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돋보기] ‘고기’ 안 들어간 ‘고기’는 ‘고기’일까 아닐까

입력 2019.04.07 (14:05) 수정 2019.04.08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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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 안 들어간 '고기'는 '고기'일까 아닐까

발음이 얼마나 정확한가를 시험하자는 게 아니다. 최근 미국과 유럽에서는 '고기'라는 단어의 정의를 둘러싼 논쟁이 갈수록 뜨거워지고 있다. 현지시간 4일 영국 일간 가디언에 따르면 유럽의회는 버거와 스테이크, 소시지 같은 고기와 관련된 용어와 명칭을 실제 고기가 아닌 인조고기를 사용해 만든 식품에 쓸 수 없도록 하는 법안을 마련했다. 이 같은 용어와 명칭은 "전적으로 동물의 식용 가능한 부위에 한정한다(exclusively for edible parts of the animals)"는 게 법안의 골자이다. 유럽의회 농업위원회는 소속 의원 80%의 찬성을 얻어 법안을 채택, 5월 총선 이후 구성될 본회의에 정식 안건으로 상정할 예정이다. 이렇게 되면 '배지 버거(veggie burger, 고기를 안 쓴 버거)'는 '버거'라고 불릴 수 없고 '배지 디스크(veggie disc)'와 같이 전혀 다른 개념의 이름으로 불려야 한다.

현재 시판되고 있는 식물성 원료로 만든 ‘인조고기 패티’. 유럽에서는 이런 제품을 광고·판매할 때 ‘버거’라는 표현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법안을 마련해 추진 중이다.현재 시판되고 있는 식물성 원료로 만든 ‘인조고기 패티’. 유럽에서는 이런 제품을 광고·판매할 때 ‘버거’라는 표현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법안을 마련해 추진 중이다.

유럽에서의 이번 '명명규제' 추진이 '고기로 만든 제품'과 관련해서라면 미국에서는 아예 '고기' 자체에 대한 논란이 거세다. 지난해 미국 미주리주는 이른바 '인조고기'를 '고기(meat)'로 부르지 못하게 하는 법률(육류광고법)을 제정하고 시행에 들어갔다. 전통 방식으로 사육하고 도축한 육류에 한해서만 '고기'라고 부를 수 있도록 법으로 못을 박은 것이다. 테네시주와 버지니아주, 와이오밍주, 네브래스카주, 미시시피주 같은 주요 농업지역 10여 개 주 정부들도 '인조고기(인공육)'를 광고·판매할 때 '고기'라는 표현을 쓸 수 없도록 하는 법안을 추진하고 있다. 일부 주에서는 이를 지키지 않을 경우 최대 1,000달러의 벌금을 부과하는 조항도 담고 있다.

미국과 유럽에서 이처럼 '고기와 유사한 제품'과 '고기로 만든 제품'을 둘러싼 명명 논쟁이 가열되고 있는 것은 그만큼 '인조고기' 제조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조고기'는 크게 콩 같은 식물성 재료를 이용해 만든 '식물성 고기'와 실제 소의 줄기세포를 배양해 만든 '세포 배양육'으로 나뉜다. 과거에는 맛의 측면에서 진짜 고기에 크게 못 미치고 식감도 현저히 차이가 날뿐더러 가격도 수억 원(2013년 네덜란드 모사 미트가 소 줄기세포를 배양해 만든 인공육 패티를 넣은 햄버거 가격은 무려 33만 달러, 우리 돈 약 3억 7천만 원에 달했다)에 이르러 비현실적이라는 약점이 있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맛·식감·풍미 면에서도 거의 차이가 없고 세포 배양육으로 만든 패티 가격도 개당 11달러까지 내려가는 등 급속히 상용화되고 있다.

