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마와 싸우며 되살려낸 ‘옛 지도’…최현길이 남긴 유산

입력 2019.04.16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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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길. 생소한 이름이었습니다.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이 분의 이름으로 전시회가 열린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 전까지는요. 혹시나 해서 과거 기사를 찾아봤죠. 하지만 최현길이 누구인지 알려주는 쓸만한 정보는 없었습니다. 게다가 십여 년 전에 이미 돌아가신 분이었죠. 생전에도 그렇고 사후에도 철저하게 무명(無名)이었던 사람, 도서관 전시회를 통해 비로소 그 존재를 드러낸 최현길이란 분은 도대체 누굴까요.

옛 지도의 아름다움에 눈뜨다

고(故) 최현길(1952~2007) 선생은 고지도 필사자였습니다. 쉽게 말해 옛날 지도를 똑같이 베껴 그리는 일에 종사했다는 뜻이죠. 서울에서 태어나 줄곧 서울에서 산 서울 토박이라고 했습니다. 사회에서는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광고이벤트 회사의 사장이었다죠. 40대 중반까지 꽤 잘 나가는 사업가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뜻하지 않은 병마가 찾아옵니다. 고심 끝에 서울 생활을 접고 경기도 양평의 한 시골 마을에 자리를 잡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최현길 선생은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연구원이 간행한 고지도 영인본을 펼쳐보게 됩니다. 옛 지도의 아름다움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지도의 원본을 보고 싶어졌죠. 그런데 박물관 유리관 저 너머에 있는 지도는 아무 때나 편하게 볼 수 없는 '박제된 유물'이었습니다. 가까이 가 볼 수도, 함부로 만질 수도 없었죠. 그래서 생각했습니다. 저토록 아름다운 옛 지도를 누구나 마음껏 접하게 할 방법이 없을까….


옛 지도를 똑같이 다시 그리면 되겠다! 최현길 선생이 찾은 답은 이겁니다. 직접 고지도를 필사하기로 한 거죠. 이때부터 고지도 필사에 필사적으로 매달렸습니다. 누가 알아주고 말고는 상관없이 자신에게 부여한 사명을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선 하나하나부터 지도 본연의 색채, 글씨 하나에 이르기까지 옛 지도를 최대한 원본에 가깝게 되살려야 했습니다. 마치 그것만이 살아 있는 이유인 것처럼 말이죠.

"고인께서는 고지도 원본 위의 한자를 일필(一筆)로 똑같이 써 내려가기 위해 글씨 연습에 매일 아침 2시간씩 3년을 투자하셨습니다." 미망인 전소연 여사의 말입니다. 2007년 7월 31일 쉰여섯의 아까운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완성한 옛 지도 필사본은 100점이 채 안 됩니다. 2000년대 초반에 필사를 시작했으니 고인에게는 길게 봐도 7년 남짓한 시간밖에는 허락되지 않았죠.

남원부지도남원부지도

지도 자체가 하나의 회화 작품이더라

지도는 그림이다! 조선 후기에 그려진 회화식 지도를 보면 이런 말이 절로 튀어나옵니다. 지도라는 것이 본디 기록적 성격이 강하긴 하지만, 지도를 그린 옛사람은 결코 지도를 만드는 행위 자체에만 골몰하지 않았습니다. 기왕이면 보기 좋게, 그것 자체로 훌륭한 작품으로 만들어냈죠. 대표적인 것이 바로 위에 보이는 지도입니다. 슬쩍 보기만 해도 알록달록한 색채가 화려하게 이를 데 없습니다.

이 지도는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이 1996년에 원색으로 축소해 간행한 《조선후기 지방지도: 전라도편》에 수록된 '남원부지도'를 필사한 겁니다. 19세기 후반 병인·신미 두 양요 이후 흥선대원군이 국방 강화를 위해 명을 내려 만든 지도라고 합니다. 고을 중심지의 산줄기가 시작되는 지리산이 있는 동쪽을 위로 향해 그렸습니다. 마치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것처럼 남원 일대 지리를 꼼꼼하게 묘사해 놓았죠. 최현길 선생이 생에 최고의 수작으로 꼽은 이유를 알 만합니다.

