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정구 vs 오하시’…한일 프로복싱의 엇갈린 운명

입력 2019.05.22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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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장정구 대 오하시 경기 장면

프로복싱 침체기에 빠진 국내 스포츠에서는 좀처럼 소식조차 들을 수 없지만, 지금 세계프로복싱에선 WBSS라는 특급 이벤트가 한창 펼쳐지고 있다. WBSS는 World Boxing Super Series의 약자로, WBA-WBC-WBO-IBF의 세계 4대 챔피언을 비롯해 체급별 최강자 8명이 대결해 최후의 우승자를 가리는 이벤트 매치이다. WBSS 흥행의 중심에는 일본의 괴물 복서이자 슈퍼스타인 이노우에 나오야가 있다.

일본 복서 이노우에의 KO승일본 복서 이노우에의 KO승

일본 이노우에 WBSS 4강전, 챔피언 맞대결에서 2회 KO승

WBA 밴텀급 챔피언인 이노우에는 지난 일요일(19일) 영국 글래스고에서 열린 밴텀급 매치 4강전에서, IBF 챔피언인 푸에르토리코의 엠마뉴엘 로드리게스에게 2라운드에서 3번의 다운을 뺏으며, 2회 KO승을 거두고 결승에 진출했다.

이노우에와 로드리게스 모두 무패의 챔피언 대결이라는 점에서 박빙의 승부가 펼쳐질 것으로 전망되었지만, 실제 두 선수의 기량 차이는 예상보다 큰 것으로 나타났다. 이노우에 특유의 강력한 몸통 공격이 이어진 가운데, 무패의 챔피언이던 로드리게스는 찡그린 표정으로 고통을 호소하며 무너졌다.


이노우에 18전 18승 16KO승 3체급 석권, 지도자는 오하시

'몬스터'라는 별명을 가진 이노우에는 이번 승리로, WBA-IBF 통합 밴텀급 통합 챔피언에 오르면서, 18전 18승 무패, 16KO승이라는 경량급 선수라곤 믿기지 않는 전적을 이어갔다.

이노우에는 6전 만에 WBC 라이트 플라이급 챔피언에 올랐고, 여덟 번째 경기에서는 아르헨티나의 오마르 나바에즈를 상대로, 4번이나 다운을 뺏는 굴욕을 선사하며 2회 KO로 이기고 WBO 슈퍼플라이급 챔피언에 올라 2체급을 석권했다. 나바에즈는 플라이급 16차, 슈퍼 플라이급 11차 방어까지 성공하는 동안 단 한 번도 다운조차 당하지 않았던 상대였다.

16전째에는 WBA 밴텀급마저 차지해 3체급 석권을 달성한 일본의 복싱 영웅이 됐다. 일본 언론이 이노우에의 펀치력이 지금보다 4체급 위인 라이트급 수준이라는 보도까지 한 가운데, 전문가들은 이노우에가 5체급 이상 석권도 가능한 복서라며 찬사를 보내고 있다. 이노우에는 몸통 공격에 관한 한 역대 최고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그 이노우에를 만든 주인공은 바로 장정구를 비롯해 우리나라 선수와 여러 차례 세계 타이틀을 놓고 싸웠던 오하시 히데유키이다.

오하시(좌)와 이노우에(우)오하시(좌)와 이노우에(우)

오하시는 80년대 중반 일본에서 '150년에 한 명 나오는 천재'라고 불렸다. 100년도 아니고 하필 150년 만에 나온 천재라는 것인지 다소 의아할 수도 있다. 실제 당시 국내 중계방송에선 오하시를 '100년에 한 번 나오는 천재'라고 주로 표현하기도 했다.

사실 150년 만에 한 명 나오는 천재라는 말은 일본 경량급 최고 선수였던 구시켄 요쿄가 100년에 한 번 나오는 선수여서, 구시켄을 능가하는 천재성을 갖췄다는 일본 언론 특유의 스타 마케팅이 어우러져 만든 별명이다.

