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서 '제2 3.1운동' 첫 발굴
입력 2019.01.03 (23:36)
수정 2019.01.03 (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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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멘트]
1919년 전국 방방곡곡
울려 퍼졌던 3.1 운동의 함성.
몇 년 후 1927년에도
하동 읍내 장터에서
다시 항일 시위가 벌어졌다는
사실이 처음 발굴됐습니다.
영남과 호남 주민이
함께 나서 더 의미가 깊습니다.
보도에 최세진 기자입니다.
[리포트]
하동 읍내가 내려다보이는
하동 독립공원.
1927년 3월 3일 하동 장날.
이곳에서 대규모 항일 시위가
열렸던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습니다.
항일 시위를 주도한
인물 가운데 한 명인 강대용 선생.
악양면 여국엽, 송우복 선생 등과
함께 항일 시위를 도모한 혐의로
대구 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미결구류 통산 240일의 형을 받았습니다.
[녹취]
강동제/강대용 선생 손자
잡혀가서 진주형무소에 가서 사시고 대구형무소에 가서 사시면서
고문도 받고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 항일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50여 명이 연행됐고, 30여 명이
재판에 넘겨져, 강대용 선생을 비롯한
13명이 옥고를 치렀습니다.
특히 김태수 선생 등 3명은
전남 광양군이 주소지로 나와
영호남 모두 시위에 가담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최세진
1927년 하동 장터에서 벌어진
항일 시위의 규모는 영남과 호남 주민
천여 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됩니다.
이 같은 규모는
1919년 3.1 운동 이후
영호남 지역에서 가장 큰 규모일 것으로
학계는 보고 있습니다.
정재상/경남독립운동연구소장[인터뷰]
2천 명 정도의 규모로 만세 운동이
있었을 때, 10~15명 정도로 체포되어서
옥고를 치른 경우가 많습니다....
그와 비슷하지 않나, 적어도 천 명 이상...
하동군과 경남독립운동연구소는
제2 3.1 운동 시위 주동자 13명 등
46명의 독립유공자를 발굴해
정부에 서훈을 신청했습니다.
KBS 뉴스 최세진입니다.
1919년 전국 방방곡곡
울려 퍼졌던 3.1 운동의 함성.
몇 년 후 1927년에도
하동 읍내 장터에서
다시 항일 시위가 벌어졌다는
사실이 처음 발굴됐습니다.
영남과 호남 주민이
함께 나서 더 의미가 깊습니다.
보도에 최세진 기자입니다.
[리포트]
하동 읍내가 내려다보이는
하동 독립공원.
1927년 3월 3일 하동 장날.
이곳에서 대규모 항일 시위가
열렸던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습니다.
항일 시위를 주도한
인물 가운데 한 명인 강대용 선생.
악양면 여국엽, 송우복 선생 등과
함께 항일 시위를 도모한 혐의로
대구 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미결구류 통산 240일의 형을 받았습니다.
[녹취]
강동제/강대용 선생 손자
잡혀가서 진주형무소에 가서 사시고 대구형무소에 가서 사시면서
고문도 받고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 항일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50여 명이 연행됐고, 30여 명이
재판에 넘겨져, 강대용 선생을 비롯한
13명이 옥고를 치렀습니다.
특히 김태수 선생 등 3명은
전남 광양군이 주소지로 나와
영호남 모두 시위에 가담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1927년 하동 장터에서 벌어진
항일 시위의 규모는 영남과 호남 주민
천여 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됩니다.
이 같은 규모는
1919년 3.1 운동 이후
영호남 지역에서 가장 큰 규모일 것으로
학계는 보고 있습니다.
정재상/경남독립운동연구소장[인터뷰]
2천 명 정도의 규모로 만세 운동이
있었을 때, 10~15명 정도로 체포되어서
옥고를 치른 경우가 많습니다....
그와 비슷하지 않나, 적어도 천 명 이상...
하동군과 경남독립운동연구소는
제2 3.1 운동 시위 주동자 13명 등
46명의 독립유공자를 발굴해
정부에 서훈을 신청했습니다.
KBS 뉴스 최세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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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동서 '제2 3.1운동' 첫 발굴
-
- 입력 2019-01-03 23:36:32
- 수정2019-01-03 23:36:49
[앵커멘트]
1919년 전국 방방곡곡
울려 퍼졌던 3.1 운동의 함성.
몇 년 후 1927년에도
하동 읍내 장터에서
다시 항일 시위가 벌어졌다는
사실이 처음 발굴됐습니다.
영남과 호남 주민이
함께 나서 더 의미가 깊습니다.
보도에 최세진 기자입니다.
[리포트]
하동 읍내가 내려다보이는
하동 독립공원.
1927년 3월 3일 하동 장날.
이곳에서 대규모 항일 시위가
열렸던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습니다.
항일 시위를 주도한
인물 가운데 한 명인 강대용 선생.
악양면 여국엽, 송우복 선생 등과
함께 항일 시위를 도모한 혐의로
대구 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미결구류 통산 240일의 형을 받았습니다.
[녹취] 강동제/강대용 선생 손자 잡혀가서 진주형무소에 가서 사시고 대구형무소에 가서 사시면서 고문도 받고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 항일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50여 명이 연행됐고, 30여 명이 재판에 넘겨져, 강대용 선생을 비롯한 13명이 옥고를 치렀습니다. 특히 김태수 선생 등 3명은 전남 광양군이 주소지로 나와 영호남 모두 시위에 가담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최세진
1927년 하동 장터에서 벌어진
항일 시위의 규모는 영남과 호남 주민
천여 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됩니다.
이 같은 규모는
1919년 3.1 운동 이후
영호남 지역에서 가장 큰 규모일 것으로
학계는 보고 있습니다.
정재상/경남독립운동연구소장[인터뷰]
2천 명 정도의 규모로 만세 운동이
있었을 때, 10~15명 정도로 체포되어서
옥고를 치른 경우가 많습니다....
그와 비슷하지 않나, 적어도 천 명 이상...
하동군과 경남독립운동연구소는
제2 3.1 운동 시위 주동자 13명 등
46명의 독립유공자를 발굴해
정부에 서훈을 신청했습니다.
KBS 뉴스 최세진입니다.
[녹취] 강동제/강대용 선생 손자 잡혀가서 진주형무소에 가서 사시고 대구형무소에 가서 사시면서 고문도 받고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 항일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50여 명이 연행됐고, 30여 명이 재판에 넘겨져, 강대용 선생을 비롯한 13명이 옥고를 치렀습니다. 특히 김태수 선생 등 3명은 전남 광양군이 주소지로 나와 영호남 모두 시위에 가담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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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세진 기자 cejine@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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