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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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서울 마포구 월드컵 공원에 살던 유기견 한 마리가 포획과정에서 마취총에 맞아 숨지는 일이 발생했다.

이 개는 비록 유기견(?)이었지만 '상암이'라는 어엿한 이름을 가진, "동네 주민들이 함께 기르던" 개였다. 입양 계획까지 있던 한 생명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그동안 돌보아오던 주민들을 울렸고, 급기야 지난달 28일 청와대 국민청원에 '유기견 포획 시 마취총 사용을 개선해달라'는 글이 올라와 닷새 동안 3천 명 넘는 사람들이 동의했다.

유기견 상암이 관련 뉴스1 기사유기견 상암이 관련 뉴스1 기사

어찌 보면 대수롭지 않을 수 있는 유기견 한 마리의 죽음이지만, 불과 얼마 전 대전 한 동물원의 '퓨마 사살' 사건이 있었던 터라 더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관심을 갖는 것도 잠시뿐 제도와 의식 개선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금세 잊히고 묻히고 말 것이다.

미국 하버드대학교의 석학으로, 미국 대통령들도 자문을 구하곤 하는 데이비드 거겐(David Gergen) 교수는 라는 리더십 수업에서 학생들에게 꼭 <어메이징 그레이스 Amazing Grace, 2008년 개봉>라는 영화를 보여준다. 영국에서 노예제도 폐지운동을 이끈 정치인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의 생애를 다룬 영화로, 세상의 고정관념을 깨고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를 관철하는 과정이 얼마나 외롭고 힘든 과정인지를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더란 기성세력의 도전과 저항에 기꺼이 맞설 수 있어야 하고, 그럴 수 있는 사람만이 진정한 리더일 수 있음을 일깨워주려는 교수의 의도이다. 윌버포스가 살았던 18~19세기에 아프리카에서 배에 실려온 흑인 노예들은 '사람'이 아닌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므로.

 어메이징 그레이스 영화 포스터 어메이징 그레이스 영화 포스터

그런데 '영국의 양심'으로 불리던 그의 업적은 노예무역제도 폐지 뿐만이 아니다. 그는 1824년 리차드 마틴(Richard Martin)과 함께 전 세계에 현존하는 동물단체 중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큰 단체인 RSPCA(Royal Society for the Prevention of Cruelty to Animals)를 만들었다. 리차드 마틴은 1822년 영국의회를 통과한 'Richard Martin's Act'를 만든 장본인으로 당시 이 법은 농장동물의 학대를 방지하는 법으로 세계 최초의 동물보호법이라고도 할 수 있다. 현재 우리나라의 본격적인 동물보호운동의 역사도 RSPCA의 긴밀한 지원 아래서 이루어졌다는 시각이 많다.

윌버포스와 RSPCA가 있는 영국은 이처럼 오래전부터 명실상부한 동물복지·동물권리 선진국이었다. 그런 영국이 이번 달 다시금 "세계에서 가장 높은 동물 복지 수준을 갖추도록 한다"는 방침을 천명하고 나섰다. 영국 '동물 복지부' 장관인 데이빗 러틀리는 지난 1일 보도자료에서 "이번 일련의 조치들은 영국이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동물 복지 기준을 갖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하기 위한 것이다(These changes form part of our efforts to ensure we have the highest animal welfare standards in the world.)"라고 밝혔다.

영국 정부 보도자료 보기
이번 조치에 따르면 앞으로는
▶강아지를 팔 때 꼭 어미 개와 같이 있는 걸 확인하도록 강제하고
▶강아지를 사려는 사람이 강아지를 직접 보지 않은 채 온라인 등으로 구매하는 것을 금지하고
강아지나 고양이의 건강 문제나 사회화를 고려해 8주 이하의 어린 강아지나 고양이는 거래하지 못하도록 하고 어미 곁에 두도록 하며
강아지 분양업자에 대해 '등급제(star rating)'를 도입해 전문 판매업자 등이 분양업자들을 동물 복지 상태에 의거해 평가하도록 하게 된다.

궁극적으로는 열악한 환경에서 오로지 돈을 벌기 위해 새끼 번식에만 열중하는 강아지 공장(puppy mills)들과 그 속에서 죽을 때까지 새끼만 낳다 스러져가는 '번식견'들 이른바 '배터리 개(battery dogs)'들을 금지하기 위한 조치이다. '루시 법(Lucy's Law)'이라고도 불리는 이번 규제 강화 조치는 개 한 마리에 의해 촉발되었다.

