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막뉴스] ‘수요집회’, 일본에 ‘금요행동’…10년을 한결같은 양심의 목소리

입력 2019.02.04 (22:04)

읽어주기 기능은 크롬기반의
브라우저에서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도쿄 한 복판.

매주 금요일, 미쓰비시 중공업 앞에서 진실에 마주하라는 목소리가 울려퍼집니다.

근로정신대 문제 해결을 요구하며 매주 열리는 집회, '금요행동'입니다.

[다카하시/나고야 근로정신대 소송지원회 대표 : "진실은 저희에게 있고, 미쓰비시는 이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큰 죄가 있습니다. 그래서 2007년부터..."]

2차 세계대전 당시 미쓰비시 비행기 공장에서 일하다 지진으로 숨진 이들을 위한 추모비입니다.

["이정숙, 김향남..."]

묻혀있던 '근로정신대'의 존재는 비에 희생자 이름을 새기기 위해 다카하시 씨 등이 한국으로 유가족을 찾아가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됐습니다.

그리고 1999년, 희생자 유가족과 생존한 피해자들을 도와 일본 법원에서 피해배상소송을 시작했습니다.

40여 명의 변호사, 900여 명의 일본 시민들이 함께했는데, 이들이 금요행동의 근간입니다.

[다카하시/나고야 근로정신대 소송지원회 대표 : "(지진 희생자 관이) 너무 가벼워서 이건 도대체 누구지 하고 열어보니 정말 어린 소녀였다고..."]

일제는 1944년 전쟁 와중에 '일하면서 학교에 다닐 수 있다"고 속여 10대 소녀 300여 명을 데려온 뒤 군수 공장으로 밀어넣었습니다.

결정적 증거가 된 순직자 명부.

["(주소가?) 전라남도 목포."]

당시 사진 속 소녀들은 앳되기만 합니다.

막내는 12살이었습니다.

17개월 간 강제로 일에 내몰렸지만 전쟁이 끝나자 한푼도 주지 않고 쫓아내듯 한국으로 돌려보냈습니다.

[다카하시/나고야 근로정신대 소송지원회 대표 : "이건 가해국 시민이 해야 할 일입니다. 할머니들 얼굴을 보고 그 마음을 생각하면 정말 가슴이 저며옵니다."]

일본 교과서에도 실린 한 장의 사진.

지금은 평온해 보이는 그곳이지만, 과거 전쟁의 광기가 넘쳐났던 곳입니다.

[다카하시/나고야 근로정신대 소송지원회 대표 : "천황의 나라라고, 그래서 '우리들은 일본 제국의 승리를 위해 힘쓰겠습니다'라고 맹세를 강요하고..."]

차가운 금요일 새벽, 다카하시 씨는 오늘도 집회를 위해 도쿄행 열차에 올랐습니다.

10여 년을 한결같이 오가는 여정입니다.

올해부터는 외무성 앞에서도 마이크를 듭니다.

그리고 그날 아침, 소송 원고 11명 가운데 한 명, 동생을 미쓰비시 공장에서 잃고 부인 또한 근로정신대 피해자였던 김중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눈물이 북받쳐 오르지만, 참고 또 참습니다.

[다카하시/나고야 근로정신대 소송지원회 대표 : "포기하지 않는다면 꼭 해결될 수 있다는 그런 희망을 가지고... 할머니들이 살아계시는 동안..."]

도쿄에서 KBS 뉴스 이승철입니다.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자막뉴스] ‘수요집회’, 일본에 ‘금요행동’…10년을 한결같은 양심의 목소리
    • 입력 2019-02-04 22:04:05
    자막뉴스
도쿄 한 복판.

매주 금요일, 미쓰비시 중공업 앞에서 진실에 마주하라는 목소리가 울려퍼집니다.

근로정신대 문제 해결을 요구하며 매주 열리는 집회, '금요행동'입니다.

[다카하시/나고야 근로정신대 소송지원회 대표 : "진실은 저희에게 있고, 미쓰비시는 이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큰 죄가 있습니다. 그래서 2007년부터..."]

2차 세계대전 당시 미쓰비시 비행기 공장에서 일하다 지진으로 숨진 이들을 위한 추모비입니다.

["이정숙, 김향남..."]

묻혀있던 '근로정신대'의 존재는 비에 희생자 이름을 새기기 위해 다카하시 씨 등이 한국으로 유가족을 찾아가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됐습니다.

그리고 1999년, 희생자 유가족과 생존한 피해자들을 도와 일본 법원에서 피해배상소송을 시작했습니다.

40여 명의 변호사, 900여 명의 일본 시민들이 함께했는데, 이들이 금요행동의 근간입니다.

[다카하시/나고야 근로정신대 소송지원회 대표 : "(지진 희생자 관이) 너무 가벼워서 이건 도대체 누구지 하고 열어보니 정말 어린 소녀였다고..."]

일제는 1944년 전쟁 와중에 '일하면서 학교에 다닐 수 있다"고 속여 10대 소녀 300여 명을 데려온 뒤 군수 공장으로 밀어넣었습니다.

결정적 증거가 된 순직자 명부.

["(주소가?) 전라남도 목포."]

당시 사진 속 소녀들은 앳되기만 합니다.

막내는 12살이었습니다.

17개월 간 강제로 일에 내몰렸지만 전쟁이 끝나자 한푼도 주지 않고 쫓아내듯 한국으로 돌려보냈습니다.

[다카하시/나고야 근로정신대 소송지원회 대표 : "이건 가해국 시민이 해야 할 일입니다. 할머니들 얼굴을 보고 그 마음을 생각하면 정말 가슴이 저며옵니다."]

일본 교과서에도 실린 한 장의 사진.

지금은 평온해 보이는 그곳이지만, 과거 전쟁의 광기가 넘쳐났던 곳입니다.

[다카하시/나고야 근로정신대 소송지원회 대표 : "천황의 나라라고, 그래서 '우리들은 일본 제국의 승리를 위해 힘쓰겠습니다'라고 맹세를 강요하고..."]

차가운 금요일 새벽, 다카하시 씨는 오늘도 집회를 위해 도쿄행 열차에 올랐습니다.

10여 년을 한결같이 오가는 여정입니다.

올해부터는 외무성 앞에서도 마이크를 듭니다.

그리고 그날 아침, 소송 원고 11명 가운데 한 명, 동생을 미쓰비시 공장에서 잃고 부인 또한 근로정신대 피해자였던 김중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눈물이 북받쳐 오르지만, 참고 또 참습니다.

[다카하시/나고야 근로정신대 소송지원회 대표 : "포기하지 않는다면 꼭 해결될 수 있다는 그런 희망을 가지고... 할머니들이 살아계시는 동안..."]

도쿄에서 KBS 뉴스 이승철입니다.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오늘의 핫 클릭

실시간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뉴스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수신료 수신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