전라좌도흥양현발포진진지고적전라좌도흥양현발포진진지고적

지도 이름이 좀 어렵습니다. 띄어서 쉽게 풀면 전라좌도 흥양현에 있는 해군기지인 발포진의 모습을 그린 지도라는 뜻입니다. 발포진(鉢浦鎭)은 19세기 후반 당시 전라좌수영이 관할하는 해군기지였습니다. 지금까지 그 이름이 남아서 현재 위치는 전남 고흥군 도화면 발포리에 해당합니다. 역시 위에 소개한 '남원부지도'와 마찬가지로 흥선대원군의 명에 따라 군사용으로 제작된 지도 가운데 하나입니다.

기지를 중심으로 빙 두른 산세가 수려한 한 폭의 산수화를 보는 듯하죠. 특히 저 푸른 바다 빛을 한 번 보세요. 천편일률적으로 푸른색을 입힌 것이 아니라 마치 물결치는 것처럼 묽기에 변화를 줬습니다. 산세를 그리고 채색한 솜씨로 보나 바다색에 저렇게 변화를 준 걸 보나 굉장히 뛰어난 기량을 지닌 화가가 그렸음이 틀림없습니다. 군사용치고는 너무 아름다운 것이 아닌가 싶게 말이죠.

‘동여도’를 펼쳐놓고 환하게 웃고 있는 최현길 선생 부부‘동여도’를 펼쳐놓고 환하게 웃고 있는 최현길 선생 부부

2년에 걸친 필사로 완성한 김정호의 '동여도'

경기도 양평에 머물던 최현길 선생은 2004년에 전남 순천에 있는 낙안읍성으로 거처를 옮깁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2005년까지 2년에 걸쳐 필생의 역작이라 할 초대형 지도의 필사본을 완성하게 됩니다. 지도 하면 떠오르는 인물, 저 유명한 고산자 김정호(金正浩, ?~?)의 '동여도'를 옛 모습과 똑같이 되살린 겁니다. 23장으로 이뤄진 '동여도'는 모두 연결하면 동서로 4m, 남북으로 7m에 이르는 초대형 지도입니다.

저 큰 지도를 완성해 방바닥에 펼쳐놓고 환하게 웃음 짓는 부부의 모습을 보니 한편으론 마음이 착잡해집니다. 누군가에게 일부러 시켜도 내켜 하지 않을 일을 뭐하러 저렇게 사서 고생 고생해가며 그렸을까. 애정이나 사명감이 없이는 절대로 해내지 못했을 일입니다. 국립중앙도서관의 고문헌 전문가 이기봉 학예연구사의 말을 빌리면 "크기뿐만 아니라 청록색 짙은 색감, 전국 모든 곳에 뻗어 내린 산·강·길과 지명의 정밀함이 보는 이를 압도하는 위대한 작품"입니다. 단연코 최현길이 남긴 최고의 걸작입니다.

국립중앙도서관 전시장 전경국립중앙도서관 전시장 전경

고인이 세상을 떠난 뒤 아내인 전소연 여사는 남편의 그 고귀한 뜻을 많은 이가 알 수 있도록 전시관을 꾸미기 위해 동분서주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성사 직전까지 간 적도 있지만 안타깝게도 끝내 무산됐다고 하는군요. 남편의 피와 땀과 눈물이 배어 있는 지도들은 그렇게 한동안 갈 곳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지난해 4월 극적으로 인연이 돼 최현길 선생이 필사한 옛 지도 35종 65점이 국립중앙도서관에 기탁됩니다.

기탁된 작품 가운데 21종 43점이 이번 전시를 통해 일반에 공개됐습니다. 훼손이 심한 2종을 뺀 나머지 지도는 고인이 생전에 그토록 바랐던 것처럼 유리 가림막 없이 전시되고 있습니다. 고인이 필사에 사용한 붓과 벼루 등의 유품도 함께 선보입니다. 아름다운 고지도를 좀 더 가까이 느낄 수 있었으면 했던 고인의 소망은 이렇게 작은 결실을 맺었습니다. 고지도 필사가 '최현길', 그 이름을 기억하는 뜻깊은 자리입니다.

