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의 시작 1948년 10월 19일

입력 2018.10.19 (22:03) 수정 2018.10.19 (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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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멘트]
현대사의 비극인
여순사건의 발생 경과와 배경,
이후 사회적 영향 등을
먼저, 지종익 기자가
보도합니다.





[리포트]
1948년 4월
제주도에서 남한 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며
봉기가 일어납니다.

이른바 제주 4.3 사건.

계속된 진압에도
소요사태가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정부는 10월 19일 아침 7시,
여수에 주둔하던 14연대에
출동 명령을 내립니다.

군내에 좌익과 우익이 혼재하던 시대,

군인들은
같은 민족에게 총구를 겨눌 수 없다며
제주 출동 명령을 거부하고
여수뿐만 아니라 순천 등
전남 동부지역을 장악합니다.

[인터뷰]주철희/역사학자·여순사건 연구자
"부당한 명령을 받은 겁니다. 그 부당한 명령이란 말은 뭐냐면 자국의 군대에 자국민을 학살하라는 명령이었다는 말이에요."
그 명령을 어떻게 따르냐 말이에요. 그래서 14연대 군인들은 그 명령을 거부하고 항명을 한거죠.

이 과정에서 경찰과 우익계 인사
다수가 숨졌습니다.

결국, 10월 22일
여수와 순천 지역에 계엄령이 선포되고
진압군이 투입됩니다.

항공기와 장갑차,
박격포 등이 동원된 대대적인 작전으로
사건 발생 일주일 만인 10월 27일
공식적인 진압작전이 마무리됐습니다.

그러나 비극은 이때부터 시작됐습니다.

14연대 세력과
부역자 색출에 나선 진압군은
경찰과 우익인사들이 좌익으로 지목한
사람을 즉결 처형했습니다.

2천 채가 넘는 집들이 불타고
여수와 순천, 광양 보성 등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만
최대 만여 명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인터뷰]김득중/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사람을 살리고 죽이는 게 부대 지휘관의 자의로 마음대로 살리고 죽인 것이고 그 처형의 과정도 법에 의거하지 않은 것이었고 처형의 방식도 굉장히 잔인했던 것이죠."

군과 경찰의
무자비한 보복이 자행되면서 그야말로
아비규환의 나날이 계속됐습니다.

한동네 주민 간에도
좌익이냐 우익이냐 편 가르기가 되면서
희생자 가족들은 아픔을 가슴속에
묻어야만 했습니다.

[인터뷰]최정수/여순사건 피해 유가족
"좌익이 뭔지 그때 당시에는 우익이 뭔지 그런 것은 전혀 모르고, 모르고...(아버지가) 어떻게 해서 죽었어요? 뭐로 해서 죽었어요? 그런 것은 일절 몰어보지 않아요"

여순사건은
유가족에는 국가폭력의 공포와
씻을 수 없는 아픔을 남겼고,

이념 대결이 한창이던 시대
이승만 정부의 반공 노선을 더욱 강화하고
국가보안법을 제정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KBS 뉴스 지종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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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극의 시작 1948년 10월 19일
    • 입력 2018-10-19 22:03:46
    • 수정2018-10-19 22:11:47
    뉴스9(광주)
[앵커멘트] 현대사의 비극인 여순사건의 발생 경과와 배경, 이후 사회적 영향 등을 먼저, 지종익 기자가 보도합니다. [리포트] 1948년 4월 제주도에서 남한 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며 봉기가 일어납니다. 이른바 제주 4.3 사건. 계속된 진압에도 소요사태가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정부는 10월 19일 아침 7시, 여수에 주둔하던 14연대에 출동 명령을 내립니다. 군내에 좌익과 우익이 혼재하던 시대, 군인들은 같은 민족에게 총구를 겨눌 수 없다며 제주 출동 명령을 거부하고 여수뿐만 아니라 순천 등 전남 동부지역을 장악합니다. [인터뷰]주철희/역사학자·여순사건 연구자 "부당한 명령을 받은 겁니다. 그 부당한 명령이란 말은 뭐냐면 자국의 군대에 자국민을 학살하라는 명령이었다는 말이에요." 그 명령을 어떻게 따르냐 말이에요. 그래서 14연대 군인들은 그 명령을 거부하고 항명을 한거죠. 이 과정에서 경찰과 우익계 인사 다수가 숨졌습니다. 결국, 10월 22일 여수와 순천 지역에 계엄령이 선포되고 진압군이 투입됩니다. 항공기와 장갑차, 박격포 등이 동원된 대대적인 작전으로 사건 발생 일주일 만인 10월 27일 공식적인 진압작전이 마무리됐습니다. 그러나 비극은 이때부터 시작됐습니다. 14연대 세력과 부역자 색출에 나선 진압군은 경찰과 우익인사들이 좌익으로 지목한 사람을 즉결 처형했습니다. 2천 채가 넘는 집들이 불타고 여수와 순천, 광양 보성 등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만 최대 만여 명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인터뷰]김득중/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사람을 살리고 죽이는 게 부대 지휘관의 자의로 마음대로 살리고 죽인 것이고 그 처형의 과정도 법에 의거하지 않은 것이었고 처형의 방식도 굉장히 잔인했던 것이죠." 군과 경찰의 무자비한 보복이 자행되면서 그야말로 아비규환의 나날이 계속됐습니다. 한동네 주민 간에도 좌익이냐 우익이냐 편 가르기가 되면서 희생자 가족들은 아픔을 가슴속에 묻어야만 했습니다. [인터뷰]최정수/여순사건 피해 유가족 "좌익이 뭔지 그때 당시에는 우익이 뭔지 그런 것은 전혀 모르고, 모르고...(아버지가) 어떻게 해서 죽었어요? 뭐로 해서 죽었어요? 그런 것은 일절 몰어보지 않아요" 여순사건은 유가족에는 국가폭력의 공포와 씻을 수 없는 아픔을 남겼고, 이념 대결이 한창이던 시대 이승만 정부의 반공 노선을 더욱 강화하고 국가보안법을 제정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KBS 뉴스 지종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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