미국 실리콘 밸리 푸드 테크 스타트업 ‘임파서블 푸즈’ 실험실에서 인조고기를 만드는 모습미국 실리콘 밸리 푸드 테크 스타트업 ‘임파서블 푸즈’ 실험실에서 인조고기를 만드는 모습

올해 초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 최대 국제가전박람회 'CES(Consumer Electronics Show) 2019'에서는 '임파서블 푸즈 (Impossible Foods)'라는 유명 푸드 테크 업체가 고기가 전혀 들어가지 않고도 기존의 햄버거와 똑같은 맛을 내는 '임파서블 버거 2.0'을 공개해 이목을 끌었다. 그리고 불과 몇 달이 지난 4월 1일 임파서블 푸즈는 패스트푸드 체인 버거킹과 손잡고 시범 제품을 발표했다. 이름하여 '임파서블 와퍼 Impossible Whopper.'

‘전 세계 육류 소비 감축’을 목표로 미국 스탠퍼드대 연구진이 창업한 임파서블 푸즈가 지난 1일 버거킹과 함께 출시한 ‘임파서블 와퍼’. 여기에 들어가는 패티는 소고기 대신 밀과 콩, 아몬드 등 순식물성 원료를 혼합해 만든 인조 패티이다. 코코넛오일과 해바라기오일로 육즙까지 재현하고 그릴에 구워 실제 고기의 맛과 색, 향까지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임파서블 푸즈 업체 웹사이트 화면 캡쳐]‘전 세계 육류 소비 감축’을 목표로 미국 스탠퍼드대 연구진이 창업한 임파서블 푸즈가 지난 1일 버거킹과 함께 출시한 ‘임파서블 와퍼’. 여기에 들어가는 패티는 소고기 대신 밀과 콩, 아몬드 등 순식물성 원료를 혼합해 만든 인조 패티이다. 코코넛오일과 해바라기오일로 육즙까지 재현하고 그릴에 구워 실제 고기의 맛과 색, 향까지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임파서블 푸즈 업체 웹사이트 화면 캡쳐]


놀라운 것은 이 '임파서블 와퍼'에는 (소)고기가 한 점도 들어가지 않았지만, 버거킹 단골손님들을 대상으로 한 블라인드 테스트에서 이것이 진짜 고기가 아닌 식물성 원료로 만들어진 인조고기라는 것을 눈치챈 사람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이다. 가격도 진짜 (소)고기 패티를 쓴 햄버거보다 1달러 정도 더 높다. 외신들은 '임파서블 와퍼'가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의 59개 버거킹 매장에서 선출시된 후 반응이 좋으면 미국 전역의 7,100여 버거킹 매장으로 확대될 계획이라고 전했다.


이 같은 '대체 고기'의 상용화가 탄력이 붙는 데는 이유가 있다. 바로 환경과 동물복지와 관련된 인식의 변화이다. 갈수록 증대되고 있는 '건강에 대한 관심'도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다. 임파서블 푸즈에 따르면 인조고기로 햄버거용 패티를 만들 경우 진짜 고기를 쓸 때보다 경작지를 96%가량 아낄 수 있고 온실가스도 10분의 1 수준으로 줄일 수 있으며 콜레스테롤 함유량도 0%라고 한다. 이러한 장점을 보고 빌 게이츠와 구글 벤처 같은 큰 손 투자자들은 일찌감치 육류대체식품 업체들에 투자를 결정했는데 이는 다시 기술 개발과 가격경쟁력 등의 측면에서 상용화를 가속화하는데 기여하고 있다.

