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신조와 푸에블로호…올해 50회 맞은 SCM의 유래는?

입력 2018.10.29 (06:35) 수정 2018.10.29 (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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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1월 21일…서울 종로구 청운동

1968년 1월 21일 밤 10시. 서울 종로구 청운동 자하문 일대에서 총격전이 벌어졌다. 북한 특수부대 소속 무장 게릴라 31명이 청와대를 목표로 침투하다 검문 경찰들에게 발각돼, 우리 군경과 교전을 벌인 것. 이른바 '1.21 사건' 또는 현장에서 유일하게 생포된 1명의 이름을 따 '김신조 사건'으로도 불린다. 나머지 29명은 추적 끝에 사살됐고, 1명은 북으로 도주했다.

사건 직후 기자회견에서 침투 이유를 묻는 질문에 김신조는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수다"라고 말했다. 청와대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4대문 안, 서울 한복판까지 북한 무장 게릴라가 침투했다는 사실에 온 국민이 충격을 받았다.

1.21 사건 직후 포승줄에 두 손이 묶인 채 기자회견을 하는 김신조 (출처 : KBS 자료 영상 캡처)1.21 사건 직후 포승줄에 두 손이 묶인 채 기자회견을 하는 김신조 (출처 : KBS 자료 영상 캡처)

1968년 1월 23일…이번에는 동해

만 이틀도 지나지 않은 1월 23일 오후 1시 45분 동해에서는 미 해군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가 북한에 납치됐다. 공해 상에서 첩보 활동을 벌이던 미군 함정이 무장한 북한 초계정 4척과 미그기 2대의 위협 아래 나포돼 원산항으로 끌려갔다. 곧바로 미국 정부는 국가안보회의를 소집하고 핵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를 원산항 근해로 출동시켰다. 1월 24일 판문점에서 열린 제261차 군사정전회의에서 유엔군 수석 대표는 북측에 푸에블로호 사건과 1.21 사건을 규탄하고 항의했다. 하지만 별 소득이 없었다.

결국, 이어진 수십 차례의 북-미간 협상 끝에 미국이 영해 침입을 시인하고 사과하는 조건으로 그해 12월 80여명의 생존 승무원과 나포 과정에서 숨진 미군 시신 1구만 판문점을 통해 돌아왔다. '푸에블로호 납치'는 미군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사건 중 하나로 평가된다.

푸에블로호 사건을 전한 당시 신문과 납치 직후 푸에블로호 승무원들 (출처 : KBS 자료 영상 캡처)푸에블로호 사건을 전한 당시 신문과 납치 직후 푸에블로호 승무원들 (출처 : KBS 자료 영상 캡처)

두 사건으로 인한 변화들…주민증, 예비군, 교련 그리고 SCM

1968년 1월의 '충격'을 겪으면서 우리 정부는 검문검색의 편의를 위해 '주민등록증' 제도를 만들었다. 후방 대비를 위해 향토예비군이 창설됐고, 고등학교와 대학교에 '교련'과목이 신설됐다. 당시 30개월이던 육군 병사 의무복무기간은 36개월로 늘어났다.

두 사건을 겪은 한미 당국은 북한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안보 동맹을 강화해야 할 필요성에 공감했다. 그 결과물이 그해 5월 27~28일 미국 워싱턴 D.C.에서 열린 제1차 한미 국방각료 회담이었다. 1971년 제4차 회의부터 국방과 외교분야를 아우르는 정부 차원의 연례 안보회의로 격상됐고, 매년 10월 서울과 워싱턴 D.C.를 격년으로 오가며 개최하는 것으로 정례화됐다. 바로 올해 50회를 맞은 한미 안보협의회의, SCM(Security Consultative Meeting)이다.

50회에 걸친 SCM을 통해 한미연합군사령부 창설(1977년, 제10차 SCM), 평시 작전통제권 전환(1994년, 제26차 SCM) 등 굵직굵직한 한반도 안보 현안들이 논의되고 결정됐다. 국방부는 "SCM은 지난 반세기 동안 한미동맹의 상징이자 한반도의 안보를 보장해온 대체 불가능한 동맹협의체로 자리매김했다"고 평가했다.

제1차 한미 국방각료회담 관련 문서 (출처 : KBS 뉴스 캡처)제1차 한미 국방각료회담 관련 문서 (출처 : KBS 뉴스 캡처)

