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법부가 행정부 산하?…국회, 22년 만에 ‘몰래’ 바로잡는다

입력 2018.10.26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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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회의사당 로텐더홀(왼쪽)과 이동녕 선생 흉상


"선서!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며…"

2017년 5월 10일 낮 12시. 제19대 문재인 대통령 취임 선서 행사가 국회의사당 로텐더홀에서 열렸습니다. '로텐더홀'(rotunda)은 본회의장 앞 넓은 중앙 공간을 이릅니다. 국민들에겐 의원들이 점거와 농성을 펼치는 단골 장소로 기억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로텐더홀은 주요 회의장에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고, 제헌절 기념식 등 국가 주요 행사가 열리는 입법부의 상징과 같은 곳입니다. 행정부 수장인 문 대통령이 로텐더홀에서 헌법 준수와 입법부 존중 의지를 공개 천명한 것도 이 때문이겠죠.

로덴터홀에는 세 분의 의회인상(議會人像)이 있습니다. 2000년 5월 제헌국회 초대 국회의장을 지낸 우남(雩南) 이승만 전 대통령과 2대 국회의장이었던 해공(海公) 신익희 선생의 전신상이 섰습니다. 이보다 앞선 1996년 5월에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초대 의장이자 임시정부 주석을 지낸 석오(石吾) 이동녕 선생 흉상이 건립됐습니다.

대한민국임시의정원 기념촬영(1919.9.17·왼쪽)과 초대의장 이동녕 선생 대한민국임시의정원 기념촬영(1919.9.17·왼쪽)과 초대의장 이동녕 선생

이동녕 선생(1869~1940)은 어떤 분일까요? 이 선생은 1919년 3·1 운동 후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4월 10일 임시의정원의 초대 의장을 맡았습니다. 임시의정원은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정부 기본법인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제정해 임시정부를 세웠습니다. 즉 임시정부 수립의 산파역을 했습니다. 국회 중앙홀에 가장 먼저 선생의 흉상을 세운 건 국회의 뿌리가 임시의정원에 있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초대의장이라고 적힌 이동녕 선생 흉상‘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초대의장이라고 적힌 이동녕 선생 흉상

'임시정부 의정원' 초대 의장?

그런데 최근 흉상에 이상한 점이 발견됐습니다. 대리석 좌대 설명에 이동녕 선생을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초대의장'이 아닌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초대의장'으로 쓰여 있었던 겁니다.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은 지금으로 따지면 각각 행정부-입법부 관계이기 때문에 자칫 국회의 전신인 임시의정원이 정부 산하기관처럼 비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확인한 더불어민주당 김병욱 의원실의 손낙구 보좌관이 국회사무처에 관련 내용을 공식 질의했습니다. 이에 국회사무처는 김용달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 한시준 단국대 사학과 교수에게 자문을 구했습니다. 자문 결과는 이렇습니다.

임시의정원 제1회 기사록(1919.4.11)임시의정원 제1회 기사록(1919.4.11)

1. 1919년 4월 임시의정원 개회 첫날, "본회의 명칭을 임시의정원이라 칭하기로 가결됐다"는 기록이 있음. 이후 임시의정원 기록에서 정식 명칭을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으로 사용했음

2. '대한민국임시헌장 제2조'에서 "대한민국은 임시정부가 임시의정원의 결의에 의하여 통치함"이라고 규정하였음

=>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명칭을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으로 변경할 필요


국회사무처가 설명 오류를 인정하고 바로잡겠다고 밝힌 공문국회사무처가 설명 오류를 인정하고 바로잡겠다고 밝힌 공문

창피한 국회, 별도의 식(式)도 못해

이런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던 국회는 자문 결과를 받은 뒤 설명문을 수정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흉상을 기증한 '석오 이동녕 선생 기념사업회'에 이미 관련 계획을 설명했고, 이르면 이달 말, 늦어도 다음 달 초에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초대의장'으로 바뀐 새 설명문을 달 예정이라 합니다. 제막식이 있은지 22년 만의 교체입니다.

다만, 이를 공개적으로 바꿀 것 같지는 않습니다. 기자가 국회사무처 담당자에게 구체적인 교체 시기를 물어보니 "무슨 흉상이요?" "뭘 바꾼다고요?"라는 식으로 답변을 빙빙 돌렸습니다. 그러다 마지못해 "다음 주 안에 교체를 완료한다"고 하더군요. 임시의정원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국회가 잘못된 설명을 22년 동안 내버려뒀다는 사실보다, 이를 '남 몰래' 바로잡으려는 태도가 더 실망스럽습니다.

