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선수단 열차로 판문점 통과 추진…비밀해제 된 ‘88올림픽’ 이야기

입력 2019.03.31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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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 1988년 외교문서 공개…서울올림픽 뒷이야기 담겨
■ "중국, 선수단을 열차로 북한, 판문점 통해 보내려 했다"
■ 북한의 강력한 반발로 무산…중국 "호기를 놓친 것"
■ 소련 고르바초프, 중국 덩샤오핑도 나서 북한 참가 독려
■ 탈냉전이 본격화되면서 북한 '고립무원'

서울올림픽 중국 선수단 입장 모습서울올림픽 중국 선수단 입장 모습

1988년 서울올림픽에 122번째로 입장한 중국, 선수 292명을 보내 금메달 5개를 포함해 28개의 메달을 거머쥐었습니다. 88올림픽을 계기로 중국은 명실상부한 아시아 스포츠 강국으로 급부상했습니다. 그런데 중국이 당시 선수단을 철도로 북한과 판문점을 거쳐 서울에 보내려 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공개됐습니다. 30년 만에 비밀이 해제된 당시 외교문서를 통해서입니다.

비밀 해제된 1988년 외교문서비밀 해제된 1988년 외교문서

당시 주파키스탄 한국대사대리는 1988년 8월 7일 외무부 등에 보낸 전문에서, 주파키스탄 중국대사관 참사관에게 들었다며 "중국이 철도편으로 북한과 판문점을 거쳐 올림픽 선수단을 서울에 보내려고 북한과 교섭했지만, 북측이 이를 단호하게 거부했다"고 보고했습니다.

비밀 해제된 1988년 외교문서 CG비밀 해제된 1988년 외교문서 CG

중국대사관 참사관은 이를 두고 "어느 면에서 보나 잘못된 것으로 국제적 고립을 자초하는 처사"라며 "한국 측 제의대로 몇 개 종목을 할애받으면 북한이 충분히 체면 유지를 할 수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면서 "절대권력을 가진 김일성에게 올바른 정책 건의를 하지 못하는 북한 체제의 경직성 때문에 잘못된 결정을 했다"며 "남북한 간 교류와 협조의 획기적 호기를 놓쳤다"고 꼬집었습니다.

중국이 열차를 이용해 서울올림픽에 참가하려 했다는 정황은 다른 외교문서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아 이를 사실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려워 보이지만, 당시에 그런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었다는 점은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당시 중국 선수단은 항공편을 통해 김포공항으로 입국했습니다.

중국 덩샤오핑과 북한 김일성중국 덩샤오핑과 북한 김일성

그렇다면 중국은 왜 선수단을 열차로 보내려고 했던 걸까요? 조민 평화재단 평화교육원장은 이는 당시 국제 정세와 연관해 봐야 할 문제라고 지적했습니다. 당시 중국은 덩샤오핑이 개혁 개방 정책으로 치고 나오던 시기, 만약 1988년에 그런 평화 이벤트가 실현됐다면, 중국은 친서방국이자 '세계 속의 중국'으로 한 단계 레벨업 될 수 있었기 때문에 중국 입장에선 충분히 검토해볼 만한 카드였다는 겁니다.

하지만 북한은 달랐습니다. 조민 원장은 1988년은 남북한 간에 체제 대결로 인한 긴장이 바짝 고조되었던 시기였고, 이런 상황에서 서울올림픽 개최는 북한으로선 상당히 충격적이고 긴장되는 사안었다고 회고합니다. 북한이 우리와 경쟁하기 위해 1년 뒤인 1989년, 국가 자산을 쏟아부어 평양 청년축전을 열기도 했습니다. 그런 북한으로선 북한을 관통하겠다는 중국의 요구를 수용하기 당혹스러웠을 거란 겁니다.

1988년 서울올림픽1988년 서울올림픽

냉전이 허물어져 가던 시기, IOC 사마란치 위원장은 북한과 중국, 소련 등 공산권 국가들의 올림픽 참가를 독려했습니다. 1984년 LA 올림픽에는 불참했다가 88년 서울올림픽은 참가하려고 했던 소련은 남북 간에 올림픽 공동 개최를 제안했습니다. 북한의 참여를 통해, 서울 올림픽 참가의 명분과 구실을 찾으려 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북한 김일성은 되려 소련의 불참을 요청했고, 고르바초프는 김일성의 요청을 거부했습니다.