루시 SNS 사진루시 SNS 사진

"강아지 농장을 없애고 싶은 분들은 이 포스트를 공유해주세요"라고 적힌 팻말과 함께 찍힌 루시는 2015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대부분의 시간을 강아지 농장(공장)의 '번식견'으로 살았다. 태어나서 5-6년의 시간 동안 1년에도 몇 번씩 임신과 출산을 반복하며 살던 끝에 척추가 심하게 휘고 엉덩이가 짓무르는 등의 후유증으로 입양이 됐지만 2년도 안 돼 숨지고 말았다. 루시를 입양한 주인 리사 가너 씨는 루시의 SNS 계정을 만들었고 이는 영국 내에서 개나 고양이를 직접 '기른' 사람이나 '기를' 사람이 아닌 제3자가 판매하는 것을 아예 금지하자는 캠페인으로 이어졌다. 이에 6개월 동안 15만 명 가까운 사람들이 서명했다.

영국 환경부 장관인 마이클 고브는 지난 8월 이 법을 소개하면서 "동물의 복지를 무시한 사람들이 제3자가 관여하는 이같은 비참한 거래로 더 이상 이익을 얻어서는 안 된다", "'루시 법'으로 많은 반려동물들이 사랑받는 삶의 출발점에 설 수 있을 것이다"라고 밝혔다. 제3자가 오직 이익만을 위해 주도하는 동물 거래를 막아 동물들의 복지와 권리를 향상시키겠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앞으로 강아지나 새끼 고양이를 기르고 싶은 사람들은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애완동물 가게가 아닌 입양센터 또는 번식업자를 찾아가 직접 얼굴을 마주 보고 6개월 이상 된 새끼만 데려오게 될 전망이다. 영국 정부는 이와 함께 ▶동물 학대 범죄자는 최고 5년의 금고형에 처하고 ▶도살장에 CCTV 설치도 의무화했다.

[연관 기사] [글로벌24 오늘의 픽] 영국의 동물복지 강화시킨 ‘루시 법’

마하트마 간디는 이런 말을 남겼다. "한 나라의 위대함과 도덕적인 진보는 그 나라에서 동물이 받는 대우로 가늠할 수 있다(The greatness of a nation and its moral progress can be judged by the way its animals are treated.)"

