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어떻게 남의 삶을 ‘천형’이라고 부르는가”…수필가 장영희의 한마디

입력 2019.05.11 (13:25) 수정 2019.05.11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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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장애로 천형(天刑) 같은 삶을 극복하고 일어선 이 시대 희망의 상징 장영희 교수'

팩트를 담는 것이 기사라고 하지만 생각보다 기사에는 비유적인 표현이 많습니다. 길게 설명하기보다 '무엇무엇 같다.'고 하는 게 전달이 더 쉬울 거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비유는 의도치 않은 오해를 살 때가 적지 않습니다. 누군가 대화를 하다 주제와는 상관없이 비유적인 표현에 감정이 상해본 경험 있으실 겁니다.

생전의 장영희 교수를 인터뷰한, 맨 위의 기사 제목도 그렇습니다. 지금은 '눈먼 돈'처럼 예의 없는 표현은 쓰지 않도록 언론 스스로 노력을 하고 있지만, '천형'이라는 비유를 장애인들에게 별생각 없이 쓰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한자어로 들으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하늘이 내린 벌'이라는 뜻입니다. 장애인이 왜 벌을 받았다고 생각해야 할까요? 그냥 벌도 아니고 삶 자체가 형벌이라뇨.

장 교수도 2007년 어느 잡지에 실린 저 제목에 불쾌해 했다고 합니다. 인터뷰에 응한 조건이 '암 환자 장영희'가 아닌 '인간 장영희'에 초점을 맞춰달라는 것이었다고 하니 화가 나는 것도 당연했을 겁니다. 그때의 기억을 장 교수는 이렇게 수필집에 담았습니다.

어떻게 감히 남의 삶을 '천형'이라고 부르는가. 맞다. 나는 1급 신체 장애인이고, 암 투병을 한다. 그렇지만 이제껏 한 번도 내 삶이 천형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솔직히 난 늘 내 옆을 지키는 목발을 유심히 보거나 남들이 '장애인 교수' 운운할 때에야 '아 참, 내가 장애인이었지'하고 새삼 깨닫는다.
- 수필집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에서


월간 <샘터>에 기고했던 글과 수필집으로 많은 이에게 사랑받았던 장영희 교수가 세상을 떠난 지 꼭 10년 되는 지난 9일, 고인이 강의하던 서강대에서 추모 낭독회가 열렸습니다. 이 자리에는 같은 수필가로 만난 인연으로 고인과 절친했던 이해인 수녀도 참석했습니다. 2008년부터 암 투병을 하면서 대외활동을 잘 하지 않고 있는 이해인 수녀는 부산에서 서울까지 먼 걸음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이해인 수녀는 "우울함에 빠지려고 할 때 장 교수님의 웃음소리가 생각이 나면서 보고 싶다."면서 건강한 웃음을 지어 보였습니다. 항상 밝은 모습이었던 장 교수를 생각하면 "추모 글을 읽으면서도 눈물이 나는 게 아니라 웃음이 나온다."고 말했습니다. 장 교수를 추모하는 자리이기도 했지만, 아이처럼 맑은 미소를 지어 보이는 이해인 수녀의 모습도 반가웠습니다.

여섯 살짜리 조카가 뜰에서 놀다가 무릎을 다쳤다. 동생은 눈물을 글썽이고 동생 남편은 연고 찾는다고 분주했다. 그때 어머니가 차분하게 말씀하셨다.

"그렇게 야단법석 떨지 마라. 애들은 뼈만 추리면 산다."

성품이 온화한 어머니에서 어울리지 않는 과한 말씀이다 싶어 슬며시 웃음이 났지만, 얼핏 그것이 어머니의 삶의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운명이 뒤통수를 쳐서 살을 다 깎아 먹고 뼈만 남는다 해도 울지 마라. 기본만 있으면 다시 일어날 수 있다.
- 수필집 <그러나 내겐 당신이 있습니다>에서


낭독회에서 이 글귀를 듣는 순간, 짧고 유려한 문장으로 울림을 줬던 장 교수의 필력이 어머니에게서 왔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주가 무릎을 다쳤는데 저렇게 차분하게 얘기할 수 있는 할머니가 몇이나 될까요. 냉정한 분이라고 하기엔 한 살 때 소아마비로 걸음이 불편해진 장 교수가 대학을 마치고 유학을 다녀와 강단에 설 때까지 평생 뒷바라지했던 어머니였습니다.

사진제공: 한영희사진제공: 한영희

낭독회에 참석한 장 교수의 오빠 장병우 씨를 인터뷰하면서 '장 교수님이 다른 장애인이나 암 환자를 포함해 많은 분에게 많은 공감을 받으셨는데요.'라고 운을 뗐습니다. 순간, 조금 굳은 표정으로 "나는 우리 영희가 장애인이라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습니다."라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맨 위의 제목처럼 인터뷰 대상자에게 결례를 범했다는 마음과 함께 언제나 긍정적이고 당당했던 장 교수의 면모가 가족 모두의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장 교수의 유작이 된 수필집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이 출간 10년 만에 100쇄를 넘겼습니다. 세상을 떠난 지 10년이면 짧지 않은 시간이지만 여전히 고인을 기억하는 독자들이 적지 않다는 뜻일 겁니다. 제목은 장 교수가 두 번째 암 투병을 마치고 다시 강단에 섰던 2007년에 지은 것으로, 김종삼 시인의 <어부>에 나오는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된다'는 글귀에서 따온 것입니다. 쉽지 않지만, 평범한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것이 기적이고 다시 내일을 살아가는 기적을 만드는 내공이 된다는 장 교수의 말은, 장 교수 본인에게도 글을 읽는 모든 사람에게도 다시 웃을 수 있는 힘이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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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5-11 13:25:29
    • 수정2019-05-11 15:21:46
    취재후·사건후
'신체장애로 천형(天刑) 같은 삶을 극복하고 일어선 이 시대 희망의 상징 장영희 교수'

팩트를 담는 것이 기사라고 하지만 생각보다 기사에는 비유적인 표현이 많습니다. 길게 설명하기보다 '무엇무엇 같다.'고 하는 게 전달이 더 쉬울 거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비유는 의도치 않은 오해를 살 때가 적지 않습니다. 누군가 대화를 하다 주제와는 상관없이 비유적인 표현에 감정이 상해본 경험 있으실 겁니다.

