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토록 호소했는데…” 루게릭병 환자가 구속 중 숨진 이유

입력 2019.01.08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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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신 마비 증세 ‘루게릭병’ 환자, 구속 집행 정지 신청했지만 법원 기각…구속 상태로 결국 숨져
■ ‘황제 보석’ 이호진 전 태광 회장은 구속 두 달 만에 풀려나 7년 넘게 바깥 생활…‘이들의 처지를 가른건 무엇인가?' ’

지난해 SNS를 통해 크게 화제가 된 '아이스버킷 챌린지' 기억하시나요? 머리부터 얼음물을 뒤집어쓰는 동영상을 SNS에 올려 '루게릭병'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는 캠페인입니다. 온몸에 얼음물을 끼얹으면서, 근육이 마비되는 루게릭병의 고통을 잠시나마 공유하자는 데서 비롯됐고,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유명인들이 참여해 시선을 끌었습니다.

루게릭병의 정식 병명은 근위축성 측삭 경화증입니다. 미국 프로야구의 전설적인 선수 루 게릭이 이 병을 앓다가 사망해 루게릭병으로 불립니다.
루게릭병은 운동신경 세포들이 서서히 파괴되면서 팔과 다리에 힘이 없어지고, 어느새 근육이 마비돼 전신을 움직일 수 없게 되는 질환입니다. 근육이 소멸하니 음식을 씹지도, 삼키지도, 숨을 쉴 수도 없게 되면서 결국 사망에 이르는 안타까운 질환이 바로 루게릭병입니다.


그런데 한 루게릭병 환자가 얼마 전 구속 상태로 있다 숨졌습니다. 75살 이 모 씨는 사기 혐의로 재판에 넘겨져 1심에서 징역 9개월을 선고받았습니다. 이 씨는 당시 수년 째 루게릭병을 앓고 있었는데, 지난해 10월 서울 동부구치소에 수감되면서 병세가 더 악화됐습니다. 근육 마비 증상이 급속도로 빨라져 유족들이 면회를 가도 제대로 대화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이 씨의 변호인은 이 씨가 구치소 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병이 위중하니 석방해 달라며 구속 집행 정지 신청서를 냈습니다. '루게릭병 증상 악화로 거동이 불편하고, 보호자 없이는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으니 구속 집행을 멈춰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하지만 법원은 이 씨 측 신청에 답하지 않았고, 이 씨 측은 다음 달인 11월 또다시 구속 집행 정지 신청서를 냈지만, 법원은 이 또한 기각했습니다. 이 씨에 대한 보석 신청도 역시 하루 만에 기각됐습니다.

이 씨에 대한 구속 집행 정지 신청서 일부이 씨에 대한 구속 집행 정지 신청서 일부


구속 집행 정지 신청이 두 차례나 기각되자 이번엔 구치소가 나섰습니다. '구금 시설에서 이 씨를 돌보기 힘들다'며 구속 집행 정지를 건의한 겁니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고 호흡 곤란 증상을 보이고 있다며 구치소 내 의무팀의 소견서와 함께 이 씨 구속을 풀어달라고 건의했습니다. 하지만 법원은 구치소의 두 차례 건의에도 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지난해 12월, 이 씨는 수감 석 달 만에 병원으로 옮겨졌고, 결국 숨졌습니다.

구치소가 낸 이 씨 구속 집행 정지 건의서구치소가 낸 이 씨 구속 집행 정지 건의서

모두 합해 네 차례나 되는 이 씨와 구치소의 구속 집행 정지 처분 호소에도, 법원은 왜 묵묵부답이었을까요? 서울 북부지방법원 측에 이유를 물었습니다. 북부지법 관계자는 진단서에 쓰인 한 구절을 이유로 들었습니다. '악화 시 입원 치료 필요'. 병세가 악화되면 입원 치료가 필요하다는 뜻이기 때문에 지금 당장은 입원이 필요하지 않다고 해석했다는 겁니다. "(진단서에서) 당장 입원 치료가 필요하다고 하면 구속 집행 정지를 해주겠지만, 악화 시 입원치료가 필요하다고 한 것으로 보아 병세가 심각하지 않은 것으로 봤다"는게 법원 측의 설명입니다.

또 이 씨가 루게릭병을 앓았다고 주장한 지난 2017년에도 사기 범행을 저지른 점이 고려됐고, 병세가 계속 악화될 수밖에 없는 루게릭병 특성상 한번 구속 집행이 정지되면 다시 구속할 수 없는 점도 법원 결정에 고려된 부분이라고 이 관계자는 덧붙였습니다.