삼권분립 초석…내년 임시의정원 100주년

내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자 임시의정원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국회 역시 대대적인 기념 행사를 준비 중이라고 합니다. 늦었지만 100주년을 맞기 전에 대한민국 정통성과 민주주의, 삼권분립의 초석을 다진 임시의정원의 역사적 의미가 바로잡혀 다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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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법부가 행정부 산하?…국회, 22년 만에 ‘몰래’ 바로잡는다
    • 입력 2018-10-26 16:00:06
    취재K
▲ 국회의사당 로텐더홀(왼쪽)과 이동녕 선생 흉상


"선서!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며…"

2017년 5월 10일 낮 12시. 제19대 문재인 대통령 취임 선서 행사가 국회의사당 로텐더홀에서 열렸습니다. '로텐더홀'(rotunda)은 본회의장 앞 넓은 중앙 공간을 이릅니다. 국민들에겐 의원들이 점거와 농성을 펼치는 단골 장소로 기억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로텐더홀은 주요 회의장에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고, 제헌절 기념식 등 국가 주요 행사가 열리는 입법부의 상징과 같은 곳입니다. 행정부 수장인 문 대통령이 로텐더홀에서 헌법 준수와 입법부 존중 의지를 공개 천명한 것도 이 때문이겠죠.

로덴터홀에는 세 분의 의회인상(議會人像)이 있습니다. 2000년 5월 제헌국회 초대 국회의장을 지낸 우남(雩南) 이승만 전 대통령과 2대 국회의장이었던 해공(海公) 신익희 선생의 전신상이 섰습니다. 이보다 앞선 1996년 5월에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초대 의장이자 임시정부 주석을 지낸 석오(石吾) 이동녕 선생 흉상이 건립됐습니다.

대한민국임시의정원 기념촬영(1919.9.17·왼쪽)과 초대의장 이동녕 선생
이동녕 선생(1869~1940)은 어떤 분일까요? 이 선생은 1919년 3·1 운동 후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4월 10일 임시의정원의 초대 의장을 맡았습니다. 임시의정원은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정부 기본법인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제정해 임시정부를 세웠습니다. 즉 임시정부 수립의 산파역을 했습니다. 국회 중앙홀에 가장 먼저 선생의 흉상을 세운 건 국회의 뿌리가 임시의정원에 있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초대의장이라고 적힌 이동녕 선생 흉상
'임시정부 의정원' 초대 의장?

그런데 최근 흉상에 이상한 점이 발견됐습니다. 대리석 좌대 설명에 이동녕 선생을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초대의장'이 아닌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초대의장'으로 쓰여 있었던 겁니다.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은 지금으로 따지면 각각 행정부-입법부 관계이기 때문에 자칫 국회의 전신인 임시의정원이 정부 산하기관처럼 비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확인한 더불어민주당 김병욱 의원실의 손낙구 보좌관이 국회사무처에 관련 내용을 공식 질의했습니다. 이에 국회사무처는 김용달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 한시준 단국대 사학과 교수에게 자문을 구했습니다. 자문 결과는 이렇습니다.

임시의정원 제1회 기사록(1919.4.11)
1. 1919년 4월 임시의정원 개회 첫날, "본회의 명칭을 임시의정원이라 칭하기로 가결됐다"는 기록이 있음. 이후 임시의정원 기록에서 정식 명칭을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으로 사용했음

2. '대한민국임시헌장 제2조'에서 "대한민국은 임시정부가 임시의정원의 결의에 의하여 통치함"이라고 규정하였음

=>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명칭을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으로 변경할 필요


국회사무처가 설명 오류를 인정하고 바로잡겠다고 밝힌 공문
창피한 국회, 별도의 식(式)도 못해

이런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던 국회는 자문 결과를 받은 뒤 설명문을 수정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흉상을 기증한 '석오 이동녕 선생 기념사업회'에 이미 관련 계획을 설명했고, 이르면 이달 말, 늦어도 다음 달 초에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초대의장'으로 바뀐 새 설명문을 달 예정이라 합니다. 제막식이 있은지 22년 만의 교체입니다.

다만, 이를 공개적으로 바꿀 것 같지는 않습니다. 기자가 국회사무처 담당자에게 구체적인 교체 시기를 물어보니 "무슨 흉상이요?" "뭘 바꾼다고요?"라는 식으로 답변을 빙빙 돌렸습니다. 그러다 마지못해 "다음 주 안에 교체를 완료한다"고 하더군요. 임시의정원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국회가 잘못된 설명을 22년 동안 내버려뒀다는 사실보다, 이를 '남 몰래' 바로잡으려는 태도가 더 실망스럽습니다.

삼권분립 초석…내년 임시의정원 100주년

내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자 임시의정원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국회 역시 대대적인 기념 행사를 준비 중이라고 합니다. 늦었지만 100주년을 맞기 전에 대한민국 정통성과 민주주의, 삼권분립의 초석을 다진 임시의정원의 역사적 의미가 바로잡혀 다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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