생전의 장영희 교수를 인터뷰한, 맨 위의 기사 제목도 그렇습니다. 지금은 '눈먼 돈'처럼 예의 없는 표현은 쓰지 않도록 언론 스스로 노력을 하고 있지만, '천형'이라는 비유를 장애인들에게 별생각 없이 쓰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한자어로 들으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하늘이 내린 벌'이라는 뜻입니다. 장애인이 왜 벌을 받았다고 생각해야 할까요? 그냥 벌도 아니고 삶 자체가 형벌이라뇨.

장 교수도 2007년 어느 잡지에 실린 저 제목에 불쾌해 했다고 합니다. 인터뷰에 응한 조건이 '암 환자 장영희'가 아닌 '인간 장영희'에 초점을 맞춰달라는 것이었다고 하니 화가 나는 것도 당연했을 겁니다. 그때의 기억을 장 교수는 이렇게 수필집에 담았습니다.

어떻게 감히 남의 삶을 '천형'이라고 부르는가. 맞다. 나는 1급 신체 장애인이고, 암 투병을 한다. 그렇지만 이제껏 한 번도 내 삶이 천형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솔직히 난 늘 내 옆을 지키는 목발을 유심히 보거나 남들이 '장애인 교수' 운운할 때에야 '아 참, 내가 장애인이었지'하고 새삼 깨닫는다.
- 수필집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에서


월간 <샘터>에 기고했던 글과 수필집으로 많은 이에게 사랑받았던 장영희 교수가 세상을 떠난 지 꼭 10년 되는 지난 9일, 고인이 강의하던 서강대에서 추모 낭독회가 열렸습니다. 이 자리에는 같은 수필가로 만난 인연으로 고인과 절친했던 이해인 수녀도 참석했습니다. 2008년부터 암 투병을 하면서 대외활동을 잘 하지 않고 있는 이해인 수녀는 부산에서 서울까지 먼 걸음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이해인 수녀는 "우울함에 빠지려고 할 때 장 교수님의 웃음소리가 생각이 나면서 보고 싶다."면서 건강한 웃음을 지어 보였습니다. 항상 밝은 모습이었던 장 교수를 생각하면 "추모 글을 읽으면서도 눈물이 나는 게 아니라 웃음이 나온다."고 말했습니다. 장 교수를 추모하는 자리이기도 했지만, 아이처럼 맑은 미소를 지어 보이는 이해인 수녀의 모습도 반가웠습니다.

여섯 살짜리 조카가 뜰에서 놀다가 무릎을 다쳤다. 동생은 눈물을 글썽이고 동생 남편은 연고 찾는다고 분주했다. 그때 어머니가 차분하게 말씀하셨다.

"그렇게 야단법석 떨지 마라. 애들은 뼈만 추리면 산다."

성품이 온화한 어머니에서 어울리지 않는 과한 말씀이다 싶어 슬며시 웃음이 났지만, 얼핏 그것이 어머니의 삶의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운명이 뒤통수를 쳐서 살을 다 깎아 먹고 뼈만 남는다 해도 울지 마라. 기본만 있으면 다시 일어날 수 있다.
- 수필집 <그러나 내겐 당신이 있습니다>에서


낭독회에서 이 글귀를 듣는 순간, 짧고 유려한 문장으로 울림을 줬던 장 교수의 필력이 어머니에게서 왔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주가 무릎을 다쳤는데 저렇게 차분하게 얘기할 수 있는 할머니가 몇이나 될까요. 냉정한 분이라고 하기엔 한 살 때 소아마비로 걸음이 불편해진 장 교수가 대학을 마치고 유학을 다녀와 강단에 설 때까지 평생 뒷바라지했던 어머니였습니다.

사진제공: 한영희
낭독회에 참석한 장 교수의 오빠 장병우 씨를 인터뷰하면서 '장 교수님이 다른 장애인이나 암 환자를 포함해 많은 분에게 많은 공감을 받으셨는데요.'라고 운을 뗐습니다. 순간, 조금 굳은 표정으로 "나는 우리 영희가 장애인이라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습니다."라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맨 위의 제목처럼 인터뷰 대상자에게 결례를 범했다는 마음과 함께 언제나 긍정적이고 당당했던 장 교수의 면모가 가족 모두의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장 교수의 유작이 된 수필집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이 출간 10년 만에 100쇄를 넘겼습니다. 세상을 떠난 지 10년이면 짧지 않은 시간이지만 여전히 고인을 기억하는 독자들이 적지 않다는 뜻일 겁니다. 제목은 장 교수가 두 번째 암 투병을 마치고 다시 강단에 섰던 2007년에 지은 것으로, 김종삼 시인의 <어부>에 나오는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된다'는 글귀에서 따온 것입니다. 쉽지 않지만, 평범한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것이 기적이고 다시 내일을 살아가는 기적을 만드는 내공이 된다는 장 교수의 말은, 장 교수 본인에게도 글을 읽는 모든 사람에게도 다시 웃을 수 있는 힘이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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