법원은 ‘악화 시 입원 치료 필요’라는 병원 소견을 참작해 구속 정지 신청을 기각했다고 밝혔다.법원은 ‘악화 시 입원 치료 필요’라는 병원 소견을 참작해 구속 정지 신청을 기각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 씨 측 변호인과 유족들은 법원의 이같은 대응이 수감자에 대한 인권 침해라고 주장합니다. 이 씨가 강력 범죄를 저지를 것도 아니고, 사기 피해자들과도 합의했는데 중증 질환을 앓고 있는 이 씨를 법원이 외면해 결국 이 씨가 사망에 이르렀다는 겁니다.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해야 할 재판부가 '악화 시 입원 치료가 필요하다'는 한 구절만으로 구속 집행 신청을 기각한 것은 제도를 유명무실하게 만드는 행위라는 게 변호인 측 주장입니다.

양 측의 주장이 첨예하게 엇갈리는 가운데, 지난해 '황제 보석' 논란을 일으킨 이호진 전 태광그룹 회장을 다시 한 번 생각합니다. 이 전 회장은 간암 투병을 이유로 구속된 지 63일 만에 구속 집행 정지를 신청해 밖으로 나왔고, 이듬해 집과 병원을 오가는 조건으로 보석 허가까지 받아냈습니다. 이 전 회장은 7년 7개월째 불구속 상태를 유지했고, 시내를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떡볶이에 술을 마시고 담배도 피우는 모습이 KBS 보도로 알려지게 됐습니다. 이 보도로 '황제 보석' 논란이 거세게 일었고 지난달 14일 법원은 이 전 회장의 보석을 취소하고 다시 수감했습니다.

이호진 전 태광그룹 회장이호진 전 태광그룹 회장

병을 앓고 있는 상태로 구치소에 수감된 2명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네 차례의 구속 집행 정지 신청을 모두 거부당한 뒤 보살핌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쓸쓸히 숨졌습니다. 한 사람은 구속 두 달 만에 풀려나 자유로운 바깥 공기를 마시며 7년 넘게 생활했습니다. 이 씨의 유족들은 법원에 묻고 싶습니다.
이들은 무슨 차이로 이렇게 다른 운명을 맞은 걸까? 이들의 처지를 가른 건 과연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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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토록 호소했는데…” 루게릭병 환자가 구속 중 숨진 이유
    • 입력 2019-01-08 20:03:45
    취재K
■ 전신 마비 증세 ‘루게릭병’ 환자, 구속 집행 정지 신청했지만 법원 기각…구속 상태로 결국 숨져
■ ‘황제 보석’ 이호진 전 태광 회장은 구속 두 달 만에 풀려나 7년 넘게 바깥 생활…‘이들의 처지를 가른건 무엇인가?' ’

지난해 SNS를 통해 크게 화제가 된 '아이스버킷 챌린지' 기억하시나요? 머리부터 얼음물을 뒤집어쓰는 동영상을 SNS에 올려 '루게릭병'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는 캠페인입니다. 온몸에 얼음물을 끼얹으면서, 근육이 마비되는 루게릭병의 고통을 잠시나마 공유하자는 데서 비롯됐고,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유명인들이 참여해 시선을 끌었습니다.

루게릭병의 정식 병명은 근위축성 측삭 경화증입니다. 미국 프로야구의 전설적인 선수 루 게릭이 이 병을 앓다가 사망해 루게릭병으로 불립니다.
루게릭병은 운동신경 세포들이 서서히 파괴되면서 팔과 다리에 힘이 없어지고, 어느새 근육이 마비돼 전신을 움직일 수 없게 되는 질환입니다. 근육이 소멸하니 음식을 씹지도, 삼키지도, 숨을 쉴 수도 없게 되면서 결국 사망에 이르는 안타까운 질환이 바로 루게릭병입니다.


