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여우 가루로 굿해야” 2억 원 챙긴 무속인 실형…합법적인 ‘굿’ 기준은?

입력 2019.05.28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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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 팔려면 야생여우 태운 가루로 굿해야"

2017년 69살 A 씨는 자신이 소유한 모텔 건물 매각 문제로 고민이 깊었습니다. 건물이 시가 40억 원 상당인데, 고가다 보니 사려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중 A 씨는 그해 9월경 친구의 소개로 경기도 수원에서 신당을 운영하는 50살 무속인 이 모 씨를 만나게 됩니다.

이 씨는 자신을 "하늘에서 바로 신의 계시를 받고 있다"고 소개했습니다. 이 씨는 건물을 팔려면 야생 황여우·백여우·검은여우를 태운 가루로 굿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건물 매각 시점까지 그해 10월에서 늦어도 12월까지로 못 박았고, 매각 비용도 시세보다 높은 43억 원에 팔릴 거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요구한 돈은 2억 원. 야생 여우를 불태운 가루를 구하기가 힘드니 효험을 보기 위해선 그만한 돈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2억 원 중 1억 원은 선납을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이 씨는 A 씨에게 "누구에게도 이 일을 이야기해선 안 된다"는 당부도 빼놓지 않았습니다.

결국, A씨는 8차례에 걸쳐 모두 2억 1천만 원을 이 씨에게 송금했습니다.

그로부터 1년여 뒤, 이 씨는 사기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습니다. 수원지법 형사4단독 김두홍 판사는 이 씨에게 징역 2년의 실형을 선고했습니다.

이 씨의 행동이 무속 행위로 허용될 수 있는 한계를 벗어났다는 건데요.

허용되는 무속 행위는 어디까지?

그렇다면 법원이 바라보는 무속 행위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요. 굿과 같은 무속 행위를 대가로 돈을 받으면 모두 사기죄가 될 수 있는 걸까요?

우선 이 씨의 사례의 경우, 건물이 실제로 팔렸는지 안 팔렸는지는 사기죄 성립 여부에 중요한 게 아닙니다.

법원은 원하는 목적이 달성되지 않은 것만 갖고 무속인이 의뢰인을 속인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다만, 법원은 "무속인이 진실로 무속 행위를 할 의사가 없고 자신도 그 효과를 믿지 않으면서 효과가 있는 것 같이 거짓으로 꾸미고, 상대방을 속여 부정한 이익을 취한 것"은 사기죄가 성립한다고 설명했습니다.

법원은 한 가지 더 판단 기준을 제시했는데, "통상의 범주를 벗어나 재산상 이익을 취할 목적"이 있었느냐입니다.

무속 행위 자체가 실제로 진실하게 이뤄졌는지, 비용이 과다한 건 아닌지가 주요 판단 근거라는 건데요.

"무속 행위를 가장한 편취"

법원은 이 씨가 2017년 9월과 10월, 2018년 1월, A 씨의 모텔 등에서 굿을 하는 등 무속 행위를 한 사실은 인정했습니다.

하지만 법원은 이 씨가 A 씨에게 했던 말처럼 야생여우를 불태운 가루를 굿에 사용했는지는 증거가 없다고 봤습니다.

계좌 추적 결과, 이 씨는 A 씨에게 받은 돈을 가족에게 이체하거나 생활비로 모두 쓴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야생여우를 불태운 고가의 가루를 사들여 무속 행위에 쓴 것으로 보기 어렵다는 겁니다.

또한, 이 씨는 전 남편을 모텔 매수에 관심 있는 재력가인 것처럼 꾸며서 A 씨의 모텔에 두 차례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법원은 이 점 역시 이 씨가 A 씨를 속이려는 고의가 있었던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민형사상 이의 제기하지 않겠다" 약정서

이 씨는 재판 과정에서 "무속 행위 대가로 돈을 받은 것일 뿐, 모텔을 비싼 값에 팔리도록 해주겠다고 속이고 돈을 받은 건 아니다"라고 혐의를 부인했습니다.

그러면서 "원하는 결과가 발생하지 않더라도 민형사상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약정서를 A 씨와 작성했다고 제출하기도 했습니다.

약정서에는 자필서명 없이 A 씨의 지장만 찍혀 있었는데, A 씨는 이 약정서를 본 적이 없다고 진술했습니다.