■전시 정보
제목: 아름다운 필사, 최현길 고지도 기탁전
기간: 2019년 4월 30일까지
장소: 국립중앙도서관 본관 5층 고문헌전시실
작품: 고지도 21종 43점, 붓·벼루 등 유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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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병마와 싸우며 되살려낸 ‘옛 지도’…최현길이 남긴 유산
    • 입력 2019-04-16 11:24:56
    취재K
최현길. 생소한 이름이었습니다.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이 분의 이름으로 전시회가 열린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 전까지는요. 혹시나 해서 과거 기사를 찾아봤죠. 하지만 최현길이 누구인지 알려주는 쓸만한 정보는 없었습니다. 게다가 십여 년 전에 이미 돌아가신 분이었죠. 생전에도 그렇고 사후에도 철저하게 무명(無名)이었던 사람, 도서관 전시회를 통해 비로소 그 존재를 드러낸 최현길이란 분은 도대체 누굴까요.

옛 지도의 아름다움에 눈뜨다

고(故) 최현길(1952~2007) 선생은 고지도 필사자였습니다. 쉽게 말해 옛날 지도를 똑같이 베껴 그리는 일에 종사했다는 뜻이죠. 서울에서 태어나 줄곧 서울에서 산 서울 토박이라고 했습니다. 사회에서는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광고이벤트 회사의 사장이었다죠. 40대 중반까지 꽤 잘 나가는 사업가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뜻하지 않은 병마가 찾아옵니다. 고심 끝에 서울 생활을 접고 경기도 양평의 한 시골 마을에 자리를 잡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최현길 선생은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연구원이 간행한 고지도 영인본을 펼쳐보게 됩니다. 옛 지도의 아름다움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지도의 원본을 보고 싶어졌죠. 그런데 박물관 유리관 저 너머에 있는 지도는 아무 때나 편하게 볼 수 없는 '박제된 유물'이었습니다. 가까이 가 볼 수도, 함부로 만질 수도 없었죠. 그래서 생각했습니다. 저토록 아름다운 옛 지도를 누구나 마음껏 접하게 할 방법이 없을까….


옛 지도를 똑같이 다시 그리면 되겠다! 최현길 선생이 찾은 답은 이겁니다. 직접 고지도를 필사하기로 한 거죠. 이때부터 고지도 필사에 필사적으로 매달렸습니다. 누가 알아주고 말고는 상관없이 자신에게 부여한 사명을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선 하나하나부터 지도 본연의 색채, 글씨 하나에 이르기까지 옛 지도를 최대한 원본에 가깝게 되살려야 했습니다. 마치 그것만이 살아 있는 이유인 것처럼 말이죠.

"고인께서는 고지도 원본 위의 한자를 일필(一筆)로 똑같이 써 내려가기 위해 글씨 연습에 매일 아침 2시간씩 3년을 투자하셨습니다." 미망인 전소연 여사의 말입니다. 2007년 7월 31일 쉰여섯의 아까운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완성한 옛 지도 필사본은 100점이 채 안 됩니다. 2000년대 초반에 필사를 시작했으니 고인에게는 길게 봐도 7년 남짓한 시간밖에는 허락되지 않았죠.

남원부지도
지도 자체가 하나의 회화 작품이더라

지도는 그림이다! 조선 후기에 그려진 회화식 지도를 보면 이런 말이 절로 튀어나옵니다. 지도라는 것이 본디 기록적 성격이 강하긴 하지만, 지도를 그린 옛사람은 결코 지도를 만드는 행위 자체에만 골몰하지 않았습니다. 기왕이면 보기 좋게, 그것 자체로 훌륭한 작품으로 만들어냈죠. 대표적인 것이 바로 위에 보이는 지도입니다. 슬쩍 보기만 해도 알록달록한 색채가 화려하게 이를 데 없습니다.

이 지도는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이 1996년에 원색으로 축소해 간행한 《조선후기 지방지도: 전라도편》에 수록된 '남원부지도'를 필사한 겁니다. 19세기 후반 병인·신미 두 양요 이후 흥선대원군이 국방 강화를 위해 명을 내려 만든 지도라고 합니다. 고을 중심지의 산줄기가 시작되는 지리산이 있는 동쪽을 위로 향해 그렸습니다. 마치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것처럼 남원 일대 지리를 꼼꼼하게 묘사해 놓았죠. 최현길 선생이 생에 최고의 수작으로 꼽은 이유를 알 만합니다.

