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K] 박근혜·김기춘·양승태가 ‘수첩’을 못 이긴 이유

입력 2019.01.24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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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단' 사건마다 스모킹건으로 떠오른 '수첩'
■ "사후 조작" 대응법도 닮은 꼴

어디선가 들어본 '사후 조작'

사후 조작. 어제(23일)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주장한 말입니다.

영장실질심사에서 검찰 측이, 이규진 전 양형위 상임위원의 수첩에 양 전 대법원장의 지시사항이 적혀 있다고 하자 "수첩이 사후 조작됐을 수 있다"고 대응한 겁니다.

낯설지 않은 느낌이었습니다.

'어디서 들었더라' 싶어, 취재 파일에서 '사후 조작'을 검색해봤습니다. 1년 반 전에 적어둔 메모가 나왔습니다. 당시 들은 말이 그대로 적혀 있었습니다.


"하 기자, 수첩 봐봐. 이걸 그 당시에 쓴 글씨라고 단정할 수 있어요? 사후에 덮어 썼을 수 있다고. 증거 조작이야."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국정농단 재판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즈음. 국정농단 피고인 중 한 명의 변호인이, 안종범 전 수석의 수첩 사본을 펼쳐보이며 한 말입니다.

안 전 수석이 각종 혐의에 대해 '내가 주도한 일이 아니다'라는 근거를 만들기 위해, 박 전 대통령의 지시인 것처럼 <추가로> 수첩에 끼적였을 수 있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양승태 전 원장도 앞으로 재판을 받으면서 '사후 조작' 논리를 계속 펼칠 지도 모르겠습니다. 과거 사례로 미래를 예상해보기 위해, 안종범 전 수석 수첩의 '조작' 주장이 어떻게 됐는지 적어둡니다.

국정농단 재판에서 이 조작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사실은 쟁점조차 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빙상, 승마, 삼성, 합병' 등 수첩에 등장한 단어 자체가 증거가 되느냐를 두고, 박 전 대통령과 최순실씨, 이재용 삼성 부회장 등 각각의 재판에서 긴 싸움이 이어졌습니다.

국정농단 피고인들은 "안 전 수석이 박 전 대통령에게 전해들은 말을 받아 적은 것뿐, 수석 본인이 실제 청탁이나 뇌물수수 행위를 보고 들은 증거가 아니다"라고 주장했습니다.

또 수첩 내용이 단어를 나열한 수준이라서, 진짜 맥락을 알 수는 없다는 주장도 나왔습니다.

재판부 판단은 어땠을까요. 박 전 대통령과 최순실씨 등 대부분 재판에서 이 수첩을 증거로 인정하고 유죄를 선고했습니다. 이재용 부회장의 항소심에서만 증거로 채택이 되지 않았습니다.


'大'는 누구고 '長'은 누구인가

이규진 전 상임위원의 수첩에는 '大(대)' 표시가 있다고 합니다. 검찰은 이 전 위원이 대법원장 지시를 적어둔 표시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양 전 대법원장은 '조작'이라고 맞섰습니다. 아래에서 알아서 일을 저지르곤, '大'를 추가로 적어 자신에게 책임을 몰았다는 주장입니다.

이 주장도 낯설지 않습니다.

 김영한 전 수석 비망록과 김기춘 전 실장 김영한 전 수석 비망록과 김기춘 전 실장

박근혜 정부 시절 작성한 김영한 전 민정수석의 비망록에는 '長(장)'과 '領(령)'이 번갈아 적혀 있었습니다. 長은 당시 김기춘 비서실장(長), 領은 당시 박 대통령(領)의 지시라는 표시였습니다.

이 비망록을 보면 '長'은 사법부 재판, 검찰 수사, 국정원, 언론과 문화예술계까지 관여하고 탄압할 것을 지시합니다. 이에 대해 김기춘 전 실장은 "長이라고 해서 모두 내 지시는 아니다. 작성하는 사람의 주관적 생각이 가미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지시 사항에 대한 비판이 몰려오자, '작성한 사람의 주관'이라며 책임을 미룬 겁니다. "후배 법관들의 과오"를 말하던 양 전 대법원장이 또다시 떠오르는 대목입니다.

하지만 김 전 수석 비망록을 자세히 보면, 김 전 수석이 할 일이나 생각을 적어둔 것은 '들여쓰기'를 하는 식으로 따로 표기가 돼 있습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양승태 전 대법원장

수첩을 못 이기는 이유

양 전 원장의 '수첩 사후 조작' 주장에도, 법원은 양 전 원장을 구속했습니다.

검찰 관계자는 "김영한 전 수석의 비망록에 나온 사법부 내용과 특정 판사 이름이 사법농단 수사의 시작이 됐고, 이규진 전 위원 수첩이 대법원장을 수사할 수 있는 물꼬가 됐다"고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수첩'들만이 양 전 원장을 구속시킨 건 아닙니다.

검찰은 이런 수첩을 확보하면, '증거를 찾았다'며 수사를 멈추는 게 아니라 더 벌려 나갑니다. 수첩에 적힌 사건을 새로 확인하고, 관련된 진술을 더 얻고, 또다른 증거를 찾아다닙니다. 이걸 종합해서 영장을 청구하고, 재판에 나아갑니다.

