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리포트] 북한 인사는 왜 가짜 이름을 좋아할까? 베이징의 가명 첩보전

입력 2019.01.26 (07:04) 수정 2019.01.26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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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 겸 통일전선부장이 카메라를 의식해 검은 파라솔 우산을 썼다.(출처=연합뉴스)

김영철 김용철? 헷갈리는 영문이름

김영철이 미국으로 간다고? CA(CHINA AIR)야 UA(UNITED AIRLINE)야? 빨리 확인해봐! 베이징 특파원들은 요즘 북한 인사들의 잦은 출몰에 신경이 곤두서있다. 언론 노출을 극도로 꺼리는 북한 인사들과 이들을 추적하는 외신 기자들 간 쫓고 쫓기는 숨바꼭질이 한창이다. 항상 시작은 이름 확인에서 시작된다. 이른바 베이징의 가명(假名) 첩보전이다!

김영철 통일전선부장의 영문 이름은 KIM YONG CHOL 이다. 최소한 지난 18일 UA808편으로 워싱턴을 다녀올 때 까지는 그랬다. 하지만 다음번에는 어떤 영문명을 가지고 나올지 모른다. YONG을 YOUNG으로 바꿔 나올지도 모른다. 북한 인사들은 영문이름을 수시로 바꾼다. 아마도 이 기사가 나가면 반드시 바꿀 것이다. 북한 인사들의 동선을 파악하는 게 어려운 이유다.


최(崔)씨를 CHOI->CHOE->TCHOI->TCHOE

스웨덴에서 비핵화 실무협상을 하고 돌아온 최선희 외무성 부상의 영문 이름은 CHOE SON HUI이다. 하지만 예전엔 CHOE SEON HUI라는 영문명을 썼다. 북한 인사들은 심지어 CHOE라는 성에 T자를 붙여 TCHOE라고 바꾸기도 한다. 박(朴)씨를 표기하는 법도 PAK, BAK, PARK 등 다양하다. 태영호 전 영국주재 북한 공사도 탈북 초기에 '태용호'라고 알려졌었는데 이 역시 영문이름을 수시로 바꿔 썼기 때문에 벌어진 혼돈이었다.

북한 외교관 출신인 고영환 국가안보전략연구원 부원장은 1980년대 아프리카 자이르 공항에서 이름 때문에 간첩으로 오인당하여 곤욕을 치른 사연을 기자에게 털어놨다. 처음 부임할 때 영문이름의 고 씨 성을 KOH라고 썼는데 4년 뒤 다시 부임할 때 KO로 바뀐 것이 문제가 됐다. 여권의 생년 월일과 출생지까지 바뀌어 있자 '의도적'이라고 판단해 장시간 조사를 받아야 했다.

리수용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 (출처=연합뉴스)리수용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 (출처=연합뉴스)

아예 가짜이름도 비일비재 리철->리수영->리수용

정통한 대북 소식통에 따르면 이는 비밀주의를 추구하는 북한 외무성의 오랜 관행 때문이다. 북한 외무성의 영사국 여권과가 '적들을 속이는데 좋다'는 이유로 영문 이름을 애매하게 바꿔 여권을 발행한다는 것이다. 사실 영문 이름 표기를 바꾸는 것은 애교 정도에 불과하다. 아예 가짜이름을 쓰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지금 예술단 공연을 위해 베이징에 와 있는 리수용 노동당 국제부장은 원래 스위스 대사 시절엔 리철이란 이름을 썼다. 그러다가 한동안 리수영으로 활동했고 이제 리수용이 된 것이다. 1998년에는 북한 백남순 외무상 부상이 남북 고위급 회담에 백남준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나 모두를 어리둥절하게 만든 사건도 있었다. 장성택은 과거 장상택이라는 이름으로 일본을 들락날락했고, 김정일의 장남 김정남은 말레이시아에서 독살됐을 당시 김철이라는 이름의 여권을 갖고 있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 조차도 스위스 유학시절엔 박은과 박철이라는 이름을 번갈아 썼고, 2009년 후계자 지정 직전까지는 김정운이라는 이름을 썼다.

