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트체크K] “대통령 직권으로 화폐단위 변경”…가능할까?

입력 2019.05.17 (09:07) 수정 2019.05.17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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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디노미네이션(화폐단위 변경)은 국회 동의가 필요 없다. 대통령 직권으로 언제든 시행할 수 있다."

유튜브 방송과 소셜미디어에서 현 정부가 리디노미네이션을 추진하고 있다는 의혹과 함께 제기된 주장이다. "대통령이 한국은행 총재에게 '시행하라'고 하면 바로 시행이 가능하다."는 주장도 나왔다.

리디노미네이션은 지난 3월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업무보고에 참석한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관련 질문에 대해 "논의를 할 때가 됐다고 생각은 한다."고 답하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 총재가 이후 "원론적 차원의 답변"이라며 추진 계획이 전혀 없다고 밝혔고,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청와대 핵심 관계자도 추진 의사가 없음을 재차 밝혔지만, 일각에선 리디노미네이션 추진에 대한 의혹이 사그러들지 않고 있다. 이런 가운데 "리디노미네이션이 대통령 직권으로 언제든 시행할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리디노미네이션을 우려하는 측의 불안감을 키우고 있다.

리디노미네이션은 정말 대통령 직권으로 추진할 수 있는 것일까?

관련 유튜브 방송 내용.관련 유튜브 방송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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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자 뜻에 따라 전격 추진된 과거 두 번의 사례

1945년 광복 이후 두 차례의 리디노미네이션이 전격 단행됐다.

한국전쟁 막바지인 1953년 2월 이승만 대통령은 [대통령긴급명령 제13호]를 공표해 화폐단위를 '원'에서 '환'으로 변경하고 화폐액면가를 100대1로 절하했다. 이는 전쟁으로 생산활동이 크게 위축되고 장기간 거액의 군사비 지출로 인플레이션 압력이 커지면서 통화의 대외가치가 폭락한 데 따른 조치였다.

2차 리디노미네이션은 1962년 6월에 5.16 군사정부에 의해 단행됐다.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긴급통화조치법]을 통해 화폐단위를 '환'에서 다시 '원'으로 바꾸고 액면가를 10분의 1로 조정했다. 국회를 해산한 군사정부는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관련 법을 제정하고 통과시켰다. 물가를 안정시키고 지하자금을 양지로 끌어내 '경제개발계획'에 필요한 자금으로 활용하려는 목적이었다. 이 조치로 경제적으로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지만, 현행 원화체계를 도입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과거 두 차례에 걸쳐 이뤄진 리디노미네이션은 전쟁과 독재정권 하에서 기습적으로 이뤄진 매우 특수한 경우다. "대통령 직권으로 언제든 시행할 수 있다"는 주장은 이 과거 사례를 근거로 한 것으로 보이지만, 과거의 특수한 상황을 현재 상황에 그대로 적용할 순 없다.

이와 관련해 한국은행 관계자는 "과거에 특수상황이 반영돼 기습적으로 진행됐지만, 정상적인 법치국가에선 사회의 불확실성과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 적법한 절차를 거쳐 장기간 단계적으로 추진한다."고 설명했다.

국회 의결 필요한 리디노미네이션

더군다나 일각의 주장과 달리 리디노미네이션은 국회 의결을 거쳐야 한다.

대한민국의 화폐단위를 규정한 한국은행법을 개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현행 한국은행법 47조는 1원을 100전으로 규정하고 있다. 화폐단위를 바꾸려면 이 부분을 개정해야 한다.


한국은행 관계자는 "화폐단위를 바꾸는 법안을 기획재정부가 발의하면 국회의결을 거쳐 시행하게 된다."면서 "대통령이 직권으로 시행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발의된 법안이 법안 심사와 본회의 의결을 통과해야 하는 만큼 정부가 '어느날 갑자기 전격적으로' 리디노미네이션을 발표한다거나 대통령이 한국은행 총재에게 전화해 '당장 시행하라!'고 명령할 순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리디노미네이션(화폐단위 변경)은 국회 동의가 필요 없다. 대통령 직권으로 언제든 시행할 수 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리디노미네이션이란?

1,000원을 1원으로 바꾸는 등 화폐 단위를 바꾸는 일이다. 화폐의 가치를 바꾸는 '화폐개혁'과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리디노미네이션은 단순히 화폐의 단위만 바꾸는 것이어서 그것 자체로 화폐의 가치 자체가 올라가거나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잊을만하면 관련 논의가 나오는 이유는 국제사회에서 대한민국의 화폐단위가 확대된 경제규모에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오기 때문이다. OECD 34개 회원국 가운데 1달러 교환 비율이 1,000원 이상 네 자릿수인 나라는 대한민국 뿐이다. 그렇다 보니 단위가 너무 커서 국제 금융시장에서 거래하기 불편하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또 증권, 주식 거래량 등을 표기할 때 0이 16개로 경(京) 단위를 돌파해 기업 회계 등에서 장부 처리하는 데 불편하다는 점도 문제점으로 지적돼 왔다.

다만, 리디노미네이션의 순기능과 역기능을 두고 상반된 의견이 충돌하는 상황이다.

경제·금융 거래 규모 확대에 따른 불편 해소, 자국 통화의 대외적 위상 제고, 구매력 회복 등이 순기능으로 꼽히는 반면, 화폐단위 절상으로 인한 인플레이션 확대, ATM기와 전산시스템 교체 등에 드는 천문학적 비용, 화폐단위 변경에 따른 국민 혼란 등이 대표적인 역기능으로 꼽힌다.