법원은 이 약정서 자체가 "진정하게 작성된 것인지에 대해 다소 의심이 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실제로 이 약정서가 진짜라고 하더라도 모텔을 43억 원 이상의 높은 가격으로 팔아줄 것처럼 A 씨를 속이고, A 씨는 속은 상태에서 약정서를 작성한 것으로 볼 여지도 충분하다고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약정서가 있다고 해서 사기의 고의까지 부인하기는 어렵다는 게 법원의 판단입니다.

"무속 행위는 마음의 평정이 목적"

2015년 대법원 2부는 "굿을 하지 않으면 남편에게 귀신이 붙어 이혼하고 교통사고를 당한 삼촌이 죽을 것이다. 장군 할아버지의 노여움이 풀리지 않으면 아들이 죽는다"며 굿값으로 1억 6천여만 원을 받은 무속인에게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했습니다.

실제로 굿을 하지도 않았고, 굿 값으로 받은 돈을 대부분 개인 용도로 쓴 게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서울고법 형사6부에선 "집에 귀신이 득실득실해 크게 아프거나 죽을 수 있다"고 말하면서 2년간 40여 차례 굿을 하며 13억 원 상당의 현금과 귀금속을 받은 무속인에게 징역 3년을 선고했습니다.

이 무속인은 실제로 굿을 하긴 했지만, 굿을 하지 않으면 불행한 일이 곧 일어날 것처럼 상대를 현혹하고, 상식을 넘는 거액의 굿 값을 요구한 게 문제가 됐습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무속 행위의 효과가 없다는 것으로는 사기죄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취업 문제로 고민하던 30대 여성이 한 무속인에게 굿값 570만 원을 주고 굿을 했는데, 입사 시험에 모두 불합격하자 해당 무속인을 사기죄로 고소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법원은 "무속 행위는 반드시 어떤 목적의 달성보다 그 과정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게 됨으로써 얻게 되는 마음의 위안이나 평정을 목적으로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굿 값이 일반적인 시장 가격과 비교해 과다한 것으로 보이지도 않는다"며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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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야생여우 가루로 굿해야” 2억 원 챙긴 무속인 실형…합법적인 ‘굿’ 기준은?
    • 입력 2019-05-28 18:19:16
    취재K
"건물 팔려면 야생여우 태운 가루로 굿해야"

2017년 69살 A 씨는 자신이 소유한 모텔 건물 매각 문제로 고민이 깊었습니다. 건물이 시가 40억 원 상당인데, 고가다 보니 사려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중 A 씨는 그해 9월경 친구의 소개로 경기도 수원에서 신당을 운영하는 50살 무속인 이 모 씨를 만나게 됩니다.

이 씨는 자신을 "하늘에서 바로 신의 계시를 받고 있다"고 소개했습니다. 이 씨는 건물을 팔려면 야생 황여우·백여우·검은여우를 태운 가루로 굿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건물 매각 시점까지 그해 10월에서 늦어도 12월까지로 못 박았고, 매각 비용도 시세보다 높은 43억 원에 팔릴 거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요구한 돈은 2억 원. 야생 여우를 불태운 가루를 구하기가 힘드니 효험을 보기 위해선 그만한 돈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2억 원 중 1억 원은 선납을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이 씨는 A 씨에게 "누구에게도 이 일을 이야기해선 안 된다"는 당부도 빼놓지 않았습니다.

결국, A씨는 8차례에 걸쳐 모두 2억 1천만 원을 이 씨에게 송금했습니다.

그로부터 1년여 뒤, 이 씨는 사기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습니다. 수원지법 형사4단독 김두홍 판사는 이 씨에게 징역 2년의 실형을 선고했습니다.

이 씨의 행동이 무속 행위로 허용될 수 있는 한계를 벗어났다는 건데요.

허용되는 무속 행위는 어디까지?

그렇다면 법원이 바라보는 무속 행위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요. 굿과 같은 무속 행위를 대가로 돈을 받으면 모두 사기죄가 될 수 있는 걸까요?

우선 이 씨의 사례의 경우, 건물이 실제로 팔렸는지 안 팔렸는지는 사기죄 성립 여부에 중요한 게 아닙니다.

