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스페셜] 中 조선족 시조 ‘번시 朴씨’…400년 혈통 족보 공개

입력 2018.12.01 (21:59) 수정 2018.12.01 (2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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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중국에는 무려 400년 동안 족보를 대물림하며 우리 민족의 뿌리를 지켜온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비록, 우리말 우리글은 잊어버렸지만 항렬을 중시하며 어른을 깍듯이 모시고 김치를 담가먹는 등 민족의 풍습을 그대로 간직한채 400년 혈통을 이어온 조선족의 시조, '번시 박 씨' 가문 얘기인데요.

김명주 특파원이 '번시 박 씨' 집성촌을 다녀왔습니다.

[리포트]

웅장한 산세가 병풍처럼 펼쳐진 시골 마을.

물가엔 오리떼가 떠다니고 한쪽에선 아낙네들이 빨래를 하는 평온하고 넉넉한 마을입니다.

마을 입구 버스정류장엔 '피아오푸'라고 쓰여 있습니다.

박 씨 마을이라는 뜻입니다.

이 곳이 바로 한민족의 후예들이 400년 혈통을 지켜온 번시 박씨 집성촌 '박가보촌'입니다.

아직도 이 마을엔 한 집 건너 한 집은 번시 박씨들이 살고 있습니다.

중국의 여느 농촌과 다름 없이 자식들은 다 떠나고 대부분 60대 이상 노인들이 마을을 지키고 있습니다.

이 마을에는 2백여 명의 번시 박씨가 살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11대손인 박문만 선생은 가장 항렬이 높은 어르신입니다.

[박문만/번시 박씨 11대손 : "여기에는 감자랑 채소를 심고 저쪽에는 옥수수를 심고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서 일을 많이 못해요."]

세 자녀는 각자 도시에서 가정을 꾸려 살다보니 한족 아내와 둘 만 남았습니다.

외로울 때마다 가족들 사진을 꺼내봅니다.

[박문만/번시 박씨 11대손 : "(가족들 모두 조선족인가요?) 그럼요. 제가 조선족이니까 우리 가족 전부 조선족이죠."]

박문만 선생은 자신의 신분증까지 자랑스럽게 보여줬습니다.

1943년 11월 29일생 조선족입니다.

400년 혈통이 기록된 번시 박씨 족보는 이 집의 가보와도 같습니다.

가문 대표들이 집집마다 전해 내려오던 족보들을 모아 5년 간의 혈통 조사를 거쳐 지난 2015년 새 족보를 펴냈습니다.

이 마을에는 박문만 선생 조카도 만주족 아내와 살고 있습니다.

[박명구/번시 박씨 12대손 : "제가 71살이고 삼촌은 74살이라 3살 차이인데 큰 삼촌이라고 불러요. 삼촌을 정말 존경합니다. 만약에 삼촌이 10대라고 해도 작은 삼촌이라고 불러야 해요."]

번시 박씨는 지난 400년 동안 통혼을 금지하고, 자식을 낳으면 돌림자로 이름을 지어왔습니다.

30개나 되는 돌림자를 줄줄 외울 정도로 항렬을 중요시합니다.

[박문만/번시 박씨 11대손 : "응천대중국, 자덕김부옥, 문명희승세, 준위진태창, 시서기홍업, 공유강무량 이렇게 돌림자가 있습니다."]

번시 박씨 선조는 1619년 강홍립 장군을 따라 압록강을 건넌 것으로 청나라 사기에 기록돼 있습니다.

연합 작전을 펼치던 명나라가 누르하치에게 패하자 전쟁 포로로 남게 됐다는 게 정설입니다.

[박명옥/번시 박씨 12대손 : "청나라 사기에는 포로라고 기록돼 있는데 전쟁터에서 투항한 게 아니냐는 의견도 있어요. 저는 투항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대다수 번시 박 씨들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한족으로 편입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1982년 인구 조사 때 집단 청원을 거쳐 조선족 신분을 되찾았습니다.

박가보촌에서 차로 10분 거리인 번시현 시내.

번시 박씨가 운영하는 한 식품점을 찾아가 봤습니다.

가게 간판에 주인 이름이 눈에 띕니다.

박희근, 번시 박씨 13대손입니다.

