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이 할 수 있는 일…전쟁과 평화 사이에서

입력 2019.04.30 (14:49) 수정 2019.04.30 (2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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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경기도 파주시 판문점에는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1번’이 울려 퍼졌다. 1년 전 문재인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처음 만나 손을 맞잡고 넘나들었던 군사분계선 바로 앞에서 4·27 판문점선언 1주년을 맞아 마련된 기념행사 자리. '평화 퍼포먼스'라는 이름으로 열린 이번 행사는 저녁 7시 세계적 첼리스트 린 하렐(Lynn Harrell, 사진 위)의 연주로 시작되었다.

린 하렐이 연주한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1번 프렐류드는 지난 1989년 베를린 장벽 앞에서 러시아의 첼리스트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Mstislav Rostropovich)가 연주하던 곡으로도 유명하다. 이 음악은 분단의 상징이기도 한 T2(군사정전위원회 본회의실)와 T3(군사정전위원회 소회의실) 건물 옆에서 장병들이 비무장으로 근무를 서고 있는 가운데 흘러 퍼졌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1989년 11월 장벽 앞에서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즉흥 연주를 펼치고 있는 러시아의 첼리스트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Mstislav Rostropovich)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1989년 11월 장벽 앞에서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즉흥 연주를 펼치고 있는 러시아의 첼리스트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Mstislav Rostropovich)

분단과 갈등의 현장에서 치유와 화해의 염원을 담아 음악이 연주되는 경우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지만, 역사상 가장 극적으로 회자되는 장면은 1992년 당시 유고슬라비아의 수도였던 사라예보에서의 거리 연주다. 이후 '사라예보의 첼리스트(Cellist of Sarajevo)'로도 널리 알려진 베드란 스마일로비치(Vedran Smajlović)가 그 주인공. 베드란 스마일로비치는 1992년 5월 28일부터 22일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폭탄 공격으로 아수라장이 된 사라예보 시내의 같은 자리에서 말 그대로 죽음을 무릅쓰고 매일 ‘알비노니의 아다지오 G단조’를 연주했다.

1992년 6월 8일 사라예보 거리에서 성장(盛裝)을 한 채 첼로를 연주하고 있는 베드란 스마일로비치. 5월 27일 22명의 민간인이 폭탄 공격에 희생된 것을 기리고자 22일 동안 매일 같은 자리에서 ‘알비노니의 아다지오 G단조’를 연주했다. GEORGES GOBET / AFP - Getty Images, file1992년 6월 8일 사라예보 거리에서 성장(盛裝)을 한 채 첼로를 연주하고 있는 베드란 스마일로비치. 5월 27일 22명의 민간인이 폭탄 공격에 희생된 것을 기리고자 22일 동안 매일 같은 자리에서 ‘알비노니의 아다지오 G단조’를 연주했다. GEORGES GOBET / AFP - Getty Images, file

보스니아-헤르체코비나는 당시 유고연방 탈퇴를 선언한 후 내전에 휘말려 있었고 1992년 5월 27일에는 유고연방으로부터의 탈퇴를 반대하는 세르비아계 민병대가 쏜 폭탄이 사라예보 한복판에 떨어지면서 먹을 빵을 사기 위해 줄을 서 있던 무고한 시민 22명이 목숨을 잃는 참사가 발생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사라예보 오페라의 수석 첼리스트로 활동했었던 스마일로비치는 그 때 사건이 벌어진 빵집 근처에 살고 있어서 이 모든 광경을 가까이서 지켜보게 되었고, 사건이 있었던 바로 다음 날 22명의 목숨을 앗아간 바로 그 자리에 자신의 첼로를 짊어지고 나와 연주를 하기 시작했다.

세르비아계 민병대들이 언제든 총을 쏠 수 있고, 언제 또다시 포탄이 날아들어 목숨을 잃을 지 모르는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스마일로비치의 연주는 하루도 빠짐없이 계속되었고 어느새 불안과 절망 속에서 매일을 떨며 지내야 했던 사라예보 시민들에게 전쟁의 슬픔을 달래주고 위안을 주는 '평화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후에 그는 '참사 당시 정치인도 군인도 아닌 그저 한 명의 민간인으로서 엄청난 무력감에 빠져 허우적댔지만, 이윽고 음악이자 악기가 자신의 무기라는 것을 깨닫고, 말로는 할 수 없는 마음과 마음으로의 소통을 음악으로써 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베드란 스마일로비치는 이듬해인 1993년 북아일랜드로 이주할 때까지 사라예보의 여러 곳을 찾아다니며 음악으로 사람들을 위로하고 희망을 주었다.

