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신발언’ 쏟아진 아카데미상 시상식…“차별 반대에 함께하길”

입력 2019.02.25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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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인의 자리에서 양쪽의 편견을 묻다
"충분히 흑인도 아니고 백인도 아니고, 남자답지도 않다면, 나는 대체 뭐지?"

제91회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 '그린 북'에 나오는 셜리의 대사다. 실존 인물인 천재 흑인 피아니스트 셜리는 말하자면 '경계인'이다. 올해 아카데미의 선택은 이 지점을 향한다. 수많은 흑인이 노골적인 차별과 폭력에 시달리던 미국의 1960년대, 셜리는 최고의 음악가 지위에 올라 있지만 거리에 나가면 '깜둥이' 소리를 듣는 처지다. 성적 지향 역시 주류 이성애자들과 다르다. '그린 북'은 당시 흑인들이 여행할 때 흑인의 이용을 허용하는 숙박업소와 식당 등을 안내한 책자의 명칭이기도 하다. 그가 백인 운전사가 모는 고급 승용차에 오르는 장면에서, 고된 노동에 시달리는 주변 흑인들이 뜨악한 눈길로 쳐다본다. 이처럼 경계인의 자리에서 오늘날의 편견에 대해 질문하는 것이 '그린 북'의 지향이다.

25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돌비 극장에서 열린 시상식에서는 미국 흑인 인권운동의 상징 존 루이스 하원의원(79)이 '그린 북'을 작품상 후보로 소개하기 위해 무대에 올랐다. 그는 편치 않은 건강 상태로 어렵게 입을 떼었다. "그간 흑인과 여성들은 2등 시민으로 대우받고 가정을 꾸리거나 생활비를 버는 데도 폭행당하고 심지어 죽임을 당하기까지 했다"며 "여러분이 젊든 늙었든 '그린 북'의 여정에 함께 해주기 바란다." 현대를 살아가는 청중에게 '여정'이 끝나지 않았음을 역설한 대목이다. 역시 작품상 후보인 '블랙클랜스맨'을 소개하기 위해 초대된 전설의 가수 바브라 스트라이샌드도 "(인종 차별 문제는) 특히 오늘날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며 현실 비판에 목소리를 얹었다. 현장에 자리한 기라성 같은 스타들이 기립박수로 화답했다.

영화인들 거침없는 '소신 발언'…정부 직접 비판도
시상식에서의 '소신 발언'은 각색상을 받은 '블랙클랜스맨'의 감독 스파이크 리의 순서에 이르러 정점에 달했다. 그는 "100년 전 나의 할머니는 노예였지만 대학에서 공부했고 나를 영화학교에 보내 오늘에 이르렀다"며 "이 나라를 만든 사람들, 원주민(인디언)을 집단 학살한 사람들에게 인류애를 회복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2020년 대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역사의 바른 편에 서야 한다"며"우리는 도덕적이고 옳은 선택을 해야 한다"며 트럼프 정부를 강한 어조로 비판했다.

현실 비판에 적극적인 미국 영화인들의 이 같은 발언은 아카데미 시상식을 기다렸다는 듯 터져 나오곤 한다. 미 공화당 집권기에는 특히 이런 경향이 강하다. 부시 행정부의 중동 전쟁과 반테러 정책이 강경 일변도를 걷던 2000년대 중반 아카데미 시상식은 "민주당 전당대회"라는 농담이 나올 정도였다. 올해 시상식은 시작부터 비판적 발언이 쏟아졌다. 첫 순서였던 여우조연상 부문 시상에 나선 티나 페이, 마야 루돌프, 에이미 폴러는 이번 아카데미상 후보 중 여러 작품이 이민자 이슈를 다루고 있는 점을 의식하면서 "멕시코는 국경을 세우는 데 돈을 내지 않을 것"이라고 트럼프 정부를 직접 비판했다.