제50회 SCM…연합훈련 유예, 미래연합사 구성안 합의될 듯

올해 SCM은 현지시각으로 오는 31일 미국 워싱턴 D.C. 미 국방부 청사인 펜타곤에서 열린다. 국방부는 "정경두 국방장관과 제임스 매티스 미 국방장관이 한반도 비핵화와 항구적 평화정착을 위한 협력방안과 전시작전통제권 전환 추진, 한미 연합연습 시행방안 등을 논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구체적으로 향후 전시작전통제권 전환 이후 한국군 주도의 연합군사령부 편성방안이 합의될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 한미 연합군사령부는 미군 대장이 사령관, 한국군 대장이 부사령관을 맡고 있는데 전작권이 한국군으로 전환된 뒤 구성될 '미래연합군사령부'에서는 한국군 대장이 사령관을, 미군 대장이 부사령관을 맡는 방안에 양국 국방장관이 합의할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최근 논란이 됐던 대규모 한미 연합공중훈련인 '비질런트 에이스(Vigilant ACE)' 유예 여부가 최종 결정된다. 북한에 대한 전면적인 선제공격을 가정해 2015년부터 시행된 이 훈련은 실시될 때마다 북한이 극도로 반발했다. 북미 간 비핵화 협상이 진행되는 국면에서 미국 측이 최근 선제적으로 훈련 유예를 언급했고, 이번 SCM에서 양국 국방장관이 유예에 최종 합의할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의 도발로 시작된 SCM에서 북한 공격을 가정한 훈련 유예 여부가 결정되는 건 역설적이다.

비질런트에이스 훈련 실시를 강하게 비판하고 있는 조선중앙방송 (출처 : KBS 뉴스 캡처)비질런트에이스 훈련 실시를 강하게 비판하고 있는 조선중앙방송 (출처 : KBS 뉴스 캡처)

숫자에 민감한 사람이라면 1968년 1회로 시작했으면, 2018년 올해는 51회여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이유는 매년 10월 열리던 SCM이 딱 한 번 개최되지 않았던 적이 있기 때문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됐던 1979년 한 해만 SCM이 열리지 않았다.

나포된 푸에블로호는 어디에?

앞서 언급한 푸에블로호 납치 사건 때 함정에 타고 있던 승무원들과 달리 푸에블로호 함정 자체는 여전히 북한에 있다. 1995년 사건 27년 만에 북한은 미 CNN 기자에게 원산항에서 '반미 학습관'으로 활용하고 있는 푸에블로호 내부를 공개했다. 1998년 김정일 위원은 원산항에 있던 푸에블로호는 대동강으로 옮길 것을 지시했다. 1866년 미국 상선 제네럴 셔먼호가 불탔던 곳이다.

1995년 처음 공개된 푸에블로호 내부에서 당시 총격 흔적을 가리키는 북한군(왼쪽) 1999년 대동강변에 전시된 푸에블로호 앞에서 반미 교육을 받고 있는 북한 학생들(오른쪽) (출처 : KBS 뉴스 캡처)1995년 처음 공개된 푸에블로호 내부에서 당시 총격 흔적을 가리키는 북한군(왼쪽) 1999년 대동강변에 전시된 푸에블로호 앞에서 반미 교육을 받고 있는 북한 학생들(오른쪽) (출처 : KBS 뉴스 캡처)

푸에블로호는 2013년 평양 보통강으로 옮겨져 여전히 '미군을 상대로 한 승전의 상징물'로 전시되고 있다. 올해 초 푸에블로호에 탑승했던 승무원과 가족들은 북한을 상대로 총 6억 달러, 우리 돈 약 6800억 원을 요구하며 미 연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푸에블로호는 북미 협상 과정에서 미군 유해 송환 카드와 함께 북한이 미국에 줄 수 있는 '선물'로 활용될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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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10-29 06:35:47
    • 수정2018-10-29 07:12:28
    취재K
1968년 1월 21일…서울 종로구 청운동

1968년 1월 21일 밤 10시. 서울 종로구 청운동 자하문 일대에서 총격전이 벌어졌다. 북한 특수부대 소속 무장 게릴라 31명이 청와대를 목표로 침투하다 검문 경찰들에게 발각돼, 우리 군경과 교전을 벌인 것. 이른바 '1.21 사건' 또는 현장에서 유일하게 생포된 1명의 이름을 따 '김신조 사건'으로도 불린다. 나머지 29명은 추적 끝에 사살됐고, 1명은 북으로 도주했다.

사건 직후 기자회견에서 침투 이유를 묻는 질문에 김신조는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수다"라고 말했다. 청와대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4대문 안, 서울 한복판까지 북한 무장 게릴라가 침투했다는 사실에 온 국민이 충격을 받았다.

1.21 사건 직후 포승줄에 두 손이 묶인 채 기자회견을 하는 김신조 (출처 : KBS 자료 영상 캡처)
1968년 1월 23일…이번에는 동해

만 이틀도 지나지 않은 1월 23일 오후 1시 45분 동해에서는 미 해군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가 북한에 납치됐다. 공해 상에서 첩보 활동을 벌이던 미군 함정이 무장한 북한 초계정 4척과 미그기 2대의 위협 아래 나포돼 원산항으로 끌려갔다. 곧바로 미국 정부는 국가안보회의를 소집하고 핵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를 원산항 근해로 출동시켰다. 1월 24일 판문점에서 열린 제261차 군사정전회의에서 유엔군 수석 대표는 북측에 푸에블로호 사건과 1.21 사건을 규탄하고 항의했다. 하지만 별 소득이 없었다.

결국, 이어진 수십 차례의 북-미간 협상 끝에 미국이 영해 침입을 시인하고 사과하는 조건으로 그해 12월 80여명의 생존 승무원과 나포 과정에서 숨진 미군 시신 1구만 판문점을 통해 돌아왔다. '푸에블로호 납치'는 미군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사건 중 하나로 평가된다.