이것을 간과하고 '수첩 조작'만을 주장한다면, 모든 증거를 톺아보고 있는 재판부로선 '이 사람이 거짓말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구나'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대한민국 최고의 법률가인 양승태 전 원장이, 어제 수첩을 이기지 못한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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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K] 박근혜·김기춘·양승태가 ‘수첩’을 못 이긴 이유
    • 입력 2019-01-24 16:58:08
    취재K
■ '농단' 사건마다 스모킹건으로 떠오른 '수첩'
■ "사후 조작" 대응법도 닮은 꼴

어디선가 들어본 '사후 조작'

사후 조작. 어제(23일)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주장한 말입니다.

영장실질심사에서 검찰 측이, 이규진 전 양형위 상임위원의 수첩에 양 전 대법원장의 지시사항이 적혀 있다고 하자 "수첩이 사후 조작됐을 수 있다"고 대응한 겁니다.

낯설지 않은 느낌이었습니다.

'어디서 들었더라' 싶어, 취재 파일에서 '사후 조작'을 검색해봤습니다. 1년 반 전에 적어둔 메모가 나왔습니다. 당시 들은 말이 그대로 적혀 있었습니다.


"하 기자, 수첩 봐봐. 이걸 그 당시에 쓴 글씨라고 단정할 수 있어요? 사후에 덮어 썼을 수 있다고. 증거 조작이야."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국정농단 재판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즈음. 국정농단 피고인 중 한 명의 변호인이, 안종범 전 수석의 수첩 사본을 펼쳐보이며 한 말입니다.

안 전 수석이 각종 혐의에 대해 '내가 주도한 일이 아니다'라는 근거를 만들기 위해, 박 전 대통령의 지시인 것처럼 <추가로> 수첩에 끼적였을 수 있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양승태 전 원장도 앞으로 재판을 받으면서 '사후 조작' 논리를 계속 펼칠 지도 모르겠습니다. 과거 사례로 미래를 예상해보기 위해, 안종범 전 수석 수첩의 '조작' 주장이 어떻게 됐는지 적어둡니다.

국정농단 재판에서 이 조작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사실은 쟁점조차 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빙상, 승마, 삼성, 합병' 등 수첩에 등장한 단어 자체가 증거가 되느냐를 두고, 박 전 대통령과 최순실씨, 이재용 삼성 부회장 등 각각의 재판에서 긴 싸움이 이어졌습니다.

국정농단 피고인들은 "안 전 수석이 박 전 대통령에게 전해들은 말을 받아 적은 것뿐, 수석 본인이 실제 청탁이나 뇌물수수 행위를 보고 들은 증거가 아니다"라고 주장했습니다.

또 수첩 내용이 단어를 나열한 수준이라서, 진짜 맥락을 알 수는 없다는 주장도 나왔습니다.

재판부 판단은 어땠을까요. 박 전 대통령과 최순실씨 등 대부분 재판에서 이 수첩을 증거로 인정하고 유죄를 선고했습니다. 이재용 부회장의 항소심에서만 증거로 채택이 되지 않았습니다.


'大'는 누구고 '長'은 누구인가

이규진 전 상임위원의 수첩에는 '大(대)' 표시가 있다고 합니다. 검찰은 이 전 위원이 대법원장 지시를 적어둔 표시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양 전 대법원장은 '조작'이라고 맞섰습니다. 아래에서 알아서 일을 저지르곤, '大'를 추가로 적어 자신에게 책임을 몰았다는 주장입니다.

이 주장도 낯설지 않습니다.

 김영한 전 수석 비망록과 김기춘 전 실장
박근혜 정부 시절 작성한 김영한 전 민정수석의 비망록에는 '長(장)'과 '領(령)'이 번갈아 적혀 있었습니다. 長은 당시 김기춘 비서실장(長), 領은 당시 박 대통령(領)의 지시라는 표시였습니다.

이 비망록을 보면 '長'은 사법부 재판, 검찰 수사, 국정원, 언론과 문화예술계까지 관여하고 탄압할 것을 지시합니다. 이에 대해 김기춘 전 실장은 "長이라고 해서 모두 내 지시는 아니다. 작성하는 사람의 주관적 생각이 가미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지시 사항에 대한 비판이 몰려오자, '작성한 사람의 주관'이라며 책임을 미룬 겁니다. "후배 법관들의 과오"를 말하던 양 전 대법원장이 또다시 떠오르는 대목입니다.

하지만 김 전 수석 비망록을 자세히 보면, 김 전 수석이 할 일이나 생각을 적어둔 것은 '들여쓰기'를 하는 식으로 따로 표기가 돼 있습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수첩을 못 이기는 이유

양 전 원장의 '수첩 사후 조작' 주장에도, 법원은 양 전 원장을 구속했습니다.

검찰 관계자는 "김영한 전 수석의 비망록에 나온 사법부 내용과 특정 판사 이름이 사법농단 수사의 시작이 됐고, 이규진 전 위원 수첩이 대법원장을 수사할 수 있는 물꼬가 됐다"고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수첩'들만이 양 전 원장을 구속시킨 건 아닙니다.

검찰은 이런 수첩을 확보하면, '증거를 찾았다'며 수사를 멈추는 게 아니라 더 벌려 나갑니다. 수첩에 적힌 사건을 새로 확인하고, 관련된 진술을 더 얻고, 또다른 증거를 찾아다닙니다. 이걸 종합해서 영장을 청구하고, 재판에 나아갑니다.

이것을 간과하고 '수첩 조작'만을 주장한다면, 모든 증거를 톺아보고 있는 재판부로선 '이 사람이 거짓말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구나'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대한민국 최고의 법률가인 양승태 전 원장이, 어제 수첩을 이기지 못한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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