150년에 한 명 나오는 천재 오하시,장정구에게 2번 모두 KO패

이처럼 일본 언론의 주목을 받은 오하시지만, 80년대 중반 라이트 플라이급에는 장정구라는 전설적인 존재가 있었고, 오하시는 장정구에게 2번이나 도전했지만, 모두 KO로 무너졌다. 특히 도쿄에서 열린 장정구와 오하시의 2차전에선 장정구가 무려 7번이나 다운을 뺏어내며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다.

장정구는 3라운드에 3번의 다운을 뺏은 뒤, 오하시의 카운터에 걸려 그로기 상태에 빠지기도 했지만, 위기를 벗어나는 장정구의 능력은 오하시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뛰어났다.

장정구의 벽에 막힌 오하시는 체급을 미니멈급으로 내리면서, 그토록 염원하던 세계 타이틀을 차지할 수 있었다.

오하시는 90년 WBC 미니멈급에서 우리나라의 최점환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면서, 챔피언에 올랐다. 당시 오하시의 챔피언 등극은 일본 복싱계에 큰 사건이었다. 일본은 세계 타이틀 도전에서 21번 연속 실패하던 상황이었는데, 150년 만에 한 번 나온다는 천재 오하시가 일본의 유일한 챔피언으로 올라선 것이다.

오하시 은퇴 후 오하시 복싱짐 설립, 세계 챔피언 4명 배출

일본 세계타이틀전 21연패를 끊은 오하시는 지난 93년 은퇴한 뒤, 후진 양성에 몰두해 왔고, 지금은 오하시 복싱 짐 회장을 맡고 있다. 오하시 복싱 짐에서는 이노우에를 비롯해 4명의 세계 챔피언을 배출했다. 또한, 일본 프로복싱협회 회장까지 역임하면서 일본 프로복싱의 황금기를 이끌고 있다.

한국 복싱 세계 4개 기구 15위권 이내 한 명도 없어

오하시가 활동하던 시기였던 1989년 우리나라는 사상 최다인 7명의 챔피언을 보유한 반면, 일본은 단 한 명의 챔피언도 없었다.

정확히 30년이 지난 지금 일본은 밴텀급의 이노우에를 비롯해 모두 6명의 세계 챔피언을 보유하고 있지만, 우리나라는 단 한 명의 챔피언도 없다. WBA/WBC/IBF/WBO 4대 복싱 기구에 체급별 15위 이내에 드는 선수조차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는다.

1980년대 전성기를 누린 한국 프로복싱은 1990년대를 넘기면서 추락을 거듭해왔다. 세계 프로복싱 시장은 4번째 기구인 WBO가 성공적으로 안착하면서 더욱 발전했지만, 한국 복싱은 계속 뒷걸음치고 말았다. 지금 한국 복싱은 장정구 같은 천재가 나오기 어려운 데다, 장정구 같은 천재가 등장한다고 해도, 챔피언이 되지 쉽지 않은 환경이다.

한국 복싱, 프로모터 없고 프로복싱협회 4개 난립

현재 국내에는 프로모터가 한 명도 없다. 아마추어 복싱이 아닌 프로 복싱의 경우 프로모터가 있어야만 타이틀 전 개최가 가능한데, 프로모터가 없으니 제대로 된 시합을 잡을 수가 없다.

프로모터가 없는 나라에서 프로복싱협회는 4개나 난립하고 있다. 모든 체급에 걸쳐 선수가 존재하지도 않지만, 체급당 4명의 한국 챔피언이 있는 셈이다. 이런 한국 프로복싱의 현실은 해외에선 웃음거리가 되고 있다.

대한민국 첫 세계 챔피언인 김기수를 시작으로, 4전 5기의 신화를 만들었던 홍수환, 화려한 기술을 보여준 박찬희, 같은 시기 세계 경량급 최강자를 양분했던 장정구와 유명우, 돌주먹이란 별명처럼 화끈한 승부를 펼친 문성길, 동양인으로 중량급 세계챔피언에 오른 박종팔 등 수많은 복싱 영웅들의 이야기는 추억 속에서만 존재한다.