중국 한족 중에는 박 씨가 없기 때문에 간판을 보고 찾아오는 손님들이 많습니다.

[박희근/번시 박씨 13대손 : "단골 손님은 전부 조선족이죠. 와서 간판을 보고 주인이 박 씨라는 걸 알고 우리는 한 가족이라고 말하는 손님들이 꽤 많아요."]

박희근 씨는 가게에 족보를 보관하고 있습니다.

박가보촌을 떠난지 20여 년이 흘렀지만, 가문에 대한 자부심은 어느 누구 못지 않습니다.

[박희근/번시 박씨 13대손 : "예전 족보는 노란색 종이로 돼 있었는데 썩을까봐 새로 족보를 제작하게 됐어요. 집집마다 4~5천 위안(한화 70만 원)씩 기부해 족보를 만들었어요."]

번시현 시내에선 박 씨 성을 내건 간판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습니다.

이 오리고기 판매점 주인도 번시 박씨 13대손입니다.

27살 젊은 나이에도 족보와 항렬이 자신의 뿌리라고 생각합니다.

[박희야/번시 박씨 13대손 : "할아버지 성함이 박문현인데 11대손입니다. 할머니는 손 씨고요. 아버지 성함은 박문예인데 12대손이고요. 어머니는 동 씨입니다."]

박 씨도 통혼을 금지하는 가문 풍습에 따라 한족 아내와 결혼했습니다.

앞으로 2세가 생기면 반드시 한국어를 가르칠 계획입니다.

[박희야/번시 박씨 13대손 : "조선족이니까 반드시 한국어를 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리 부모님도 저도 한국어는 할 줄 몰랐거든요."]

번시 박씨 후손들은 요즘 흔한 SNS 채팅방을 통해서도 교류를 확대하고 있습니다.

내년엔 중국 이민 400주년을 맞아 번시현에 모여 대규모 기념 행사도 가질 계획입니다.

번시 박 씨 가문의 뿌리를 찾는 노력이 족보 구경하기 힘든 요즘 세상에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랴오닝성 번시현에서 김명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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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파원 스페셜] 中 조선족 시조 ‘번시 朴씨’…400년 혈통 족보 공개
    • 입력 2018-12-01 22:24:20
    • 수정2018-12-01 22:38:01
    특파원 보고 세계는 지금
[앵커]

중국에는 무려 400년 동안 족보를 대물림하며 우리 민족의 뿌리를 지켜온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비록, 우리말 우리글은 잊어버렸지만 항렬을 중시하며 어른을 깍듯이 모시고 김치를 담가먹는 등 민족의 풍습을 그대로 간직한채 400년 혈통을 이어온 조선족의 시조, '번시 박 씨' 가문 얘기인데요.

김명주 특파원이 '번시 박 씨' 집성촌을 다녀왔습니다.

[리포트]

웅장한 산세가 병풍처럼 펼쳐진 시골 마을.

물가엔 오리떼가 떠다니고 한쪽에선 아낙네들이 빨래를 하는 평온하고 넉넉한 마을입니다.

마을 입구 버스정류장엔 '피아오푸'라고 쓰여 있습니다.

박 씨 마을이라는 뜻입니다.

이 곳이 바로 한민족의 후예들이 400년 혈통을 지켜온 번시 박씨 집성촌 '박가보촌'입니다.

아직도 이 마을엔 한 집 건너 한 집은 번시 박씨들이 살고 있습니다.

중국의 여느 농촌과 다름 없이 자식들은 다 떠나고 대부분 60대 이상 노인들이 마을을 지키고 있습니다.

이 마을에는 2백여 명의 번시 박씨가 살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11대손인 박문만 선생은 가장 항렬이 높은 어르신입니다.

[박문만/번시 박씨 11대손 : "여기에는 감자랑 채소를 심고 저쪽에는 옥수수를 심고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서 일을 많이 못해요."]

세 자녀는 각자 도시에서 가정을 꾸려 살다보니 한족 아내와 둘 만 남았습니다.

외로울 때마다 가족들 사진을 꺼내봅니다.

[박문만/번시 박씨 11대손 : "(가족들 모두 조선족인가요?) 그럼요. 제가 조선족이니까 우리 가족 전부 조선족이죠."]