 UN 환경보고서에 의하면 가축은 전 세계에서 나오는 온실가스의 15%를 배출한다. 또 식물성 고기나 세포 배양육 같은 '인조고기'는 동물을 죽이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윤리 이슈나 환경 측면에서 '미래를 위한 대안'으로 기대를 받고 있다. UN 환경보고서에 의하면 가축은 전 세계에서 나오는 온실가스의 15%를 배출한다. 또 식물성 고기나 세포 배양육 같은 '인조고기'는 동물을 죽이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윤리 이슈나 환경 측면에서 '미래를 위한 대안'으로 기대를 받고 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위기의식을 느낀 축산업계는 급기야 견제에 나섰다. '인조고기'를 '가짜 고기'로 단정하고 '고기(meat)'라는 표현을 쓰지 못하도록 적극적으로 로비하는가 하면 생산 과정을 소비자들이 알 권리가 있다면서 규제까지 요구하고 있다. 반면 인조고기 개발·생산 업체들과 환경단체들은 표기까지 간섭하고 제재하는 것은 '대체 육류'라는 새로운 산업의 성장을 억압하는 동시에 소비자들의 권리를 오히려 침해하는 것이라고 맞서고 있다. 대체 '대체 육류'를 '고기'라고 불러도 될까, 안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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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 안 들어간 '고기'는 '고기'일까 아닐까

발음이 얼마나 정확한가를 시험하자는 게 아니다. 최근 미국과 유럽에서는 '고기'라는 단어의 정의를 둘러싼 논쟁이 갈수록 뜨거워지고 있다. 현지시간 4일 영국 일간 가디언에 따르면 유럽의회는 버거와 스테이크, 소시지 같은 고기와 관련된 용어와 명칭을 실제 고기가 아닌 인조고기를 사용해 만든 식품에 쓸 수 없도록 하는 법안을 마련했다. 이 같은 용어와 명칭은 "전적으로 동물의 식용 가능한 부위에 한정한다(exclusively for edible parts of the animals)"는 게 법안의 골자이다. 유럽의회 농업위원회는 소속 의원 80%의 찬성을 얻어 법안을 채택, 5월 총선 이후 구성될 본회의에 정식 안건으로 상정할 예정이다. 이렇게 되면 '배지 버거(veggie burger, 고기를 안 쓴 버거)'는 '버거'라고 불릴 수 없고 '배지 디스크(veggie disc)'와 같이 전혀 다른 개념의 이름으로 불려야 한다.

현재 시판되고 있는 식물성 원료로 만든 ‘인조고기 패티’. 유럽에서는 이런 제품을 광고·판매할 때 ‘버거’라는 표현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법안을 마련해 추진 중이다.
유럽에서의 이번 '명명규제' 추진이 '고기로 만든 제품'과 관련해서라면 미국에서는 아예 '고기' 자체에 대한 논란이 거세다. 지난해 미국 미주리주는 이른바 '인조고기'를 '고기(meat)'로 부르지 못하게 하는 법률(육류광고법)을 제정하고 시행에 들어갔다. 전통 방식으로 사육하고 도축한 육류에 한해서만 '고기'라고 부를 수 있도록 법으로 못을 박은 것이다. 테네시주와 버지니아주, 와이오밍주, 네브래스카주, 미시시피주 같은 주요 농업지역 10여 개 주 정부들도 '인조고기(인공육)'를 광고·판매할 때 '고기'라는 표현을 쓸 수 없도록 하는 법안을 추진하고 있다. 일부 주에서는 이를 지키지 않을 경우 최대 1,000달러의 벌금을 부과하는 조항도 담고 있다.

미국과 유럽에서 이처럼 '고기와 유사한 제품'과 '고기로 만든 제품'을 둘러싼 명명 논쟁이 가열되고 있는 것은 그만큼 '인조고기' 제조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조고기'는 크게 콩 같은 식물성 재료를 이용해 만든 '식물성 고기'와 실제 소의 줄기세포를 배양해 만든 '세포 배양육'으로 나뉜다. 과거에는 맛의 측면에서 진짜 고기에 크게 못 미치고 식감도 현저히 차이가 날뿐더러 가격도 수억 원(2013년 네덜란드 모사 미트가 소 줄기세포를 배양해 만든 인공육 패티를 넣은 햄버거 가격은 무려 33만 달러, 우리 돈 약 3억 7천만 원에 달했다)에 이르러 비현실적이라는 약점이 있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맛·식감·풍미 면에서도 거의 차이가 없고 세포 배양육으로 만든 패티 가격도 개당 11달러까지 내려가는 등 급속히 상용화되고 있다.

