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내라, 못 보낸다’…곳곳에 초등학교 배정 갈등

입력 2019.01.19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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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달 동안 '초등학교 배정' 행정예고만 세 번…사연은?
서울 강서구 염창동의 한 아파트 단지에 사는 예비 초등학생 학부모들은 최근 두 달 동안 자녀가 입학할 초등학교를 알리는 교육지원청 '행정 예고'를 세 번 받았습니다. A 초등학교가 아니었다가, A 초등학교였다가, 다시 A 초등학교가 아니게 됐죠. 이렇게 된 까닭은 A 학교의 존폐를 두고 치열한 '민원 다툼'이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학생 수 줄어 '폐교 고려' 초등학교로 갈등…"못 보낸다" "보내라"
이 아파트 단지 어린이들은 원래 A 초등학교에 진학해 왔습니다. 그런데 초등학교가 4개나 있는 이 지역의 취학 연령 어린이 숫자가 계속 줄어들면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어느 한 곳은 문을 닫아야 하는데, A 초등학교가 가장 유력했던 겁니다. 이 학교 전교생은 170명, 특히 고학년으로 갈수록 전학으로 아이들 숫자가 줄면서 6학년은 여학생 2명 남학생 10명, 단 12명에 불과합니다.

폐교 얘기가 구체적으로 나오고, 지난해 7월 관련 공청회까지 열리자 이 단지 예비 학부모들은 '폐교 예정인 초등학교에 내 아이를 보내기 싫다'며 근처 다른 학교로 배정해달라고 주장하게 됐습니다. 그렇지만 재학생 학부모들은 신입생이 줄어 학교가 없어지는 상황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서로 다른 입장의 학부모들이 대립하게 된 거죠.

행정예고 번복 뒤엔 '민원 대결'…"목소리 커야 의견 받아준다"
지난해 11월 초, 교육청은 해당 아파트단지의 통학구역을 '공동학군'으로 지정하는 행정예고를 합니다. A초교와 주변 2개 초교를 묶어서 어느 학교든 예비 초등생을 둔 가정에서 선택해서 갈 수 있도록 한 겁니다. 이렇게 되면 A초교 신입생은 줄어들겠지만, A초교가 싫은 예비 초등생은 다른 곳으로 갈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11월 30일 교육지원청 홈페이지에는 첫 번째 행정예고를 부정하는 두 번째 행정예고가 떴습니다. 공동학군 지정을 유보해, 그냥 A초교에만 갈 수 있도록 한 거죠. 왜 이렇게 됐을까요?

앞서 첫번째 행정예고 뒤에 주민 의견을 수렴했더니 찬성 21건, 반대 110건으로 반대가 훨씬 많았다고 교육청은 공지했습니다. "재학생 학부모들이 똘똘 뭉쳐 가족, 지인을 동원했다"고 예비 초등생 학부모들은 분석했습니다. 그래서 이들도 나섰습니다. 민원을 발생시키고, 시의원과 국회의원을 찾아가고, 교육청에서 기습 집회도 열었죠. 그래서 결과는요? 1월 7일 교육청은 원래대로, 그러니까 A초교 뿐 아니라 주변 다른 학교에도 갈 수 있도록 세번째 행정예고를 냈습니다.

초등학교도 '배정 갈등'…학부모 뿐 아니라 부동산 관계자도 민원
서울의 한 동네에서 벌어진 사소한 문제처럼 보이지만, 사실 초등학교 배정 문제로 잡음이 빚어지는 건 이 곳만이 아닙니다. 재건축으로 신규 아파트단지가 들어서거나, 인구가 줄어들어 학교를 통폐합 하는 곳은 어김없이 '어느 학교냐'를 두고 갈등이 빚어집니다. 최근 서울 강남구 개포동에서도 똑같은 문제가 생겨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습니다.

문제는 교육지원청들이 이런 상황에 효율적으로 대처할만한 역량을 갖추지 못 했다는 겁니다. 행정예고를 세 번 하는 동안, 교육지원청은 쏟아지는 민원에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었지만 별다른 조치를 하지 못했습니다. 온라인투표, 엠보팅을 실시하려다 '누가 몇 표를 가져가는지 어떻게 아느냐'는 항의에 포기했습니다. 공청회가 열렸지만, 학부모들은 성사시킨 것도 이해관계자를 부른 것도 자신들이라고 주장합니다. 교육청에 물어보면 "기다려야 한다,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라는 답만 나와서 직접 나서야 했다는 겁니다. "교육청이 주도적으로 한 게 없고 그냥 목소리 큰 사람 그리고 발등에 불 떨어진 사람들이 이렇게 들고 뛰면 진행이 되는 구나 이렇게 인식이 자리 잡히고 있는 것 같아요."