때문에 리디노미네이션을 추진할 경우 사회·경제적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장기간 공론화 과정을 거쳐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취재 지원: 팩트체크 인턴기자 최다원 dw082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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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팩트체크K] “대통령 직권으로 화폐단위 변경”…가능할까?
    • 입력 2019-05-17 09:07:37
    • 수정2019-05-17 10:49:32
    팩트체크K
"리디노미네이션(화폐단위 변경)은 국회 동의가 필요 없다. 대통령 직권으로 언제든 시행할 수 있다."

유튜브 방송과 소셜미디어에서 현 정부가 리디노미네이션을 추진하고 있다는 의혹과 함께 제기된 주장이다. "대통령이 한국은행 총재에게 '시행하라'고 하면 바로 시행이 가능하다."는 주장도 나왔다.

리디노미네이션은 지난 3월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업무보고에 참석한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관련 질문에 대해 "논의를 할 때가 됐다고 생각은 한다."고 답하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 총재가 이후 "원론적 차원의 답변"이라며 추진 계획이 전혀 없다고 밝혔고,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청와대 핵심 관계자도 추진 의사가 없음을 재차 밝혔지만, 일각에선 리디노미네이션 추진에 대한 의혹이 사그러들지 않고 있다. 이런 가운데 "리디노미네이션이 대통령 직권으로 언제든 시행할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리디노미네이션을 우려하는 측의 불안감을 키우고 있다.

리디노미네이션은 정말 대통령 직권으로 추진할 수 있는 것일까?

관련 유튜브 방송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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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자 뜻에 따라 전격 추진된 과거 두 번의 사례

1945년 광복 이후 두 차례의 리디노미네이션이 전격 단행됐다.

한국전쟁 막바지인 1953년 2월 이승만 대통령은 [대통령긴급명령 제13호]를 공표해 화폐단위를 '원'에서 '환'으로 변경하고 화폐액면가를 100대1로 절하했다. 이는 전쟁으로 생산활동이 크게 위축되고 장기간 거액의 군사비 지출로 인플레이션 압력이 커지면서 통화의 대외가치가 폭락한 데 따른 조치였다.

2차 리디노미네이션은 1962년 6월에 5.16 군사정부에 의해 단행됐다.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긴급통화조치법]을 통해 화폐단위를 '환'에서 다시 '원'으로 바꾸고 액면가를 10분의 1로 조정했다. 국회를 해산한 군사정부는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관련 법을 제정하고 통과시켰다. 물가를 안정시키고 지하자금을 양지로 끌어내 '경제개발계획'에 필요한 자금으로 활용하려는 목적이었다. 이 조치로 경제적으로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지만, 현행 원화체계를 도입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과거 두 차례에 걸쳐 이뤄진 리디노미네이션은 전쟁과 독재정권 하에서 기습적으로 이뤄진 매우 특수한 경우다. "대통령 직권으로 언제든 시행할 수 있다"는 주장은 이 과거 사례를 근거로 한 것으로 보이지만, 과거의 특수한 상황을 현재 상황에 그대로 적용할 순 없다.

이와 관련해 한국은행 관계자는 "과거에 특수상황이 반영돼 기습적으로 진행됐지만, 정상적인 법치국가에선 사회의 불확실성과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 적법한 절차를 거쳐 장기간 단계적으로 추진한다."고 설명했다.

국회 의결 필요한 리디노미네이션

더군다나 일각의 주장과 달리 리디노미네이션은 국회 의결을 거쳐야 한다.

대한민국의 화폐단위를 규정한 한국은행법을 개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현행 한국은행법 47조는 1원을 100전으로 규정하고 있다. 화폐단위를 바꾸려면 이 부분을 개정해야 한다.


한국은행 관계자는 "화폐단위를 바꾸는 법안을 기획재정부가 발의하면 국회의결을 거쳐 시행하게 된다."면서 "대통령이 직권으로 시행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발의된 법안이 법안 심사와 본회의 의결을 통과해야 하는 만큼 정부가 '어느날 갑자기 전격적으로' 리디노미네이션을 발표한다거나 대통령이 한국은행 총재에게 전화해 '당장 시행하라!'고 명령할 순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리디노미네이션(화폐단위 변경)은 국회 동의가 필요 없다. 대통령 직권으로 언제든 시행할 수 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리디노미네이션이란?

1,000원을 1원으로 바꾸는 등 화폐 단위를 바꾸는 일이다. 화폐의 가치를 바꾸는 '화폐개혁'과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리디노미네이션은 단순히 화폐의 단위만 바꾸는 것이어서 그것 자체로 화폐의 가치 자체가 올라가거나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잊을만하면 관련 논의가 나오는 이유는 국제사회에서 대한민국의 화폐단위가 확대된 경제규모에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오기 때문이다. OECD 34개 회원국 가운데 1달러 교환 비율이 1,000원 이상 네 자릿수인 나라는 대한민국 뿐이다. 그렇다 보니 단위가 너무 커서 국제 금융시장에서 거래하기 불편하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또 증권, 주식 거래량 등을 표기할 때 0이 16개로 경(京) 단위를 돌파해 기업 회계 등에서 장부 처리하는 데 불편하다는 점도 문제점으로 지적돼 왔다.

다만, 리디노미네이션의 순기능과 역기능을 두고 상반된 의견이 충돌하는 상황이다.

경제·금융 거래 규모 확대에 따른 불편 해소, 자국 통화의 대외적 위상 제고, 구매력 회복 등이 순기능으로 꼽히는 반면, 화폐단위 절상으로 인한 인플레이션 확대, ATM기와 전산시스템 교체 등에 드는 천문학적 비용, 화폐단위 변경에 따른 국민 혼란 등이 대표적인 역기능으로 꼽힌다.

때문에 리디노미네이션을 추진할 경우 사회·경제적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장기간 공론화 과정을 거쳐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취재 지원: 팩트체크 인턴기자 최다원 dw082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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