그런데 한 루게릭병 환자가 얼마 전 구속 상태로 있다 숨졌습니다. 75살 이 모 씨는 사기 혐의로 재판에 넘겨져 1심에서 징역 9개월을 선고받았습니다. 이 씨는 당시 수년 째 루게릭병을 앓고 있었는데, 지난해 10월 서울 동부구치소에 수감되면서 병세가 더 악화됐습니다. 근육 마비 증상이 급속도로 빨라져 유족들이 면회를 가도 제대로 대화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이 씨의 변호인은 이 씨가 구치소 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병이 위중하니 석방해 달라며 구속 집행 정지 신청서를 냈습니다. '루게릭병 증상 악화로 거동이 불편하고, 보호자 없이는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으니 구속 집행을 멈춰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하지만 법원은 이 씨 측 신청에 답하지 않았고, 이 씨 측은 다음 달인 11월 또다시 구속 집행 정지 신청서를 냈지만, 법원은 이 또한 기각했습니다. 이 씨에 대한 보석 신청도 역시 하루 만에 기각됐습니다.

이 씨에 대한 구속 집행 정지 신청서 일부

구속 집행 정지 신청이 두 차례나 기각되자 이번엔 구치소가 나섰습니다. '구금 시설에서 이 씨를 돌보기 힘들다'며 구속 집행 정지를 건의한 겁니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고 호흡 곤란 증상을 보이고 있다며 구치소 내 의무팀의 소견서와 함께 이 씨 구속을 풀어달라고 건의했습니다. 하지만 법원은 구치소의 두 차례 건의에도 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지난해 12월, 이 씨는 수감 석 달 만에 병원으로 옮겨졌고, 결국 숨졌습니다.

구치소가 낸 이 씨 구속 집행 정지 건의서
모두 합해 네 차례나 되는 이 씨와 구치소의 구속 집행 정지 처분 호소에도, 법원은 왜 묵묵부답이었을까요? 서울 북부지방법원 측에 이유를 물었습니다. 북부지법 관계자는 진단서에 쓰인 한 구절을 이유로 들었습니다. '악화 시 입원 치료 필요'. 병세가 악화되면 입원 치료가 필요하다는 뜻이기 때문에 지금 당장은 입원이 필요하지 않다고 해석했다는 겁니다. "(진단서에서) 당장 입원 치료가 필요하다고 하면 구속 집행 정지를 해주겠지만, 악화 시 입원치료가 필요하다고 한 것으로 보아 병세가 심각하지 않은 것으로 봤다"는게 법원 측의 설명입니다.

또 이 씨가 루게릭병을 앓았다고 주장한 지난 2017년에도 사기 범행을 저지른 점이 고려됐고, 병세가 계속 악화될 수밖에 없는 루게릭병 특성상 한번 구속 집행이 정지되면 다시 구속할 수 없는 점도 법원 결정에 고려된 부분이라고 이 관계자는 덧붙였습니다.

법원은 ‘악화 시 입원 치료 필요’라는 병원 소견을 참작해 구속 정지 신청을 기각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 씨 측 변호인과 유족들은 법원의 이같은 대응이 수감자에 대한 인권 침해라고 주장합니다. 이 씨가 강력 범죄를 저지를 것도 아니고, 사기 피해자들과도 합의했는데 중증 질환을 앓고 있는 이 씨를 법원이 외면해 결국 이 씨가 사망에 이르렀다는 겁니다.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해야 할 재판부가 '악화 시 입원 치료가 필요하다'는 한 구절만으로 구속 집행 신청을 기각한 것은 제도를 유명무실하게 만드는 행위라는 게 변호인 측 주장입니다.

양 측의 주장이 첨예하게 엇갈리는 가운데, 지난해 '황제 보석' 논란을 일으킨 이호진 전 태광그룹 회장을 다시 한 번 생각합니다. 이 전 회장은 간암 투병을 이유로 구속된 지 63일 만에 구속 집행 정지를 신청해 밖으로 나왔고, 이듬해 집과 병원을 오가는 조건으로 보석 허가까지 받아냈습니다. 이 전 회장은 7년 7개월째 불구속 상태를 유지했고, 시내를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떡볶이에 술을 마시고 담배도 피우는 모습이 KBS 보도로 알려지게 됐습니다. 이 보도로 '황제 보석' 논란이 거세게 일었고 지난달 14일 법원은 이 전 회장의 보석을 취소하고 다시 수감했습니다.

이호진 전 태광그룹 회장
병을 앓고 있는 상태로 구치소에 수감된 2명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네 차례의 구속 집행 정지 신청을 모두 거부당한 뒤 보살핌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쓸쓸히 숨졌습니다. 한 사람은 구속 두 달 만에 풀려나 자유로운 바깥 공기를 마시며 7년 넘게 생활했습니다. 이 씨의 유족들은 법원에 묻고 싶습니다.
이들은 무슨 차이로 이렇게 다른 운명을 맞은 걸까? 이들의 처지를 가른 건 과연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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