물론 교육지원청도 괴롭습니다. "학부모들 민원전화 뿐 아니라 부동산에서도 민원이 들어옵니다. 특정 학교 배정되면 전세가가 떨어지고 거래도 잘 안 된다면서요." 서울 또다른 교육지원청의 담당자 얘깁니다. 사실 초등학교 배정에 원칙은 없습니다. 대상자와 주민의 의견을 반영하되 무조건 다수결이어서는 안 되죠. 원하는대로 다 들어줄 수 없는 만큼 최선을 다해 결정을 내려도 '차악'이 되기 마련입니다. 이렇다보니 학부모들은 시끄럽게 민원하지 않으면 불안합니다. '내가 가만히 있는 동안 다른 쪽이 더 강하게 항의하고, 그래서 교육지원청이 휘둘릴까봐 매일매일 더 우악스러워졌다'고 학부모들은 씁쓸하게 털어놨습니다. "행정예고가 나고 나서 그게 뒤집어지고 또 다시 행정예고가 나기까지의 과정이 정말 너무 너무 저희 입장에 되게 괴롭고 힘든 시간이였던 거예요 모든 엄마들 저희 학부모들이 다 그랬을 거예요 그걸 하기 위해서 저희가 정말 다 발로 뛰어서 뭔가를 할 수밖에 없는 시스템인 거예요."

전국 곳곳에서 앞으로도 반복될 문제, 더 나은 방법 없나?
지금 이대로라면, 이런 문제가 벌어질 때마다 이런 식의 갈등이 반복될 수 밖에 없습니다. 교육지원청은 한동안 업무가 마비되고, 학부모들은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점점 더 소리를 높이는 상황 말입니다. 더 나은 의견수렴의 방법은 없는 것인지, 학부모들이 이해할 수 있는 결정 과정을 마련할 수는 없는지 고민이 더 필요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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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내라, 못 보낸다’…곳곳에 초등학교 배정 갈등
    • 입력 2019-01-19 07:00:41
    취재K
두 달 동안 '초등학교 배정' 행정예고만 세 번…사연은?
서울 강서구 염창동의 한 아파트 단지에 사는 예비 초등학생 학부모들은 최근 두 달 동안 자녀가 입학할 초등학교를 알리는 교육지원청 '행정 예고'를 세 번 받았습니다. A 초등학교가 아니었다가, A 초등학교였다가, 다시 A 초등학교가 아니게 됐죠. 이렇게 된 까닭은 A 학교의 존폐를 두고 치열한 '민원 다툼'이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학생 수 줄어 '폐교 고려' 초등학교로 갈등…"못 보낸다" "보내라"
이 아파트 단지 어린이들은 원래 A 초등학교에 진학해 왔습니다. 그런데 초등학교가 4개나 있는 이 지역의 취학 연령 어린이 숫자가 계속 줄어들면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어느 한 곳은 문을 닫아야 하는데, A 초등학교가 가장 유력했던 겁니다. 이 학교 전교생은 170명, 특히 고학년으로 갈수록 전학으로 아이들 숫자가 줄면서 6학년은 여학생 2명 남학생 10명, 단 12명에 불과합니다.

폐교 얘기가 구체적으로 나오고, 지난해 7월 관련 공청회까지 열리자 이 단지 예비 학부모들은 '폐교 예정인 초등학교에 내 아이를 보내기 싫다'며 근처 다른 학교로 배정해달라고 주장하게 됐습니다. 그렇지만 재학생 학부모들은 신입생이 줄어 학교가 없어지는 상황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서로 다른 입장의 학부모들이 대립하게 된 거죠.

행정예고 번복 뒤엔 '민원 대결'…"목소리 커야 의견 받아준다"
지난해 11월 초, 교육청은 해당 아파트단지의 통학구역을 '공동학군'으로 지정하는 행정예고를 합니다. A초교와 주변 2개 초교를 묶어서 어느 학교든 예비 초등생을 둔 가정에서 선택해서 갈 수 있도록 한 겁니다. 이렇게 되면 A초교 신입생은 줄어들겠지만, A초교가 싫은 예비 초등생은 다른 곳으로 갈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11월 30일 교육지원청 홈페이지에는 첫 번째 행정예고를 부정하는 두 번째 행정예고가 떴습니다. 공동학군 지정을 유보해, 그냥 A초교에만 갈 수 있도록 한 거죠. 왜 이렇게 됐을까요?