영국 정부의 결단과 노력이 세계를, 사람들 뿐만 아니라 동물들도 살만한 곳으로 만드는데 영향력을 미치기를 바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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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10-04 17:19:00
    • 수정2018-10-04 17:3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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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서울 마포구 월드컵 공원에 살던 유기견 한 마리가 포획과정에서 마취총에 맞아 숨지는 일이 발생했다. 이 개는 비록 유기견(?)이었지만 '상암이'라는 어엿한 이름을 가진, "동네 주민들이 함께 기르던" 개였다. 입양 계획까지 있던 한 생명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그동안 돌보아오던 주민들을 울렸고, 급기야 지난달 28일 청와대 국민청원에 '유기견 포획 시 마취총 사용을 개선해달라'는 글이 올라와 닷새 동안 3천 명 넘는 사람들이 동의했다. 유기견 상암이 관련 뉴스1 기사 어찌 보면 대수롭지 않을 수 있는 유기견 한 마리의 죽음이지만, 불과 얼마 전 대전 한 동물원의 '퓨마 사살' 사건이 있었던 터라 더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관심을 갖는 것도 잠시뿐 제도와 의식 개선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금세 잊히고 묻히고 말 것이다. 미국 하버드대학교의 석학으로, 미국 대통령들도 자문을 구하곤 하는 데이비드 거겐(David Gergen) 교수는 라는 리더십 수업에서 학생들에게 꼭 <어메이징 그레이스 Amazing Grace, 2008년 개봉>라는 영화를 보여준다. 영국에서 노예제도 폐지운동을 이끈 정치인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의 생애를 다룬 영화로, 세상의 고정관념을 깨고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를 관철하는 과정이 얼마나 외롭고 힘든 과정인지를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더란 기성세력의 도전과 저항에 기꺼이 맞설 수 있어야 하고, 그럴 수 있는 사람만이 진정한 리더일 수 있음을 일깨워주려는 교수의 의도이다. 윌버포스가 살았던 18~19세기에 아프리카에서 배에 실려온 흑인 노예들은 '사람'이 아닌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므로.  어메이징 그레이스 영화 포스터 그런데 '영국의 양심'으로 불리던 그의 업적은 노예무역제도 폐지 뿐만이 아니다. 그는 1824년 리차드 마틴(Richard Martin)과 함께 전 세계에 현존하는 동물단체 중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큰 단체인 RSPCA(Royal Society for the Prevention of Cruelty to Animals)를 만들었다. 리차드 마틴은 1822년 영국의회를 통과한 'Richard Martin's Act'를 만든 장본인으로 당시 이 법은 농장동물의 학대를 방지하는 법으로 세계 최초의 동물보호법이라고도 할 수 있다. 현재 우리나라의 본격적인 동물보호운동의 역사도 RSPCA의 긴밀한 지원 아래서 이루어졌다는 시각이 많다. 윌버포스와 RSPCA가 있는 영국은 이처럼 오래전부터 명실상부한 동물복지·동물권리 선진국이었다. 그런 영국이 이번 달 다시금 "세계에서 가장 높은 동물 복지 수준을 갖추도록 한다"는 방침을 천명하고 나섰다. 영국 '동물 복지부' 장관인 데이빗 러틀리는 지난 1일 보도자료에서 "이번 일련의 조치들은 영국이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동물 복지 기준을 갖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하기 위한 것이다(These changes form part of our efforts to ensure we have the highest animal welfare standards in the world.)"라고 밝혔다. 영국 정부 보도자료 보기 이번 조치에 따르면 앞으로는 ▶강아지를 팔 때 꼭 어미 개와 같이 있는 걸 확인하도록 강제하고 ▶강아지를 사려는 사람이 강아지를 직접 보지 않은 채 온라인 등으로 구매하는 것을 금지하고 강아지나 고양이의 건강 문제나 사회화를 고려해 8주 이하의 어린 강아지나 고양이는 거래하지 못하도록 하고 어미 곁에 두도록 하며 강아지 분양업자에 대해 '등급제(star rating)'를 도입해 전문 판매업자 등이 분양업자들을 동물 복지 상태에 의거해 평가하도록 하게 된다. 궁극적으로는 열악한 환경에서 오로지 돈을 벌기 위해 새끼 번식에만 열중하는 강아지 공장(puppy mills)들과 그 속에서 죽을 때까지 새끼만 낳다 스러져가는 '번식견'들 이른바 '배터리 개(battery dogs)'들을 금지하기 위한 조치이다. '루시 법(Lucy's Law)'이라고도 불리는 이번 규제 강화 조치는 개 한 마리에 의해 촉발되었다. 루시 SNS 사진 "강아지 농장을 없애고 싶은 분들은 이 포스트를 공유해주세요"라고 적힌 팻말과 함께 찍힌 루시는 2015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대부분의 시간을 강아지 농장(공장)의 '번식견'으로 살았다. 태어나서 5-6년의 시간 동안 1년에도 몇 번씩 임신과 출산을 반복하며 살던 끝에 척추가 심하게 휘고 엉덩이가 짓무르는 등의 후유증으로 입양이 됐지만 2년도 안 돼 숨지고 말았다. 루시를 입양한 주인 리사 가너 씨는 루시의 SNS 계정을 만들었고 이는 영국 내에서 개나 고양이를 직접 '기른' 사람이나 '기를' 사람이 아닌 제3자가 판매하는 것을 아예 금지하자는 캠페인으로 이어졌다. 이에 6개월 동안 15만 명 가까운 사람들이 서명했다. 영국 환경부 장관인 마이클 고브는 지난 8월 이 법을 소개하면서 "동물의 복지를 무시한 사람들이 제3자가 관여하는 이같은 비참한 거래로 더 이상 이익을 얻어서는 안 된다", "'루시 법'으로 많은 반려동물들이 사랑받는 삶의 출발점에 설 수 있을 것이다"라고 밝혔다. 제3자가 오직 이익만을 위해 주도하는 동물 거래를 막아 동물들의 복지와 권리를 향상시키겠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앞으로 강아지나 새끼 고양이를 기르고 싶은 사람들은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애완동물 가게가 아닌 입양센터 또는 번식업자를 찾아가 직접 얼굴을 마주 보고 6개월 이상 된 새끼만 데려오게 될 전망이다. 영국 정부는 이와 함께 ▶동물 학대 범죄자는 최고 5년의 금고형에 처하고 ▶도살장에 CCTV 설치도 의무화했다. [연관 기사] [글로벌24 오늘의 픽] 영국의 동물복지 강화시킨 ‘루시 법’ 마하트마 간디는 이런 말을 남겼다. "한 나라의 위대함과 도덕적인 진보는 그 나라에서 동물이 받는 대우로 가늠할 수 있다(The greatness of a nation and its moral progress can be judged by the way its animals are treated.)" 영국 정부의 결단과 노력이 세계를, 사람들 뿐만 아니라 동물들도 살만한 곳으로 만드는데 영향력을 미치기를 바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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