1992년 내전으로 파괴된 사라예보의 국립 도서관에서 첼로를 연주하고 있는 베드란 스마일로비치 Photo by Mikhail Evstafiev via Wikimedia Commons1992년 내전으로 파괴된 사라예보의 국립 도서관에서 첼로를 연주하고 있는 베드란 스마일로비치 Photo by Mikhail Evstafiev via Wikimedia Commons

또 많은 음악가들이 그로부터 영감을 받았는데 특히 영국의 작곡가인 데이비드 와일드는 〈사라예보의 첼리스트〉라는 무반주 첼로곡을 작곡해 스마일로비치에게 헌정하기도 했다. 1994년 맨체스터에서 열렸던 국제 첼로 페스티벌에서는 첼리스트 요요마가 그 음악을 연주했는데 당시 현장에 있었던 피아니스트 폴 설리번은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기고한 글에서 그 순간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조용히, 미처 알아차리지도 못한 사이 음악은 시작되었고 웅성거리던 연주장에 스며들었다. 그리고 음악은 죽음과 그것이 만들어내는 불길한 메아리로 가득한 어둡고 텅 빈 우주를 만들어냈다. 음악은 서서히, 그러나 끊임없이 고뇌하고 고함치며 격렬한 열정으로 우리 모두를 사로잡았고 마침내 죽음 직전의 공허한 마지막 한숨으로 변해갔다. 그러고는 다시 시작했던 그 순간처럼 고요함으로 돌아갔다.
연주를 끝내고도 요요마는 여전히 첼로에 고개를 숙인 채 앉아 있었고 활을 든 그의 손도 여전히 첼로에 놓여 있었다. 연주장에 있던 그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고 오랫동안 그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우리는 마치 소름 끼치는 학살을 직접 목격한 듯 그렇게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한 채 앉아 있었다. 여전히 침묵에 잠겨 있는 연주장에서 요요마가 마침내 의자에서 일어나 관객석을 바라보며 손을 뻗었다. 관객석에 앉아 있는 누군가를 부르는 요요마의 손길을 따라 모든 눈길이 모였고, 그 손길이 부르는 사람이 베드란 스마일로비치, 바로 사라예보의 첼리스트 그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한 청중들은 표현할 길 없는 충격을 받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스마일로비치는 요요마가 있던 무대 쪽으로 걸어갔고 무대에서 내려온 요요마는 통로로 내려가 두 팔을 벌려 스마일로비치를 껴안았다.
공연장에 있던 사람들은 그 광경을 보기 위해 모두 일어났고 감동에 겨워 눈물을 흘리고 박수를 치며 귀가 먹먹할 정도로 환호했다. 정말 믿을 수 없는 드라마였다. 그리고 그러한 감동의 한가운데에는 눈물을 흘리며 부둥켜안고 있는 두 사람이 있었다. 부드럽고 세련된 클래식 음악의 왕자로서 빈틈없는 연주와 외모를 보여주었던 요요마가 있었고, 그의 앞에는 사라예보에서 금방 빠져나와 여전히 얼룩투성이의 낡고 주름 진 가죽 점퍼를 입은 스마일로비치가 있었다. 그토록 많은 눈물에 젖고 고통과 상처에 지쳐 실제보다 더 나이 들어 보이는 그의 얼굴은 빗지 않은 긴 머리와 수염으로 뒤덮여 있었다."


사라예보의 한 공동묘지에서 연주 중인 베드란 스마일로비치사라예보의 한 공동묘지에서 연주 중인 베드란 스마일로비치

몇 해 전 이탈리아에서 열린 프레미오 파가니니 바이올린 콩쿠르에서 한국인 최초로 우승한 바이올리니스트 양인모는 지난해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자문한 적이 있다. "(나는) 이 연주를 왜 해야 하는지 생각하는 걸 좋아한다. 모든 사람들이 클래식 음악을 알 필요는 없지만, 연주자가 한 명의 사회구성원으로서 자신이 하는 일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자문할 필요는 있다. 미국에서 지내는 집이 소방서 바로 옆인데 사이렌 소리를 하루에도 10번은 넘게 듣는다. 그럴 때마다 '밖에서는 저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데 내가 하는 일은 사회와 무슨 관련이 있을까' 생각한다. 음악의 뒤에 깔린 메시지와 태도 등을 최대한 확고하게 다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청중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고 음악이 품는 의미가 더 풍성해진다."