장정구는 오하시에게 2번 모두 이겼지만, 한국프로복싱은 결과적으로 일본 프로복싱에게 완패했다. 30년 만에 뒤바뀐 한일 프로복싱의 수준 차이는 좀처럼 좁혀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아 더욱 암담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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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정구 vs 오하시’…한일 프로복싱의 엇갈린 운명
    • 입력 2019-05-22 10:3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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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장정구 대 오하시 경기 장면

프로복싱 침체기에 빠진 국내 스포츠에서는 좀처럼 소식조차 들을 수 없지만, 지금 세계프로복싱에선 WBSS라는 특급 이벤트가 한창 펼쳐지고 있다. WBSS는 World Boxing Super Series의 약자로, WBA-WBC-WBO-IBF의 세계 4대 챔피언을 비롯해 체급별 최강자 8명이 대결해 최후의 우승자를 가리는 이벤트 매치이다. WBSS 흥행의 중심에는 일본의 괴물 복서이자 슈퍼스타인 이노우에 나오야가 있다.

일본 복서 이노우에의 KO승
일본 이노우에 WBSS 4강전, 챔피언 맞대결에서 2회 KO승

WBA 밴텀급 챔피언인 이노우에는 지난 일요일(19일) 영국 글래스고에서 열린 밴텀급 매치 4강전에서, IBF 챔피언인 푸에르토리코의 엠마뉴엘 로드리게스에게 2라운드에서 3번의 다운을 뺏으며, 2회 KO승을 거두고 결승에 진출했다.

이노우에와 로드리게스 모두 무패의 챔피언 대결이라는 점에서 박빙의 승부가 펼쳐질 것으로 전망되었지만, 실제 두 선수의 기량 차이는 예상보다 큰 것으로 나타났다. 이노우에 특유의 강력한 몸통 공격이 이어진 가운데, 무패의 챔피언이던 로드리게스는 찡그린 표정으로 고통을 호소하며 무너졌다.


이노우에 18전 18승 16KO승 3체급 석권, 지도자는 오하시

'몬스터'라는 별명을 가진 이노우에는 이번 승리로, WBA-IBF 통합 밴텀급 통합 챔피언에 오르면서, 18전 18승 무패, 16KO승이라는 경량급 선수라곤 믿기지 않는 전적을 이어갔다.

이노우에는 6전 만에 WBC 라이트 플라이급 챔피언에 올랐고, 여덟 번째 경기에서는 아르헨티나의 오마르 나바에즈를 상대로, 4번이나 다운을 뺏는 굴욕을 선사하며 2회 KO로 이기고 WBO 슈퍼플라이급 챔피언에 올라 2체급을 석권했다. 나바에즈는 플라이급 16차, 슈퍼 플라이급 11차 방어까지 성공하는 동안 단 한 번도 다운조차 당하지 않았던 상대였다.

16전째에는 WBA 밴텀급마저 차지해 3체급 석권을 달성한 일본의 복싱 영웅이 됐다. 일본 언론이 이노우에의 펀치력이 지금보다 4체급 위인 라이트급 수준이라는 보도까지 한 가운데, 전문가들은 이노우에가 5체급 이상 석권도 가능한 복서라며 찬사를 보내고 있다. 이노우에는 몸통 공격에 관한 한 역대 최고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그 이노우에를 만든 주인공은 바로 장정구를 비롯해 우리나라 선수와 여러 차례 세계 타이틀을 놓고 싸웠던 오하시 히데유키이다.

오하시(좌)와 이노우에(우)
오하시는 80년대 중반 일본에서 '150년에 한 명 나오는 천재'라고 불렸다. 100년도 아니고 하필 150년 만에 나온 천재라는 것인지 다소 의아할 수도 있다. 실제 당시 국내 중계방송에선 오하시를 '100년에 한 번 나오는 천재'라고 주로 표현하기도 했다.

사실 150년 만에 한 명 나오는 천재라는 말은 일본 경량급 최고 선수였던 구시켄 요쿄가 100년에 한 번 나오는 선수여서, 구시켄을 능가하는 천재성을 갖췄다는 일본 언론 특유의 스타 마케팅이 어우러져 만든 별명이다.