앞서 첫번째 행정예고 뒤에 주민 의견을 수렴했더니 찬성 21건, 반대 110건으로 반대가 훨씬 많았다고 교육청은 공지했습니다. "재학생 학부모들이 똘똘 뭉쳐 가족, 지인을 동원했다"고 예비 초등생 학부모들은 분석했습니다. 그래서 이들도 나섰습니다. 민원을 발생시키고, 시의원과 국회의원을 찾아가고, 교육청에서 기습 집회도 열었죠. 그래서 결과는요? 1월 7일 교육청은 원래대로, 그러니까 A초교 뿐 아니라 주변 다른 학교에도 갈 수 있도록 세번째 행정예고를 냈습니다.

초등학교도 '배정 갈등'…학부모 뿐 아니라 부동산 관계자도 민원
서울의 한 동네에서 벌어진 사소한 문제처럼 보이지만, 사실 초등학교 배정 문제로 잡음이 빚어지는 건 이 곳만이 아닙니다. 재건축으로 신규 아파트단지가 들어서거나, 인구가 줄어들어 학교를 통폐합 하는 곳은 어김없이 '어느 학교냐'를 두고 갈등이 빚어집니다. 최근 서울 강남구 개포동에서도 똑같은 문제가 생겨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습니다.

문제는 교육지원청들이 이런 상황에 효율적으로 대처할만한 역량을 갖추지 못 했다는 겁니다. 행정예고를 세 번 하는 동안, 교육지원청은 쏟아지는 민원에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었지만 별다른 조치를 하지 못했습니다. 온라인투표, 엠보팅을 실시하려다 '누가 몇 표를 가져가는지 어떻게 아느냐'는 항의에 포기했습니다. 공청회가 열렸지만, 학부모들은 성사시킨 것도 이해관계자를 부른 것도 자신들이라고 주장합니다. 교육청에 물어보면 "기다려야 한다,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라는 답만 나와서 직접 나서야 했다는 겁니다. "교육청이 주도적으로 한 게 없고 그냥 목소리 큰 사람 그리고 발등에 불 떨어진 사람들이 이렇게 들고 뛰면 진행이 되는 구나 이렇게 인식이 자리 잡히고 있는 것 같아요."

물론 교육지원청도 괴롭습니다. "학부모들 민원전화 뿐 아니라 부동산에서도 민원이 들어옵니다. 특정 학교 배정되면 전세가가 떨어지고 거래도 잘 안 된다면서요." 서울 또다른 교육지원청의 담당자 얘깁니다. 사실 초등학교 배정에 원칙은 없습니다. 대상자와 주민의 의견을 반영하되 무조건 다수결이어서는 안 되죠. 원하는대로 다 들어줄 수 없는 만큼 최선을 다해 결정을 내려도 '차악'이 되기 마련입니다. 이렇다보니 학부모들은 시끄럽게 민원하지 않으면 불안합니다. '내가 가만히 있는 동안 다른 쪽이 더 강하게 항의하고, 그래서 교육지원청이 휘둘릴까봐 매일매일 더 우악스러워졌다'고 학부모들은 씁쓸하게 털어놨습니다. "행정예고가 나고 나서 그게 뒤집어지고 또 다시 행정예고가 나기까지의 과정이 정말 너무 너무 저희 입장에 되게 괴롭고 힘든 시간이였던 거예요 모든 엄마들 저희 학부모들이 다 그랬을 거예요 그걸 하기 위해서 저희가 정말 다 발로 뛰어서 뭔가를 할 수밖에 없는 시스템인 거예요."

전국 곳곳에서 앞으로도 반복될 문제, 더 나은 방법 없나?
지금 이대로라면, 이런 문제가 벌어질 때마다 이런 식의 갈등이 반복될 수 밖에 없습니다. 교육지원청은 한동안 업무가 마비되고, 학부모들은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점점 더 소리를 높이는 상황 말입니다. 더 나은 의견수렴의 방법은 없는 것인지, 학부모들이 이해할 수 있는 결정 과정을 마련할 수는 없는지 고민이 더 필요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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