멕시코 원주민이자 부잣집 가정부로 일하는 여성의 이야기를 담은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넷플릭스 영화 '로마'는 감독상, 촬영상, 외국어영화상 등 굵직한 3개 부문에서 수상했다. 쿠아론 감독은 수상 소감에서 "수많은 여성 노동자 중 어떤 이들은 여전히 자신의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며 "우리에게는 이에 대한 책임이 있고 그 책임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다"고 말해 박수를 받았다. 외국어영화상 수상 소감에서는 "나는 그동안 수많은 외국어 영화들에서 영감을 받아왔다"며 '죠스' '시민 케인' 등 미국영화들을 언급해 객석에 웃음을 선사했다. 멕시코인으로서 그에게 미국영화가 '외국어 영화'이며, 미국영화들의 '국내 잔치'인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이례적으로 주요 부문 수상을 한 데 대해 역설적인 농담을 던진 것이다.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은 '로마'뿐 아니라 부시 정부 당시 딕 체니 부통령의 어두운 이면을 담은 '바이스', 1970년대 백인우월주의자 집단을 다룬 '블랙클랜스맨', 18세기 스튜어트 왕조 왕실의 여성들과 동성애 코드를 품은 '더 페이버릿:여왕의 여자', 흑인 슈퍼히어로 영화 '블랙 팬서'에 이르기까지 사회적 약자와 정치적 이슈를 담은 작품들이 대거 후보에 올라 관심을 모아왔다. 작품상 시상을 위해 깜짝 등장한 배우 줄리아 로버츠는 "작품상 후보들이 모두 다르게 훌륭하지만 한 가지는 증명된다"며 "당신이 누구든, 어디에 살든, 영화가 우리를 연결해준다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성 소수자, 인종, 여성의 문제를 적극 끌어온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을 유려하게 마감했다.

'그린 북' 수상 놓고 논란 재점화
'그린 북'의 수상은 작품을 둘러싼 논란도 재점화시키고 있다. 영화는 이탈리아계 백인 운전사 토니 발레롱가의 시선으로 전개되는데, 각본을 쓴 이는 다름 아닌 토니의 아들인 닉 발레롱가다. 토니는 생계를 위해 셜리에게 고용된 하층민으로 교양과는 담쌓은 백인이다. 상류층 흑인과 하층민 백인이라는 낯선 조합의 인물 구성이, 인종 차별이 만연한 미국 남부 지역을 여행하며 개인적 관계와 사회적 관계 속에서 충돌을 겪는다. 이 영화의 각본이 매력적인 이유다. 하지만 돈 셜리의 후손을 포함한 일부 흑인들은 "사실을 왜곡했다"며 이 각본이 영화화되는 것에 반대해왔다. 지나치게 토니의 입장에서 쓰인 이야기로 토니만 숭고한 사람인 것처럼 미화했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그래서 "인종 차별에 반대하지만 백인의 시선이 지니는 한계"라며 '그린 북'이 작품상 수상에 이견을 내놓고 있다. 반면 "극 중 토니가 흑인에 대한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가 서서히 바뀌는 과정이 충분히 성찰적으로 그려졌다"는 지지층의 견해도 있다. 이 같은 논란 속에서 '그린 북'은 현재 국내 관객 30만 명을 돌파하며 다양성 영화로는 흥행에 선전하고 있다. 아래는 올해 아카데미상 수상자와 수상작 명단.

▲ 작품상 = '그린 북'
▲ 감독상 = 알폰소 쿠아론('로마')
▲ 남우주연상 = 라미 말렉('보헤미안 랩소디')
▲ 여우주연상 = 올리비아 콜맨('더 페이버릿')
▲ 각본상 = '그린 북'
▲ 각색상 = '블랙클랜스맨'
▲ 남우조연상 = 마허셜라 알리('그린 북')
▲ 여우조연상 = 리자이나 킹 ('이프 빌 스트리트 쿠드 토크')
▲ 편집상 = '보헤미안 랩소디'
▲ 촬영상 = '로마'
▲ 미술상 = '블랙 팬서'
▲ 의상상 = '블랙 팬서'
▲ 분장상 = '바이스'
▲ 시각효과상 = '퍼스트맨'
▲ 음악상 = '블랙 팬서'
▲ 주제가상 = '섈로'('스타 이즈 본')
▲ 음향편집상 = '보헤미안 랩소디'
▲ 음향효과상 = '보헤미안 랩소디'
▲ 외국어영화상 = '로마'
▲ 장편 애니메이션상 =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
▲ 단편 애니메이션상 = '바오'
▲ 단편영화상 = '스킨'
▲ 장편 다큐멘터리상 = '프리 솔로'
▲ 단편 다큐멘터리상 = '피리어드.엔드 오브 센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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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2-25 17:29:50
    문화
경계인의 자리에서 양쪽의 편견을 묻다
"충분히 흑인도 아니고 백인도 아니고, 남자답지도 않다면, 나는 대체 뭐지?"