150년에 한 명 나오는 천재 오하시,장정구에게 2번 모두 KO패

이처럼 일본 언론의 주목을 받은 오하시지만, 80년대 중반 라이트 플라이급에는 장정구라는 전설적인 존재가 있었고, 오하시는 장정구에게 2번이나 도전했지만, 모두 KO로 무너졌다. 특히 도쿄에서 열린 장정구와 오하시의 2차전에선 장정구가 무려 7번이나 다운을 뺏어내며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다.

장정구는 3라운드에 3번의 다운을 뺏은 뒤, 오하시의 카운터에 걸려 그로기 상태에 빠지기도 했지만, 위기를 벗어나는 장정구의 능력은 오하시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뛰어났다.

장정구의 벽에 막힌 오하시는 체급을 미니멈급으로 내리면서, 그토록 염원하던 세계 타이틀을 차지할 수 있었다.

오하시는 90년 WBC 미니멈급에서 우리나라의 최점환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면서, 챔피언에 올랐다. 당시 오하시의 챔피언 등극은 일본 복싱계에 큰 사건이었다. 일본은 세계 타이틀 도전에서 21번 연속 실패하던 상황이었는데, 150년 만에 한 번 나온다는 천재 오하시가 일본의 유일한 챔피언으로 올라선 것이다.

오하시 은퇴 후 오하시 복싱짐 설립, 세계 챔피언 4명 배출

일본 세계타이틀전 21연패를 끊은 오하시는 지난 93년 은퇴한 뒤, 후진 양성에 몰두해 왔고, 지금은 오하시 복싱 짐 회장을 맡고 있다. 오하시 복싱 짐에서는 이노우에를 비롯해 4명의 세계 챔피언을 배출했다. 또한, 일본 프로복싱협회 회장까지 역임하면서 일본 프로복싱의 황금기를 이끌고 있다.

한국 복싱 세계 4개 기구 15위권 이내 한 명도 없어

오하시가 활동하던 시기였던 1989년 우리나라는 사상 최다인 7명의 챔피언을 보유한 반면, 일본은 단 한 명의 챔피언도 없었다.

정확히 30년이 지난 지금 일본은 밴텀급의 이노우에를 비롯해 모두 6명의 세계 챔피언을 보유하고 있지만, 우리나라는 단 한 명의 챔피언도 없다. WBA/WBC/IBF/WBO 4대 복싱 기구에 체급별 15위 이내에 드는 선수조차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는다.

1980년대 전성기를 누린 한국 프로복싱은 1990년대를 넘기면서 추락을 거듭해왔다. 세계 프로복싱 시장은 4번째 기구인 WBO가 성공적으로 안착하면서 더욱 발전했지만, 한국 복싱은 계속 뒷걸음치고 말았다. 지금 한국 복싱은 장정구 같은 천재가 나오기 어려운 데다, 장정구 같은 천재가 등장한다고 해도, 챔피언이 되지 쉽지 않은 환경이다.

한국 복싱, 프로모터 없고 프로복싱협회 4개 난립

현재 국내에는 프로모터가 한 명도 없다. 아마추어 복싱이 아닌 프로 복싱의 경우 프로모터가 있어야만 타이틀 전 개최가 가능한데, 프로모터가 없으니 제대로 된 시합을 잡을 수가 없다.

프로모터가 없는 나라에서 프로복싱협회는 4개나 난립하고 있다. 모든 체급에 걸쳐 선수가 존재하지도 않지만, 체급당 4명의 한국 챔피언이 있는 셈이다. 이런 한국 프로복싱의 현실은 해외에선 웃음거리가 되고 있다.

대한민국 첫 세계 챔피언인 김기수를 시작으로, 4전 5기의 신화를 만들었던 홍수환, 화려한 기술을 보여준 박찬희, 같은 시기 세계 경량급 최강자를 양분했던 장정구와 유명우, 돌주먹이란 별명처럼 화끈한 승부를 펼친 문성길, 동양인으로 중량급 세계챔피언에 오른 박종팔 등 수많은 복싱 영웅들의 이야기는 추억 속에서만 존재한다.

장정구는 오하시에게 2번 모두 이겼지만, 한국프로복싱은 결과적으로 일본 프로복싱에게 완패했다. 30년 만에 뒤바뀐 한일 프로복싱의 수준 차이는 좀처럼 좁혀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아 더욱 암담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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