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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기훈 유서대필은 사법공동체가 만든 블랙코미디”
입력 2018.10.29 (07:02) 수정 2018.10.29 (07:03) 연합뉴스
"'1987'로 우리가 승리했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화가 나요. 그 결과가 '1991'이거든요. 1987년보다 1991년 시위에 나선 인원이 더 많았고, 11명이 목숨을 잃었어요. 87년을 깎아내리려는 의도는 아니지만, 승리를 입에 올리는 것은 기만이죠."

1987년 승리의 함성은 양 김의 분열과 삼당 합당을 거치면서 사그라지고 만다. 1991년 봄 젊은이와 노동자들은 국가의 불의에 저항하며 다시 거리로 나서지만, 국가와 기득권의 벽은 높고 공고하기만 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몸을 던져 불의에 항거하는 길을 택한다. 1991년 4월 26일 명지대생 강경대가 전경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맞아 사망하자 피 끓는 청춘의 연쇄 분신이 이어진다.

공안당국은 "사회 혼란을 부추기기 위해 분신자살을 조장하는 세력이 있다"며 분신의 배후를 밝히겠다는 엄포를 놓았고, 이는 사법사상 희대의 조작사건으로 귀결된다. 바로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이다.

1991년 5월 8일 김기설 전국민족민주연합(전민련) 사회부장이 서강대에서 분신자살한다. 그런데 검찰은 '단순하게 변혁운동의 도화선이 되고자 함이 아닙니다'로 시작하는 그의 유서가 조작된 것이라고 발표한다.

김기설의 친구인 강기훈 전민련 총무부장이 유서를 대신 썼다는 것이다. 검찰은 유서 대필과 자살방조라는 혐의로 강기훈을 기소하고 대법원은 강기훈에게 징역 3년을 선고한다.

그러나 10여 년이 지난 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김기설과 강기훈의 필적 재감정을 요구한다. 2007년 11월 국과수는 5명의 감정인이 참여해 재감정한 결과 두 사람의 필체가 다르다는 의견을 낸다.

진실화해위는 법원에 이 사건의 재심을 요청했고, 이에 대법원은 2012년 재심을 개시해 2015년 5월 강씨의 무죄를 확정한다. 원심판결 후 24년 만이었다.

희대의 사법 조작사건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을 스크린으로 옮긴 다큐멘터리 '1991, 봄'이 관객을 찾아온다. 지난 20여 년 동안 언론을 피해 살던 강기훈 씨도 군말 없이 카메라에 자신을 맡겼다.

29일 신사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권경원 감독은 "정말 말도 안 되는 블랙코미디"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제가 블랙코미디나 판타지에 관심이 많아요. 그런데 이 사건은 정말 제일 웃기는 사건이라고 생각했어요. 가장 웃기고 군사정권은 물론, 운동한 사람들의 치부까지 쫀쫀하게 박힌 코미디라고 생각했어요."

강기훈이 범인이 아니라는 사실만 인정했을 뿐 유서를 작성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고 있으며, 사법당국과 국과수는 지금까지도 강씨에 대해 사과하지 않고 있다는 것.

"국과수는 김기설의 자필이라고 인정한 것이나 마찬가지예요. 하지만 사과는 하지 않고 있죠. 그런 식으로 눙치고 있을 뿐이죠. 대법원 판결문도 '아 그래 당신이 쓴 건 아니야' 이게 끝이에요. 검찰은 말할 것도 없죠. 대표적인 조작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사법공동체가 똘똘 뭉쳐서 한 사람을 바보로 만들고 서로 처벌받지 않을 정도로만 죄를 나눠 갖자는 거에요. 이러니 강기훈 씨가 암이 안 생기겠어요."

강기훈 씨는 출소 후 한사코 언론의 눈을 피해 다녔다. 사법조작의 피해자임을 내세워 제도권 정치에 뛰어들 생각도 하지 않았다. 한적한 시골에 살며 일본어 번역으로 밥벌이했고 뒤늦게 기타를 배웠다. 그러나 병마가 그를 덮쳤다. 간암이었다.

"강기훈 씨는 운동권 중에서도 특이한 분이에요. 사실 그 시절 운동권은 뻔뻔한 면이 있어요. 나 운동하고 희생했으니 보상받아야 해. 지원도 해줘. 이런 뻔뻔함이 있는데 강기훈 씨는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을 극도로 싫어해요. 자기 밥벌이는 스스로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남에게 폐를 끼칠까 봐 정말 조심하는 사람이에요."

권 감독은 강씨의 투병을 계기로 이 영화를 제작할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전까지는 강씨에 대한 영상기록물을 만든다는 정도로만 생각했다고.

"처음엔 그냥 행사 때 트는 영상기록물 정도에서 멈출 생각이었는데 여기까지 온 거죠. 이렇게 끝나서는 안 되겠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영화를 만드는 일밖에 없겠다 싶었어요. 영화감독이라기보다 오히려 시민으로서의 사명감 측면에서 만들었어요."

시민들의 후원도 잇따랐다. 권 감독은 제작비 1천만원 모금을 위해 2016년 5월 14일부터 8월 10일까지 소셜 펀딩을 진행했다. 그 결과 1천300여 명이 4천여만원을 후원했다.