전라좌도흥양현발포진진지고적
지도 이름이 좀 어렵습니다. 띄어서 쉽게 풀면 전라좌도 흥양현에 있는 해군기지인 발포진의 모습을 그린 지도라는 뜻입니다. 발포진(鉢浦鎭)은 19세기 후반 당시 전라좌수영이 관할하는 해군기지였습니다. 지금까지 그 이름이 남아서 현재 위치는 전남 고흥군 도화면 발포리에 해당합니다. 역시 위에 소개한 '남원부지도'와 마찬가지로 흥선대원군의 명에 따라 군사용으로 제작된 지도 가운데 하나입니다.

기지를 중심으로 빙 두른 산세가 수려한 한 폭의 산수화를 보는 듯하죠. 특히 저 푸른 바다 빛을 한 번 보세요. 천편일률적으로 푸른색을 입힌 것이 아니라 마치 물결치는 것처럼 묽기에 변화를 줬습니다. 산세를 그리고 채색한 솜씨로 보나 바다색에 저렇게 변화를 준 걸 보나 굉장히 뛰어난 기량을 지닌 화가가 그렸음이 틀림없습니다. 군사용치고는 너무 아름다운 것이 아닌가 싶게 말이죠.

‘동여도’를 펼쳐놓고 환하게 웃고 있는 최현길 선생 부부
2년에 걸친 필사로 완성한 김정호의 '동여도'

경기도 양평에 머물던 최현길 선생은 2004년에 전남 순천에 있는 낙안읍성으로 거처를 옮깁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2005년까지 2년에 걸쳐 필생의 역작이라 할 초대형 지도의 필사본을 완성하게 됩니다. 지도 하면 떠오르는 인물, 저 유명한 고산자 김정호(金正浩, ?~?)의 '동여도'를 옛 모습과 똑같이 되살린 겁니다. 23장으로 이뤄진 '동여도'는 모두 연결하면 동서로 4m, 남북으로 7m에 이르는 초대형 지도입니다.

저 큰 지도를 완성해 방바닥에 펼쳐놓고 환하게 웃음 짓는 부부의 모습을 보니 한편으론 마음이 착잡해집니다. 누군가에게 일부러 시켜도 내켜 하지 않을 일을 뭐하러 저렇게 사서 고생 고생해가며 그렸을까. 애정이나 사명감이 없이는 절대로 해내지 못했을 일입니다. 국립중앙도서관의 고문헌 전문가 이기봉 학예연구사의 말을 빌리면 "크기뿐만 아니라 청록색 짙은 색감, 전국 모든 곳에 뻗어 내린 산·강·길과 지명의 정밀함이 보는 이를 압도하는 위대한 작품"입니다. 단연코 최현길이 남긴 최고의 걸작입니다.

국립중앙도서관 전시장 전경
고인이 세상을 떠난 뒤 아내인 전소연 여사는 남편의 그 고귀한 뜻을 많은 이가 알 수 있도록 전시관을 꾸미기 위해 동분서주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성사 직전까지 간 적도 있지만 안타깝게도 끝내 무산됐다고 하는군요. 남편의 피와 땀과 눈물이 배어 있는 지도들은 그렇게 한동안 갈 곳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지난해 4월 극적으로 인연이 돼 최현길 선생이 필사한 옛 지도 35종 65점이 국립중앙도서관에 기탁됩니다.

기탁된 작품 가운데 21종 43점이 이번 전시를 통해 일반에 공개됐습니다. 훼손이 심한 2종을 뺀 나머지 지도는 고인이 생전에 그토록 바랐던 것처럼 유리 가림막 없이 전시되고 있습니다. 고인이 필사에 사용한 붓과 벼루 등의 유품도 함께 선보입니다. 아름다운 고지도를 좀 더 가까이 느낄 수 있었으면 했던 고인의 소망은 이렇게 작은 결실을 맺었습니다. 고지도 필사가 '최현길', 그 이름을 기억하는 뜻깊은 자리입니다.

■전시 정보
제목: 아름다운 필사, 최현길 고지도 기탁전
기간: 2019년 4월 30일까지
장소: 국립중앙도서관 본관 5층 고문헌전시실
작품: 고지도 21종 43점, 붓·벼루 등 유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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