제91회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 '그린 북'에 나오는 셜리의 대사다. 실존 인물인 천재 흑인 피아니스트 셜리는 말하자면 '경계인'이다. 올해 아카데미의 선택은 이 지점을 향한다. 수많은 흑인이 노골적인 차별과 폭력에 시달리던 미국의 1960년대, 셜리는 최고의 음악가 지위에 올라 있지만 거리에 나가면 '깜둥이' 소리를 듣는 처지다. 성적 지향 역시 주류 이성애자들과 다르다. '그린 북'은 당시 흑인들이 여행할 때 흑인의 이용을 허용하는 숙박업소와 식당 등을 안내한 책자의 명칭이기도 하다. 그가 백인 운전사가 모는 고급 승용차에 오르는 장면에서, 고된 노동에 시달리는 주변 흑인들이 뜨악한 눈길로 쳐다본다. 이처럼 경계인의 자리에서 오늘날의 편견에 대해 질문하는 것이 '그린 북'의 지향이다.

25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돌비 극장에서 열린 시상식에서는 미국 흑인 인권운동의 상징 존 루이스 하원의원(79)이 '그린 북'을 작품상 후보로 소개하기 위해 무대에 올랐다. 그는 편치 않은 건강 상태로 어렵게 입을 떼었다. "그간 흑인과 여성들은 2등 시민으로 대우받고 가정을 꾸리거나 생활비를 버는 데도 폭행당하고 심지어 죽임을 당하기까지 했다"며 "여러분이 젊든 늙었든 '그린 북'의 여정에 함께 해주기 바란다." 현대를 살아가는 청중에게 '여정'이 끝나지 않았음을 역설한 대목이다. 역시 작품상 후보인 '블랙클랜스맨'을 소개하기 위해 초대된 전설의 가수 바브라 스트라이샌드도 "(인종 차별 문제는) 특히 오늘날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며 현실 비판에 목소리를 얹었다. 현장에 자리한 기라성 같은 스타들이 기립박수로 화답했다.

영화인들 거침없는 '소신 발언'…정부 직접 비판도
시상식에서의 '소신 발언'은 각색상을 받은 '블랙클랜스맨'의 감독 스파이크 리의 순서에 이르러 정점에 달했다. 그는 "100년 전 나의 할머니는 노예였지만 대학에서 공부했고 나를 영화학교에 보내 오늘에 이르렀다"며 "이 나라를 만든 사람들, 원주민(인디언)을 집단 학살한 사람들에게 인류애를 회복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2020년 대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역사의 바른 편에 서야 한다"며"우리는 도덕적이고 옳은 선택을 해야 한다"며 트럼프 정부를 강한 어조로 비판했다.

현실 비판에 적극적인 미국 영화인들의 이 같은 발언은 아카데미 시상식을 기다렸다는 듯 터져 나오곤 한다. 미 공화당 집권기에는 특히 이런 경향이 강하다. 부시 행정부의 중동 전쟁과 반테러 정책이 강경 일변도를 걷던 2000년대 중반 아카데미 시상식은 "민주당 전당대회"라는 농담이 나올 정도였다. 올해 시상식은 시작부터 비판적 발언이 쏟아졌다. 첫 순서였던 여우조연상 부문 시상에 나선 티나 페이, 마야 루돌프, 에이미 폴러는 이번 아카데미상 후보 중 여러 작품이 이민자 이슈를 다루고 있는 점을 의식하면서 "멕시코는 국경을 세우는 데 돈을 내지 않을 것"이라고 트럼프 정부를 직접 비판했다.