미국 실리콘 밸리 푸드 테크 스타트업 ‘임파서블 푸즈’ 실험실에서 인조고기를 만드는 모습
올해 초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 최대 국제가전박람회 'CES(Consumer Electronics Show) 2019'에서는 '임파서블 푸즈 (Impossible Foods)'라는 유명 푸드 테크 업체가 고기가 전혀 들어가지 않고도 기존의 햄버거와 똑같은 맛을 내는 '임파서블 버거 2.0'을 공개해 이목을 끌었다. 그리고 불과 몇 달이 지난 4월 1일 임파서블 푸즈는 패스트푸드 체인 버거킹과 손잡고 시범 제품을 발표했다. 이름하여 '임파서블 와퍼 Impossible Whopper.'

‘전 세계 육류 소비 감축’을 목표로 미국 스탠퍼드대 연구진이 창업한 임파서블 푸즈가 지난 1일 버거킹과 함께 출시한 ‘임파서블 와퍼’. 여기에 들어가는 패티는 소고기 대신 밀과 콩, 아몬드 등 순식물성 원료를 혼합해 만든 인조 패티이다. 코코넛오일과 해바라기오일로 육즙까지 재현하고 그릴에 구워 실제 고기의 맛과 색, 향까지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임파서블 푸즈 업체 웹사이트 화면 캡쳐]

놀라운 것은 이 '임파서블 와퍼'에는 (소)고기가 한 점도 들어가지 않았지만, 버거킹 단골손님들을 대상으로 한 블라인드 테스트에서 이것이 진짜 고기가 아닌 식물성 원료로 만들어진 인조고기라는 것을 눈치챈 사람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이다. 가격도 진짜 (소)고기 패티를 쓴 햄버거보다 1달러 정도 더 높다. 외신들은 '임파서블 와퍼'가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의 59개 버거킹 매장에서 선출시된 후 반응이 좋으면 미국 전역의 7,100여 버거킹 매장으로 확대될 계획이라고 전했다.


이 같은 '대체 고기'의 상용화가 탄력이 붙는 데는 이유가 있다. 바로 환경과 동물복지와 관련된 인식의 변화이다. 갈수록 증대되고 있는 '건강에 대한 관심'도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다. 임파서블 푸즈에 따르면 인조고기로 햄버거용 패티를 만들 경우 진짜 고기를 쓸 때보다 경작지를 96%가량 아낄 수 있고 온실가스도 10분의 1 수준으로 줄일 수 있으며 콜레스테롤 함유량도 0%라고 한다. 이러한 장점을 보고 빌 게이츠와 구글 벤처 같은 큰 손 투자자들은 일찌감치 육류대체식품 업체들에 투자를 결정했는데 이는 다시 기술 개발과 가격경쟁력 등의 측면에서 상용화를 가속화하는데 기여하고 있다.

 UN 환경보고서에 의하면 가축은 전 세계에서 나오는 온실가스의 15%를 배출한다. 또 식물성 고기나 세포 배양육 같은 '인조고기'는 동물을 죽이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윤리 이슈나 환경 측면에서 '미래를 위한 대안'으로 기대를 받고 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위기의식을 느낀 축산업계는 급기야 견제에 나섰다. '인조고기'를 '가짜 고기'로 단정하고 '고기(meat)'라는 표현을 쓰지 못하도록 적극적으로 로비하는가 하면 생산 과정을 소비자들이 알 권리가 있다면서 규제까지 요구하고 있다. 반면 인조고기 개발·생산 업체들과 환경단체들은 표기까지 간섭하고 제재하는 것은 '대체 육류'라는 새로운 산업의 성장을 억압하는 동시에 소비자들의 권리를 오히려 침해하는 것이라고 맞서고 있다. 대체 '대체 육류'를 '고기'라고 불러도 될까, 안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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