음악회장에서보다는 바깥에서 펼쳐지는 삶의 현장에서, 평상시보다는 전시와도 같은 결정적인 순간에 어쩌면 음악은 그 힘이 극대화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그게 바로 그런 순간에 사람들이 음악을 떠올리고 음악가를 초대하는 이유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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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음악’이 할 수 있는 일…전쟁과 평화 사이에서
    • 입력 2019-04-30 14:49:18
    • 수정2019-04-30 20:59:45
    취재K

지난 주말 경기도 파주시 판문점에는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1번’이 울려 퍼졌다. 1년 전 문재인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처음 만나 손을 맞잡고 넘나들었던 군사분계선 바로 앞에서 4·27 판문점선언 1주년을 맞아 마련된 기념행사 자리. '평화 퍼포먼스'라는 이름으로 열린 이번 행사는 저녁 7시 세계적 첼리스트 린 하렐(Lynn Harrell, 사진 위)의 연주로 시작되었다.

린 하렐이 연주한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1번 프렐류드는 지난 1989년 베를린 장벽 앞에서 러시아의 첼리스트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Mstislav Rostropovich)가 연주하던 곡으로도 유명하다. 이 음악은 분단의 상징이기도 한 T2(군사정전위원회 본회의실)와 T3(군사정전위원회 소회의실) 건물 옆에서 장병들이 비무장으로 근무를 서고 있는 가운데 흘러 퍼졌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1989년 11월 장벽 앞에서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즉흥 연주를 펼치고 있는 러시아의 첼리스트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Mstislav Rostropovich)
분단과 갈등의 현장에서 치유와 화해의 염원을 담아 음악이 연주되는 경우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지만, 역사상 가장 극적으로 회자되는 장면은 1992년 당시 유고슬라비아의 수도였던 사라예보에서의 거리 연주다. 이후 '사라예보의 첼리스트(Cellist of Sarajevo)'로도 널리 알려진 베드란 스마일로비치(Vedran Smajlović)가 그 주인공. 베드란 스마일로비치는 1992년 5월 28일부터 22일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폭탄 공격으로 아수라장이 된 사라예보 시내의 같은 자리에서 말 그대로 죽음을 무릅쓰고 매일 ‘알비노니의 아다지오 G단조’를 연주했다.

1992년 6월 8일 사라예보 거리에서 성장(盛裝)을 한 채 첼로를 연주하고 있는 베드란 스마일로비치. 5월 27일 22명의 민간인이 폭탄 공격에 희생된 것을 기리고자 22일 동안 매일 같은 자리에서 ‘알비노니의 아다지오 G단조’를 연주했다. GEORGES GOBET / AFP - Getty Images, file
보스니아-헤르체코비나는 당시 유고연방 탈퇴를 선언한 후 내전에 휘말려 있었고 1992년 5월 27일에는 유고연방으로부터의 탈퇴를 반대하는 세르비아계 민병대가 쏜 폭탄이 사라예보 한복판에 떨어지면서 먹을 빵을 사기 위해 줄을 서 있던 무고한 시민 22명이 목숨을 잃는 참사가 발생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사라예보 오페라의 수석 첼리스트로 활동했었던 스마일로비치는 그 때 사건이 벌어진 빵집 근처에 살고 있어서 이 모든 광경을 가까이서 지켜보게 되었고, 사건이 있었던 바로 다음 날 22명의 목숨을 앗아간 바로 그 자리에 자신의 첼로를 짊어지고 나와 연주를 하기 시작했다.

세르비아계 민병대들이 언제든 총을 쏠 수 있고, 언제 또다시 포탄이 날아들어 목숨을 잃을 지 모르는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스마일로비치의 연주는 하루도 빠짐없이 계속되었고 어느새 불안과 절망 속에서 매일을 떨며 지내야 했던 사라예보 시민들에게 전쟁의 슬픔을 달래주고 위안을 주는 '평화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후에 그는 '참사 당시 정치인도 군인도 아닌 그저 한 명의 민간인으로서 엄청난 무력감에 빠져 허우적댔지만, 이윽고 음악이자 악기가 자신의 무기라는 것을 깨닫고, 말로는 할 수 없는 마음과 마음으로의 소통을 음악으로써 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베드란 스마일로비치는 이듬해인 1993년 북아일랜드로 이주할 때까지 사라예보의 여러 곳을 찾아다니며 음악으로 사람들을 위로하고 희망을 주었다.