박문만 선생은 자신의 신분증까지 자랑스럽게 보여줬습니다.

1943년 11월 29일생 조선족입니다.

400년 혈통이 기록된 번시 박씨 족보는 이 집의 가보와도 같습니다.

가문 대표들이 집집마다 전해 내려오던 족보들을 모아 5년 간의 혈통 조사를 거쳐 지난 2015년 새 족보를 펴냈습니다.

이 마을에는 박문만 선생 조카도 만주족 아내와 살고 있습니다.

[박명구/번시 박씨 12대손 : "제가 71살이고 삼촌은 74살이라 3살 차이인데 큰 삼촌이라고 불러요. 삼촌을 정말 존경합니다. 만약에 삼촌이 10대라고 해도 작은 삼촌이라고 불러야 해요."]

번시 박씨는 지난 400년 동안 통혼을 금지하고, 자식을 낳으면 돌림자로 이름을 지어왔습니다.

30개나 되는 돌림자를 줄줄 외울 정도로 항렬을 중요시합니다.

[박문만/번시 박씨 11대손 : "응천대중국, 자덕김부옥, 문명희승세, 준위진태창, 시서기홍업, 공유강무량 이렇게 돌림자가 있습니다."]

번시 박씨 선조는 1619년 강홍립 장군을 따라 압록강을 건넌 것으로 청나라 사기에 기록돼 있습니다.

연합 작전을 펼치던 명나라가 누르하치에게 패하자 전쟁 포로로 남게 됐다는 게 정설입니다.

[박명옥/번시 박씨 12대손 : "청나라 사기에는 포로라고 기록돼 있는데 전쟁터에서 투항한 게 아니냐는 의견도 있어요. 저는 투항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대다수 번시 박 씨들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한족으로 편입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1982년 인구 조사 때 집단 청원을 거쳐 조선족 신분을 되찾았습니다.

박가보촌에서 차로 10분 거리인 번시현 시내.

번시 박씨가 운영하는 한 식품점을 찾아가 봤습니다.

가게 간판에 주인 이름이 눈에 띕니다.

박희근, 번시 박씨 13대손입니다.

중국 한족 중에는 박 씨가 없기 때문에 간판을 보고 찾아오는 손님들이 많습니다.

[박희근/번시 박씨 13대손 : "단골 손님은 전부 조선족이죠. 와서 간판을 보고 주인이 박 씨라는 걸 알고 우리는 한 가족이라고 말하는 손님들이 꽤 많아요."]

박희근 씨는 가게에 족보를 보관하고 있습니다.

박가보촌을 떠난지 20여 년이 흘렀지만, 가문에 대한 자부심은 어느 누구 못지 않습니다.

[박희근/번시 박씨 13대손 : "예전 족보는 노란색 종이로 돼 있었는데 썩을까봐 새로 족보를 제작하게 됐어요. 집집마다 4~5천 위안(한화 70만 원)씩 기부해 족보를 만들었어요."]

번시현 시내에선 박 씨 성을 내건 간판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습니다.

이 오리고기 판매점 주인도 번시 박씨 13대손입니다.

27살 젊은 나이에도 족보와 항렬이 자신의 뿌리라고 생각합니다.

[박희야/번시 박씨 13대손 : "할아버지 성함이 박문현인데 11대손입니다. 할머니는 손 씨고요. 아버지 성함은 박문예인데 12대손이고요. 어머니는 동 씨입니다."]

박 씨도 통혼을 금지하는 가문 풍습에 따라 한족 아내와 결혼했습니다.

앞으로 2세가 생기면 반드시 한국어를 가르칠 계획입니다.

[박희야/번시 박씨 13대손 : "조선족이니까 반드시 한국어를 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리 부모님도 저도 한국어는 할 줄 몰랐거든요."]

번시 박씨 후손들은 요즘 흔한 SNS 채팅방을 통해서도 교류를 확대하고 있습니다.

내년엔 중국 이민 400주년을 맞아 번시현에 모여 대규모 기념 행사도 가질 계획입니다.

번시 박 씨 가문의 뿌리를 찾는 노력이 족보 구경하기 힘든 요즘 세상에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랴오닝성 번시현에서 김명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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