멕시코 원주민이자 부잣집 가정부로 일하는 여성의 이야기를 담은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넷플릭스 영화 '로마'는 감독상, 촬영상, 외국어영화상 등 굵직한 3개 부문에서 수상했다. 쿠아론 감독은 수상 소감에서 "수많은 여성 노동자 중 어떤 이들은 여전히 자신의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며 "우리에게는 이에 대한 책임이 있고 그 책임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다"고 말해 박수를 받았다. 외국어영화상 수상 소감에서는 "나는 그동안 수많은 외국어 영화들에서 영감을 받아왔다"며 '죠스' '시민 케인' 등 미국영화들을 언급해 객석에 웃음을 선사했다. 멕시코인으로서 그에게 미국영화가 '외국어 영화'이며, 미국영화들의 '국내 잔치'인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이례적으로 주요 부문 수상을 한 데 대해 역설적인 농담을 던진 것이다.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은 '로마'뿐 아니라 부시 정부 당시 딕 체니 부통령의 어두운 이면을 담은 '바이스', 1970년대 백인우월주의자 집단을 다룬 '블랙클랜스맨', 18세기 스튜어트 왕조 왕실의 여성들과 동성애 코드를 품은 '더 페이버릿:여왕의 여자', 흑인 슈퍼히어로 영화 '블랙 팬서'에 이르기까지 사회적 약자와 정치적 이슈를 담은 작품들이 대거 후보에 올라 관심을 모아왔다. 작품상 시상을 위해 깜짝 등장한 배우 줄리아 로버츠는 "작품상 후보들이 모두 다르게 훌륭하지만 한 가지는 증명된다"며 "당신이 누구든, 어디에 살든, 영화가 우리를 연결해준다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성 소수자, 인종, 여성의 문제를 적극 끌어온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을 유려하게 마감했다.

'그린 북' 수상 놓고 논란 재점화
'그린 북'의 수상은 작품을 둘러싼 논란도 재점화시키고 있다. 영화는 이탈리아계 백인 운전사 토니 발레롱가의 시선으로 전개되는데, 각본을 쓴 이는 다름 아닌 토니의 아들인 닉 발레롱가다. 토니는 생계를 위해 셜리에게 고용된 하층민으로 교양과는 담쌓은 백인이다. 상류층 흑인과 하층민 백인이라는 낯선 조합의 인물 구성이, 인종 차별이 만연한 미국 남부 지역을 여행하며 개인적 관계와 사회적 관계 속에서 충돌을 겪는다. 이 영화의 각본이 매력적인 이유다. 하지만 돈 셜리의 후손을 포함한 일부 흑인들은 "사실을 왜곡했다"며 이 각본이 영화화되는 것에 반대해왔다. 지나치게 토니의 입장에서 쓰인 이야기로 토니만 숭고한 사람인 것처럼 미화했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그래서 "인종 차별에 반대하지만 백인의 시선이 지니는 한계"라며 '그린 북'이 작품상 수상에 이견을 내놓고 있다. 반면 "극 중 토니가 흑인에 대한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가 서서히 바뀌는 과정이 충분히 성찰적으로 그려졌다"는 지지층의 견해도 있다. 이 같은 논란 속에서 '그린 북'은 현재 국내 관객 30만 명을 돌파하며 다양성 영화로는 흥행에 선전하고 있다. 아래는 올해 아카데미상 수상자와 수상작 명단.

▲ 작품상 = '그린 북'
▲ 감독상 = 알폰소 쿠아론('로마')
▲ 남우주연상 = 라미 말렉('보헤미안 랩소디')
▲ 여우주연상 = 올리비아 콜맨('더 페이버릿')
▲ 각본상 = '그린 북'
▲ 각색상 = '블랙클랜스맨'
▲ 남우조연상 = 마허셜라 알리('그린 북')
▲ 여우조연상 = 리자이나 킹 ('이프 빌 스트리트 쿠드 토크')
▲ 편집상 = '보헤미안 랩소디'
▲ 촬영상 = '로마'
▲ 미술상 = '블랙 팬서'
▲ 의상상 = '블랙 팬서'
▲ 분장상 = '바이스'
▲ 시각효과상 = '퍼스트맨'
▲ 음악상 = '블랙 팬서'
▲ 주제가상 = '섈로'('스타 이즈 본')
▲ 음향편집상 = '보헤미안 랩소디'
▲ 음향효과상 = '보헤미안 랩소디'
▲ 외국어영화상 = '로마'
▲ 장편 애니메이션상 =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
▲ 단편 애니메이션상 = '바오'
▲ 단편영화상 = '스킨'
▲ 장편 다큐멘터리상 = '프리 솔로'
▲ 단편 다큐멘터리상 = '피리어드.엔드 오브 센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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