푸에블로호 사건을 전한 당시 신문과 납치 직후 푸에블로호 승무원들 (출처 : KBS 자료 영상 캡처)
두 사건으로 인한 변화들…주민증, 예비군, 교련 그리고 SCM

1968년 1월의 '충격'을 겪으면서 우리 정부는 검문검색의 편의를 위해 '주민등록증' 제도를 만들었다. 후방 대비를 위해 향토예비군이 창설됐고, 고등학교와 대학교에 '교련'과목이 신설됐다. 당시 30개월이던 육군 병사 의무복무기간은 36개월로 늘어났다.

두 사건을 겪은 한미 당국은 북한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안보 동맹을 강화해야 할 필요성에 공감했다. 그 결과물이 그해 5월 27~28일 미국 워싱턴 D.C.에서 열린 제1차 한미 국방각료 회담이었다. 1971년 제4차 회의부터 국방과 외교분야를 아우르는 정부 차원의 연례 안보회의로 격상됐고, 매년 10월 서울과 워싱턴 D.C.를 격년으로 오가며 개최하는 것으로 정례화됐다. 바로 올해 50회를 맞은 한미 안보협의회의, SCM(Security Consultative Meeting)이다.

50회에 걸친 SCM을 통해 한미연합군사령부 창설(1977년, 제10차 SCM), 평시 작전통제권 전환(1994년, 제26차 SCM) 등 굵직굵직한 한반도 안보 현안들이 논의되고 결정됐다. 국방부는 "SCM은 지난 반세기 동안 한미동맹의 상징이자 한반도의 안보를 보장해온 대체 불가능한 동맹협의체로 자리매김했다"고 평가했다.

제1차 한미 국방각료회담 관련 문서 (출처 : KBS 뉴스 캡처)
제50회 SCM…연합훈련 유예, 미래연합사 구성안 합의될 듯

올해 SCM은 현지시각으로 오는 31일 미국 워싱턴 D.C. 미 국방부 청사인 펜타곤에서 열린다. 국방부는 "정경두 국방장관과 제임스 매티스 미 국방장관이 한반도 비핵화와 항구적 평화정착을 위한 협력방안과 전시작전통제권 전환 추진, 한미 연합연습 시행방안 등을 논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구체적으로 향후 전시작전통제권 전환 이후 한국군 주도의 연합군사령부 편성방안이 합의될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 한미 연합군사령부는 미군 대장이 사령관, 한국군 대장이 부사령관을 맡고 있는데 전작권이 한국군으로 전환된 뒤 구성될 '미래연합군사령부'에서는 한국군 대장이 사령관을, 미군 대장이 부사령관을 맡는 방안에 양국 국방장관이 합의할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최근 논란이 됐던 대규모 한미 연합공중훈련인 '비질런트 에이스(Vigilant ACE)' 유예 여부가 최종 결정된다. 북한에 대한 전면적인 선제공격을 가정해 2015년부터 시행된 이 훈련은 실시될 때마다 북한이 극도로 반발했다. 북미 간 비핵화 협상이 진행되는 국면에서 미국 측이 최근 선제적으로 훈련 유예를 언급했고, 이번 SCM에서 양국 국방장관이 유예에 최종 합의할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의 도발로 시작된 SCM에서 북한 공격을 가정한 훈련 유예 여부가 결정되는 건 역설적이다.

비질런트에이스 훈련 실시를 강하게 비판하고 있는 조선중앙방송 (출처 : KBS 뉴스 캡처)
숫자에 민감한 사람이라면 1968년 1회로 시작했으면, 2018년 올해는 51회여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이유는 매년 10월 열리던 SCM이 딱 한 번 개최되지 않았던 적이 있기 때문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됐던 1979년 한 해만 SCM이 열리지 않았다.

나포된 푸에블로호는 어디에?

앞서 언급한 푸에블로호 납치 사건 때 함정에 타고 있던 승무원들과 달리 푸에블로호 함정 자체는 여전히 북한에 있다. 1995년 사건 27년 만에 북한은 미 CNN 기자에게 원산항에서 '반미 학습관'으로 활용하고 있는 푸에블로호 내부를 공개했다. 1998년 김정일 위원은 원산항에 있던 푸에블로호는 대동강으로 옮길 것을 지시했다. 1866년 미국 상선 제네럴 셔먼호가 불탔던 곳이다.

1995년 처음 공개된 푸에블로호 내부에서 당시 총격 흔적을 가리키는 북한군(왼쪽) 1999년 대동강변에 전시된 푸에블로호 앞에서 반미 교육을 받고 있는 북한 학생들(오른쪽) (출처 : KBS 뉴스 캡처)
푸에블로호는 2013년 평양 보통강으로 옮겨져 여전히 '미군을 상대로 한 승전의 상징물'로 전시되고 있다. 올해 초 푸에블로호에 탑승했던 승무원과 가족들은 북한을 상대로 총 6억 달러, 우리 돈 약 6800억 원을 요구하며 미 연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푸에블로호는 북미 협상 과정에서 미군 유해 송환 카드와 함께 북한이 미국에 줄 수 있는 '선물'로 활용될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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