"도와주신 분들께는 정말 감사하죠. 그래도 한 번 더 부탁하고 싶어요. 여러 번 봐달라고요. 사실 독립 다큐멘터리가 극장에 걸리는 게 쉽지는 않아요. 2시간 안에 워낙 많은 이야기를 구겨 넣은 덕에 볼 때마다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는 영화로 만들었으니 극장에 오래 걸릴 수 있도록 여러 번 봐주세요. 부탁합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 “강기훈 유서대필은 사법공동체가 만든 블랙코미디”
    • 입력 2018-10-29 07:02:40
    • 수정2018-10-29 07:03:28
    연합뉴스
"'1987'로 우리가 승리했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화가 나요. 그 결과가 '1991'이거든요. 1987년보다 1991년 시위에 나선 인원이 더 많았고, 11명이 목숨을 잃었어요. 87년을 깎아내리려는 의도는 아니지만, 승리를 입에 올리는 것은 기만이죠."

1987년 승리의 함성은 양 김의 분열과 삼당 합당을 거치면서 사그라지고 만다. 1991년 봄 젊은이와 노동자들은 국가의 불의에 저항하며 다시 거리로 나서지만, 국가와 기득권의 벽은 높고 공고하기만 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몸을 던져 불의에 항거하는 길을 택한다. 1991년 4월 26일 명지대생 강경대가 전경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맞아 사망하자 피 끓는 청춘의 연쇄 분신이 이어진다.

공안당국은 "사회 혼란을 부추기기 위해 분신자살을 조장하는 세력이 있다"며 분신의 배후를 밝히겠다는 엄포를 놓았고, 이는 사법사상 희대의 조작사건으로 귀결된다. 바로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이다.

1991년 5월 8일 김기설 전국민족민주연합(전민련) 사회부장이 서강대에서 분신자살한다. 그런데 검찰은 '단순하게 변혁운동의 도화선이 되고자 함이 아닙니다'로 시작하는 그의 유서가 조작된 것이라고 발표한다.

김기설의 친구인 강기훈 전민련 총무부장이 유서를 대신 썼다는 것이다. 검찰은 유서 대필과 자살방조라는 혐의로 강기훈을 기소하고 대법원은 강기훈에게 징역 3년을 선고한다.

그러나 10여 년이 지난 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김기설과 강기훈의 필적 재감정을 요구한다. 2007년 11월 국과수는 5명의 감정인이 참여해 재감정한 결과 두 사람의 필체가 다르다는 의견을 낸다.

진실화해위는 법원에 이 사건의 재심을 요청했고, 이에 대법원은 2012년 재심을 개시해 2015년 5월 강씨의 무죄를 확정한다. 원심판결 후 24년 만이었다.

희대의 사법 조작사건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을 스크린으로 옮긴 다큐멘터리 '1991, 봄'이 관객을 찾아온다. 지난 20여 년 동안 언론을 피해 살던 강기훈 씨도 군말 없이 카메라에 자신을 맡겼다.

29일 신사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권경원 감독은 "정말 말도 안 되는 블랙코미디"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제가 블랙코미디나 판타지에 관심이 많아요. 그런데 이 사건은 정말 제일 웃기는 사건이라고 생각했어요. 가장 웃기고 군사정권은 물론, 운동한 사람들의 치부까지 쫀쫀하게 박힌 코미디라고 생각했어요."

강기훈이 범인이 아니라는 사실만 인정했을 뿐 유서를 작성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고 있으며, 사법당국과 국과수는 지금까지도 강씨에 대해 사과하지 않고 있다는 것.

"국과수는 김기설의 자필이라고 인정한 것이나 마찬가지예요. 하지만 사과는 하지 않고 있죠. 그런 식으로 눙치고 있을 뿐이죠. 대법원 판결문도 '아 그래 당신이 쓴 건 아니야' 이게 끝이에요. 검찰은 말할 것도 없죠. 대표적인 조작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사법공동체가 똘똘 뭉쳐서 한 사람을 바보로 만들고 서로 처벌받지 않을 정도로만 죄를 나눠 갖자는 거에요. 이러니 강기훈 씨가 암이 안 생기겠어요."

강기훈 씨는 출소 후 한사코 언론의 눈을 피해 다녔다. 사법조작의 피해자임을 내세워 제도권 정치에 뛰어들 생각도 하지 않았다. 한적한 시골에 살며 일본어 번역으로 밥벌이했고 뒤늦게 기타를 배웠다. 그러나 병마가 그를 덮쳤다. 간암이었다.

"강기훈 씨는 운동권 중에서도 특이한 분이에요. 사실 그 시절 운동권은 뻔뻔한 면이 있어요. 나 운동하고 희생했으니 보상받아야 해. 지원도 해줘. 이런 뻔뻔함이 있는데 강기훈 씨는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을 극도로 싫어해요. 자기 밥벌이는 스스로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남에게 폐를 끼칠까 봐 정말 조심하는 사람이에요."

권 감독은 강씨의 투병을 계기로 이 영화를 제작할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전까지는 강씨에 대한 영상기록물을 만든다는 정도로만 생각했다고.

"처음엔 그냥 행사 때 트는 영상기록물 정도에서 멈출 생각이었는데 여기까지 온 거죠. 이렇게 끝나서는 안 되겠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영화를 만드는 일밖에 없겠다 싶었어요. 영화감독이라기보다 오히려 시민으로서의 사명감 측면에서 만들었어요."

시민들의 후원도 잇따랐다. 권 감독은 제작비 1천만원 모금을 위해 2016년 5월 14일부터 8월 10일까지 소셜 펀딩을 진행했다. 그 결과 1천300여 명이 4천여만원을 후원했다.

"도와주신 분들께는 정말 감사하죠. 그래도 한 번 더 부탁하고 싶어요. 여러 번 봐달라고요. 사실 독립 다큐멘터리가 극장에 걸리는 게 쉽지는 않아요. 2시간 안에 워낙 많은 이야기를 구겨 넣은 덕에 볼 때마다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는 영화로 만들었으니 극장에 오래 걸릴 수 있도록 여러 번 봐주세요. 부탁합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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