최강일 외무성 국장대행이 베이징 서우두 공항에서 필자의 질문을 받고 있다.(지난해 3월 22일)최강일 외무성 국장대행이 베이징 서우두 공항에서 필자의 질문을 받고 있다.(지난해 3월 22일)

상대국 교란, 책임회피 목적

국정원 1차장을 역임했던 남주홍 경기대 교수는 구소련에서도 가명을 자주 썼다며 상대국을 교란시키고 결정적인 순간에 책임을 회피할 목적이 있다고 말했다.

대북 사업을 하는 한 중국인 사업가는 "북한 사람들이 하도 가명을 써서 도무지 믿음이 가지 않는다"고 말한다. "잘 알고 지내던 사람이 몇 달 북한에 들어갔다 와서는 다른 이름에 다른 회사 명의의 명함을 건네면 솔직히 이 사람과 사업을 계속 해도 괜찮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고 말한다. 실제로 중국에 나와 있는 북한의 무역회사 가운데 빚을 갚지 않고 폐업하는 경우가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대부분의 경우 회사 대표자는 이름을 바꿔서 다시 나타난다.

김정일 "가명 사용 자제하라."했지만...

김정일이 생전에 가명 사용을 자제하라고 지시했다는 얘기가 있다. 2000년 6·15 공동선언 이후 가명을 쓰는 사례가 많이 줄어들었다는 분석도 있다. 하지만 우리 눈에는 아직도 이상해 보인다. 사실 이제는 인공지능으로 안면 인식이 되는 시대이기 때문에 가짜 이름으로 인한 연막 효과는 기자들에게나 조금 통할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아직도 비밀주의 관행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안타깝다.

이 글을 쓸까 말까 상당히 망설였던 이유는 북한이 이 글을 보고 또 이름을 바꿔 기자들을 골탕먹일 것이란 우려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쓴 것은 북한이 시대착오적이고 유치한 비밀주의를 벗어던지길 바라서이다. 이 글을 읽고 북한이 여권 영문 표기법을 제정해 정상국가로 한걸음 나아오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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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파원리포트] 북한 인사는 왜 가짜 이름을 좋아할까? 베이징의 가명 첩보전
    • 입력 2019-01-26 07:04:15
    • 수정2019-01-26 14:10:09
    특파원 리포트
▲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 겸 통일전선부장이 카메라를 의식해 검은 파라솔 우산을 썼다.(출처=연합뉴스)

김영철 김용철? 헷갈리는 영문이름

김영철이 미국으로 간다고? CA(CHINA AIR)야 UA(UNITED AIRLINE)야? 빨리 확인해봐! 베이징 특파원들은 요즘 북한 인사들의 잦은 출몰에 신경이 곤두서있다. 언론 노출을 극도로 꺼리는 북한 인사들과 이들을 추적하는 외신 기자들 간 쫓고 쫓기는 숨바꼭질이 한창이다. 항상 시작은 이름 확인에서 시작된다. 이른바 베이징의 가명(假名) 첩보전이다!

김영철 통일전선부장의 영문 이름은 KIM YONG CHOL 이다. 최소한 지난 18일 UA808편으로 워싱턴을 다녀올 때 까지는 그랬다. 하지만 다음번에는 어떤 영문명을 가지고 나올지 모른다. YONG을 YOUNG으로 바꿔 나올지도 모른다. 북한 인사들은 영문이름을 수시로 바꾼다. 아마도 이 기사가 나가면 반드시 바꿀 것이다. 북한 인사들의 동선을 파악하는 게 어려운 이유다.


최(崔)씨를 CHOI->CHOE->TCHOI->TCHOE

스웨덴에서 비핵화 실무협상을 하고 돌아온 최선희 외무성 부상의 영문 이름은 CHOE SON HUI이다. 하지만 예전엔 CHOE SEON HUI라는 영문명을 썼다. 북한 인사들은 심지어 CHOE라는 성에 T자를 붙여 TCHOE라고 바꾸기도 한다. 박(朴)씨를 표기하는 법도 PAK, BAK, PARK 등 다양하다. 태영호 전 영국주재 북한 공사도 탈북 초기에 '태용호'라고 알려졌었는데 이 역시 영문이름을 수시로 바꿔 썼기 때문에 벌어진 혼돈이었다.