중국 최고지도자인 덩샤오핑도 북한의 서울 올림픽 참가를 독려했습니다. 88올림픽 개막을 두 달쯤 앞둔 7월 20일 주미대사가 외무부 장관에게 보낸 문서에 따르면, 덩샤오핑은 그해 6월 중국 베이징의 북한대사관을 통해 김일성 주석에게 서울올림픽 참가를 독려한 것으로 미국 국무부는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외교문서는 중국과 소련의 체제 전환이 본격화되는 상황에서 고립무원에 빠지게 된 북한의 고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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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 선수단 열차로 판문점 통과 추진…비밀해제 된 ‘88올림픽’ 이야기
    • 입력 2019-03-31 16:29:27
    취재K
■ 1988년 외교문서 공개…서울올림픽 뒷이야기 담겨 <br />■ "중국, 선수단을 열차로 북한, 판문점 통해 보내려 했다" <br />■ 북한의 강력한 반발로 무산…중국 "호기를 놓친 것" <br />■ 소련 고르바초프, 중국 덩샤오핑도 나서 북한 참가 독려 <br />■ 탈냉전이 본격화되면서 북한 '고립무원'
서울올림픽 중국 선수단 입장 모습
1988년 서울올림픽에 122번째로 입장한 중국, 선수 292명을 보내 금메달 5개를 포함해 28개의 메달을 거머쥐었습니다. 88올림픽을 계기로 중국은 명실상부한 아시아 스포츠 강국으로 급부상했습니다. 그런데 중국이 당시 선수단을 철도로 북한과 판문점을 거쳐 서울에 보내려 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공개됐습니다. 30년 만에 비밀이 해제된 당시 외교문서를 통해서입니다.

비밀 해제된 1988년 외교문서
당시 주파키스탄 한국대사대리는 1988년 8월 7일 외무부 등에 보낸 전문에서, 주파키스탄 중국대사관 참사관에게 들었다며 "중국이 철도편으로 북한과 판문점을 거쳐 올림픽 선수단을 서울에 보내려고 북한과 교섭했지만, 북측이 이를 단호하게 거부했다"고 보고했습니다.

비밀 해제된 1988년 외교문서 CG
중국대사관 참사관은 이를 두고 "어느 면에서 보나 잘못된 것으로 국제적 고립을 자초하는 처사"라며 "한국 측 제의대로 몇 개 종목을 할애받으면 북한이 충분히 체면 유지를 할 수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면서 "절대권력을 가진 김일성에게 올바른 정책 건의를 하지 못하는 북한 체제의 경직성 때문에 잘못된 결정을 했다"며 "남북한 간 교류와 협조의 획기적 호기를 놓쳤다"고 꼬집었습니다.

중국이 열차를 이용해 서울올림픽에 참가하려 했다는 정황은 다른 외교문서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아 이를 사실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려워 보이지만, 당시에 그런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었다는 점은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당시 중국 선수단은 항공편을 통해 김포공항으로 입국했습니다.

중국 덩샤오핑과 북한 김일성
그렇다면 중국은 왜 선수단을 열차로 보내려고 했던 걸까요? 조민 평화재단 평화교육원장은 이는 당시 국제 정세와 연관해 봐야 할 문제라고 지적했습니다. 당시 중국은 덩샤오핑이 개혁 개방 정책으로 치고 나오던 시기, 만약 1988년에 그런 평화 이벤트가 실현됐다면, 중국은 친서방국이자 '세계 속의 중국'으로 한 단계 레벨업 될 수 있었기 때문에 중국 입장에선 충분히 검토해볼 만한 카드였다는 겁니다.

하지만 북한은 달랐습니다. 조민 원장은 1988년은 남북한 간에 체제 대결로 인한 긴장이 바짝 고조되었던 시기였고, 이런 상황에서 서울올림픽 개최는 북한으로선 상당히 충격적이고 긴장되는 사안었다고 회고합니다. 북한이 우리와 경쟁하기 위해 1년 뒤인 1989년, 국가 자산을 쏟아부어 평양 청년축전을 열기도 했습니다. 그런 북한으로선 북한을 관통하겠다는 중국의 요구를 수용하기 당혹스러웠을 거란 겁니다.

1988년 서울올림픽
냉전이 허물어져 가던 시기, IOC 사마란치 위원장은 북한과 중국, 소련 등 공산권 국가들의 올림픽 참가를 독려했습니다. 1984년 LA 올림픽에는 불참했다가 88년 서울올림픽은 참가하려고 했던 소련은 남북 간에 올림픽 공동 개최를 제안했습니다. 북한의 참여를 통해, 서울 올림픽 참가의 명분과 구실을 찾으려 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북한 김일성은 되려 소련의 불참을 요청했고, 고르바초프는 김일성의 요청을 거부했습니다.

중국 최고지도자인 덩샤오핑도 북한의 서울 올림픽 참가를 독려했습니다. 88올림픽 개막을 두 달쯤 앞둔 7월 20일 주미대사가 외무부 장관에게 보낸 문서에 따르면, 덩샤오핑은 그해 6월 중국 베이징의 북한대사관을 통해 김일성 주석에게 서울올림픽 참가를 독려한 것으로 미국 국무부는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외교문서는 중국과 소련의 체제 전환이 본격화되는 상황에서 고립무원에 빠지게 된 북한의 고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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