법원은 원하는 목적이 달성되지 않은 것만 갖고 무속인이 의뢰인을 속인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다만, 법원은 "무속인이 진실로 무속 행위를 할 의사가 없고 자신도 그 효과를 믿지 않으면서 효과가 있는 것 같이 거짓으로 꾸미고, 상대방을 속여 부정한 이익을 취한 것"은 사기죄가 성립한다고 설명했습니다.

법원은 한 가지 더 판단 기준을 제시했는데, "통상의 범주를 벗어나 재산상 이익을 취할 목적"이 있었느냐입니다.

무속 행위 자체가 실제로 진실하게 이뤄졌는지, 비용이 과다한 건 아닌지가 주요 판단 근거라는 건데요.

"무속 행위를 가장한 편취"

법원은 이 씨가 2017년 9월과 10월, 2018년 1월, A 씨의 모텔 등에서 굿을 하는 등 무속 행위를 한 사실은 인정했습니다.

하지만 법원은 이 씨가 A 씨에게 했던 말처럼 야생여우를 불태운 가루를 굿에 사용했는지는 증거가 없다고 봤습니다.

계좌 추적 결과, 이 씨는 A 씨에게 받은 돈을 가족에게 이체하거나 생활비로 모두 쓴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야생여우를 불태운 고가의 가루를 사들여 무속 행위에 쓴 것으로 보기 어렵다는 겁니다.

또한, 이 씨는 전 남편을 모텔 매수에 관심 있는 재력가인 것처럼 꾸며서 A 씨의 모텔에 두 차례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법원은 이 점 역시 이 씨가 A 씨를 속이려는 고의가 있었던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민형사상 이의 제기하지 않겠다" 약정서

이 씨는 재판 과정에서 "무속 행위 대가로 돈을 받은 것일 뿐, 모텔을 비싼 값에 팔리도록 해주겠다고 속이고 돈을 받은 건 아니다"라고 혐의를 부인했습니다.

그러면서 "원하는 결과가 발생하지 않더라도 민형사상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약정서를 A 씨와 작성했다고 제출하기도 했습니다.

약정서에는 자필서명 없이 A 씨의 지장만 찍혀 있었는데, A 씨는 이 약정서를 본 적이 없다고 진술했습니다.

법원은 이 약정서 자체가 "진정하게 작성된 것인지에 대해 다소 의심이 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실제로 이 약정서가 진짜라고 하더라도 모텔을 43억 원 이상의 높은 가격으로 팔아줄 것처럼 A 씨를 속이고, A 씨는 속은 상태에서 약정서를 작성한 것으로 볼 여지도 충분하다고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약정서가 있다고 해서 사기의 고의까지 부인하기는 어렵다는 게 법원의 판단입니다.

"무속 행위는 마음의 평정이 목적"

2015년 대법원 2부는 "굿을 하지 않으면 남편에게 귀신이 붙어 이혼하고 교통사고를 당한 삼촌이 죽을 것이다. 장군 할아버지의 노여움이 풀리지 않으면 아들이 죽는다"며 굿값으로 1억 6천여만 원을 받은 무속인에게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했습니다.

실제로 굿을 하지도 않았고, 굿 값으로 받은 돈을 대부분 개인 용도로 쓴 게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서울고법 형사6부에선 "집에 귀신이 득실득실해 크게 아프거나 죽을 수 있다"고 말하면서 2년간 40여 차례 굿을 하며 13억 원 상당의 현금과 귀금속을 받은 무속인에게 징역 3년을 선고했습니다.

이 무속인은 실제로 굿을 하긴 했지만, 굿을 하지 않으면 불행한 일이 곧 일어날 것처럼 상대를 현혹하고, 상식을 넘는 거액의 굿 값을 요구한 게 문제가 됐습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무속 행위의 효과가 없다는 것으로는 사기죄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취업 문제로 고민하던 30대 여성이 한 무속인에게 굿값 570만 원을 주고 굿을 했는데, 입사 시험에 모두 불합격하자 해당 무속인을 사기죄로 고소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법원은 "무속 행위는 반드시 어떤 목적의 달성보다 그 과정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게 됨으로써 얻게 되는 마음의 위안이나 평정을 목적으로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굿 값이 일반적인 시장 가격과 비교해 과다한 것으로 보이지도 않는다"며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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