북한 외교관 출신인 고영환 국가안보전략연구원 부원장은 1980년대 아프리카 자이르 공항에서 이름 때문에 간첩으로 오인당하여 곤욕을 치른 사연을 기자에게 털어놨다. 처음 부임할 때 영문이름의 고 씨 성을 KOH라고 썼는데 4년 뒤 다시 부임할 때 KO로 바뀐 것이 문제가 됐다. 여권의 생년 월일과 출생지까지 바뀌어 있자 '의도적'이라고 판단해 장시간 조사를 받아야 했다.

리수용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 (출처=연합뉴스)
아예 가짜이름도 비일비재 리철->리수영->리수용

정통한 대북 소식통에 따르면 이는 비밀주의를 추구하는 북한 외무성의 오랜 관행 때문이다. 북한 외무성의 영사국 여권과가 '적들을 속이는데 좋다'는 이유로 영문 이름을 애매하게 바꿔 여권을 발행한다는 것이다. 사실 영문 이름 표기를 바꾸는 것은 애교 정도에 불과하다. 아예 가짜이름을 쓰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지금 예술단 공연을 위해 베이징에 와 있는 리수용 노동당 국제부장은 원래 스위스 대사 시절엔 리철이란 이름을 썼다. 그러다가 한동안 리수영으로 활동했고 이제 리수용이 된 것이다. 1998년에는 북한 백남순 외무상 부상이 남북 고위급 회담에 백남준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나 모두를 어리둥절하게 만든 사건도 있었다. 장성택은 과거 장상택이라는 이름으로 일본을 들락날락했고, 김정일의 장남 김정남은 말레이시아에서 독살됐을 당시 김철이라는 이름의 여권을 갖고 있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 조차도 스위스 유학시절엔 박은과 박철이라는 이름을 번갈아 썼고, 2009년 후계자 지정 직전까지는 김정운이라는 이름을 썼다.

최강일 외무성 국장대행이 베이징 서우두 공항에서 필자의 질문을 받고 있다.(지난해 3월 22일)
상대국 교란, 책임회피 목적

국정원 1차장을 역임했던 남주홍 경기대 교수는 구소련에서도 가명을 자주 썼다며 상대국을 교란시키고 결정적인 순간에 책임을 회피할 목적이 있다고 말했다.

대북 사업을 하는 한 중국인 사업가는 "북한 사람들이 하도 가명을 써서 도무지 믿음이 가지 않는다"고 말한다. "잘 알고 지내던 사람이 몇 달 북한에 들어갔다 와서는 다른 이름에 다른 회사 명의의 명함을 건네면 솔직히 이 사람과 사업을 계속 해도 괜찮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고 말한다. 실제로 중국에 나와 있는 북한의 무역회사 가운데 빚을 갚지 않고 폐업하는 경우가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대부분의 경우 회사 대표자는 이름을 바꿔서 다시 나타난다.

김정일 "가명 사용 자제하라."했지만...

김정일이 생전에 가명 사용을 자제하라고 지시했다는 얘기가 있다. 2000년 6·15 공동선언 이후 가명을 쓰는 사례가 많이 줄어들었다는 분석도 있다. 하지만 우리 눈에는 아직도 이상해 보인다. 사실 이제는 인공지능으로 안면 인식이 되는 시대이기 때문에 가짜 이름으로 인한 연막 효과는 기자들에게나 조금 통할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아직도 비밀주의 관행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안타깝다.

이 글을 쓸까 말까 상당히 망설였던 이유는 북한이 이 글을 보고 또 이름을 바꿔 기자들을 골탕먹일 것이란 우려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쓴 것은 북한이 시대착오적이고 유치한 비밀주의를 벗어던지길 바라서이다. 이 글을 읽고 북한이 여권 영문 표기법을 제정해 정상국가로 한걸음 나아오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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