1992년 내전으로 파괴된 사라예보의 국립 도서관에서 첼로를 연주하고 있는 베드란 스마일로비치 Photo by Mikhail Evstafiev via Wikimedia Commons
또 많은 음악가들이 그로부터 영감을 받았는데 특히 영국의 작곡가인 데이비드 와일드는 〈사라예보의 첼리스트〉라는 무반주 첼로곡을 작곡해 스마일로비치에게 헌정하기도 했다. 1994년 맨체스터에서 열렸던 국제 첼로 페스티벌에서는 첼리스트 요요마가 그 음악을 연주했는데 당시 현장에 있었던 피아니스트 폴 설리번은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기고한 글에서 그 순간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조용히, 미처 알아차리지도 못한 사이 음악은 시작되었고 웅성거리던 연주장에 스며들었다. 그리고 음악은 죽음과 그것이 만들어내는 불길한 메아리로 가득한 어둡고 텅 빈 우주를 만들어냈다. 음악은 서서히, 그러나 끊임없이 고뇌하고 고함치며 격렬한 열정으로 우리 모두를 사로잡았고 마침내 죽음 직전의 공허한 마지막 한숨으로 변해갔다. 그러고는 다시 시작했던 그 순간처럼 고요함으로 돌아갔다.
연주를 끝내고도 요요마는 여전히 첼로에 고개를 숙인 채 앉아 있었고 활을 든 그의 손도 여전히 첼로에 놓여 있었다. 연주장에 있던 그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고 오랫동안 그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우리는 마치 소름 끼치는 학살을 직접 목격한 듯 그렇게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한 채 앉아 있었다. 여전히 침묵에 잠겨 있는 연주장에서 요요마가 마침내 의자에서 일어나 관객석을 바라보며 손을 뻗었다. 관객석에 앉아 있는 누군가를 부르는 요요마의 손길을 따라 모든 눈길이 모였고, 그 손길이 부르는 사람이 베드란 스마일로비치, 바로 사라예보의 첼리스트 그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한 청중들은 표현할 길 없는 충격을 받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스마일로비치는 요요마가 있던 무대 쪽으로 걸어갔고 무대에서 내려온 요요마는 통로로 내려가 두 팔을 벌려 스마일로비치를 껴안았다.
공연장에 있던 사람들은 그 광경을 보기 위해 모두 일어났고 감동에 겨워 눈물을 흘리고 박수를 치며 귀가 먹먹할 정도로 환호했다. 정말 믿을 수 없는 드라마였다. 그리고 그러한 감동의 한가운데에는 눈물을 흘리며 부둥켜안고 있는 두 사람이 있었다. 부드럽고 세련된 클래식 음악의 왕자로서 빈틈없는 연주와 외모를 보여주었던 요요마가 있었고, 그의 앞에는 사라예보에서 금방 빠져나와 여전히 얼룩투성이의 낡고 주름 진 가죽 점퍼를 입은 스마일로비치가 있었다. 그토록 많은 눈물에 젖고 고통과 상처에 지쳐 실제보다 더 나이 들어 보이는 그의 얼굴은 빗지 않은 긴 머리와 수염으로 뒤덮여 있었다."


사라예보의 한 공동묘지에서 연주 중인 베드란 스마일로비치
몇 해 전 이탈리아에서 열린 프레미오 파가니니 바이올린 콩쿠르에서 한국인 최초로 우승한 바이올리니스트 양인모는 지난해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자문한 적이 있다. "(나는) 이 연주를 왜 해야 하는지 생각하는 걸 좋아한다. 모든 사람들이 클래식 음악을 알 필요는 없지만, 연주자가 한 명의 사회구성원으로서 자신이 하는 일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자문할 필요는 있다. 미국에서 지내는 집이 소방서 바로 옆인데 사이렌 소리를 하루에도 10번은 넘게 듣는다. 그럴 때마다 '밖에서는 저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데 내가 하는 일은 사회와 무슨 관련이 있을까' 생각한다. 음악의 뒤에 깔린 메시지와 태도 등을 최대한 확고하게 다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청중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고 음악이 품는 의미가 더 풍성해진다."

음악회장에서보다는 바깥에서 펼쳐지는 삶의 현장에서, 평상시보다는 전시와도 같은 결정적인 순간에 어쩌면 음악은 그 힘이 극대화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그게 바로 그런 순간에 사람들이 음악을 떠올리고 음악가를 초대하는 이유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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