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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와 제주4.3
입력 2019.04.01 (19:48) 수정 2019.04.01 (22:41) 뉴스9(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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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포트]
일본 오사카에는
어떻게 7만 명이 넘는
재일제주인이 살게 됐을까.

시간은
일제 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제주와 오사카 사이 정기선이 운항되고,
강제징용이 이뤄지면서,
수만 명의 제주인들이
일본으로 터전을 옮겼습니다.

해방 후 상당수가
고향 제주로 돌아왔지만,
1947년 3.1절 발포사건으로 시작된 4.3은
제주인들을 다시
일본으로 내몰았습니다.

4.3당시에만 최대 만 명이
건너간 것으로 추정됩니다.

허영선/제주4.3연구소장 [인터뷰]
"이쪽도 저쪽도 아닌 일본. 멀지만 가장 가까운 곳을 선택한 것이 일본이었고, 그것은 바로 목숨을 건 탈출이었고, 4.3으로부터 도피처이기도 했습니다"

벼랑 끝에 내몰린
제주인들이 도착한 곳은
오사카 공업지대의 외진 곳,

공장 노동자로,
식당 종업원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현실 속에서도,
고향 음식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고,
자녀들의 교육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제주시 조천읍 출신
재일동포 고 조지현 작가가
사진으로 기록한 '이카이노' 안엔
재일제주인의 고달픈 삶이 담겼습니다.

조지혜/ 고 조지현 작가 딸[인터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아버지의 사진은 정말 자이니치의 소중한 재산이라고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정말로 그렇구나라고 저도 생각하게 됐습니다"

좌우이념 대립 속에 일어난 제주4.3은
오사카와 제주로,
제주인들의 삶을 갈라놓았습니다.

분단된 나라 밖 하나의 공간이었던
재일동포 사회에서
재일제주인들도 분단의 갈등을 겪으며,
4.3은 오랜 시간 동안
금기어였습니다.

오광현/재일본제주4.3유족회장[인터뷰]
"민단 사람은 제주4.3은 빨갱이 폭동이라고 하는 분 아직 계세요. 돌아가신 내 친구 아버지는, 그 어머니가 희생자인데, 그래도 산폭도라고 합니다. 빨갱이라고. 그런 복잡한 재일제주인의 사고방식이 있어요"

오사카의 위령제는
반세기가 지난 1998년에야
처음으로 열렸습니다.

70주년인 지난해엔
비로소 위령비가 건립됐고,
공식적인 추모 공간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재일제주인이 신청해
인정된 4.3희생자는 75명뿐,
명예회복은 아직 멀기만 합니다.

허영선/제주4.3연구소장[인터뷰]
"섬을 떠난 사람들에 대해서 과연 고향에서는 어떻게 대했는가, 그리고 그들의 소외된 4.3의 아픔을 안고 이렇게 소외된 삶을 사는 그분들에게 과연 얼마나 우리가 신호를 보냈고, 얼마나 다가갈 수 있었는가"
KBS뉴스 하선아입니다.
  • 오사카와 제주4.3
    • 입력 2019-04-01 19:48:59
    • 수정2019-04-01 22:41:58
    뉴스9(제주)
[리포트]
일본 오사카에는
어떻게 7만 명이 넘는
재일제주인이 살게 됐을까.

시간은
일제 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제주와 오사카 사이 정기선이 운항되고,
강제징용이 이뤄지면서,
수만 명의 제주인들이
일본으로 터전을 옮겼습니다.

해방 후 상당수가
고향 제주로 돌아왔지만,
1947년 3.1절 발포사건으로 시작된 4.3은
제주인들을 다시
일본으로 내몰았습니다.

4.3당시에만 최대 만 명이
건너간 것으로 추정됩니다.

허영선/제주4.3연구소장 [인터뷰]
"이쪽도 저쪽도 아닌 일본. 멀지만 가장 가까운 곳을 선택한 것이 일본이었고, 그것은 바로 목숨을 건 탈출이었고, 4.3으로부터 도피처이기도 했습니다"

벼랑 끝에 내몰린
제주인들이 도착한 곳은
오사카 공업지대의 외진 곳,

공장 노동자로,
식당 종업원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현실 속에서도,
고향 음식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고,
자녀들의 교육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제주시 조천읍 출신
재일동포 고 조지현 작가가
사진으로 기록한 '이카이노' 안엔
재일제주인의 고달픈 삶이 담겼습니다.

조지혜/ 고 조지현 작가 딸[인터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아버지의 사진은 정말 자이니치의 소중한 재산이라고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정말로 그렇구나라고 저도 생각하게 됐습니다"

좌우이념 대립 속에 일어난 제주4.3은
오사카와 제주로,
제주인들의 삶을 갈라놓았습니다.

분단된 나라 밖 하나의 공간이었던
재일동포 사회에서
재일제주인들도 분단의 갈등을 겪으며,
4.3은 오랜 시간 동안
금기어였습니다.

오광현/재일본제주4.3유족회장[인터뷰]
"민단 사람은 제주4.3은 빨갱이 폭동이라고 하는 분 아직 계세요. 돌아가신 내 친구 아버지는, 그 어머니가 희생자인데, 그래도 산폭도라고 합니다. 빨갱이라고. 그런 복잡한 재일제주인의 사고방식이 있어요"

오사카의 위령제는
반세기가 지난 1998년에야
처음으로 열렸습니다.

70주년인 지난해엔
비로소 위령비가 건립됐고,
공식적인 추모 공간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재일제주인이 신청해
인정된 4.3희생자는 75명뿐,
명예회복은 아직 멀기만 합니다.

허영선/제주4.3연구소장[인터뷰]
"섬을 떠난 사람들에 대해서 과연 고향에서는 어떻게 대했는가, 그리고 그들의 소외된 4.3의 아픔을 안고 이렇게 소외된 삶을 사는 그분들에게 과연 얼마나 우리가 신호를 보냈고, 얼마나 다가갈 수 있었는가"
KBS뉴스 하선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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