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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기획 창 : 동물학대와 인간] 18세기의 링크 가설
입력 2019.06.04 (15:02) 취재K
링크 가설(Link Hypothesis)은 다소 '위험하다'라는 인상을 줄 만한 가설입니다.

아주 짧게 설명하자면, "동물학대를 하는 사람은 나중에 사람을 상대로도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라는 게 골자입니다. 1990년대 이후 미국의 사회학과 범죄학 분야에서 발전돼 온 '가설'입니다.

나름 비판도 많이 받은 가설이지만, 그 비판을 수용하고 그에 따라 논리적 체계를 발전시켜 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학자에 따라 '발전 이론'이나 '이동 이론' 등의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이보다 더 발전된 이론으로 '일반화된 일탈' 가설도 있습니다. 동물학대를 저지른 사람이 꼭 사람을 상대로 한 범죄를 저지른다기보다는 동물학대 범죄를 여러 반사회적 범죄 중의 하나로 상정해야 한다라는 내용입니다. 대수롭지 않은 일이 아니라 '범죄'라고 말입니다.

사실 이번 취재를 통해 알게 됐지만 동물학대는 가정폭력이나 아동학대와도 맥을 같이 하고 있는 분명한 범죄입니다. 방송을 보시면 어떻게 연관돼 있는지 아실 수 있습니다.

이번에 취재 과정에서 잭 레빈 교수와 피어스 번 교수 두 분을 만나 인터뷰를 했습니다. 그분들은 사회학자와 범죄학자로서 링크 이론에 대해 실증적인 연구를 많이 해온 분들입니다.

많이 궁금하신 분은 지난해 여름에 국내에서도 출간된 책 '동물학대의 사회학'을 읽어보시면 좋을 듯합니다. 물론 출판사와 저는 아무 관계 없습니다. 다만 우리나라에서 여지껏 이런 책이 나온 적이 없기 때문에 권하고는 싶습니다. 일단 재밌습니다.

링크가설이 어떤 것인지는 대략 설명을 했습니다. 분명한 것은 전의 기사에서 말씀드린 대로 미국의 FBI나 경찰뿐 아니라 심지어 동물보호단체들까지도 이러한 가설에 입각해서 동물학대 범죄에 대응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자 이젠 이 링크 가설의 올드 버전, 보다 더 정확히 말하면 18세기 영국 버전의 링크 가설에 대해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아래 그림은 18세기 영국의 화가인 윌리엄 호가스의 자화상입니다.

윌리엄 호가스 자화상윌리엄 호가스 자화상

호가스 앞의 퍼그 강아지는, 그의 반려견 '트럼프'입니다. 트럼프가 호가스의 초상화를 지키고 선 듯한 이 그림의 분위기. 호가스가 자신의 반려견을 얼마나 아끼고 사랑했는지를 보여줍니다.

호가스의 또 다른 작품 '4개의 잔혹한 무대'를 보시죠. 분위기가 아주 다릅니다.
사실 호가스는 자화상 같은 그림을 그리기도 했지만, 풍자화가로 더 유명합니다.

4개의 잔혹한 무대 첫 번째 그림4개의 잔혹한 무대 첫 번째 그림

'4개의 잔혹한 무대' 중 첫 번째 그림입니다. 이 작품은 이 첫 번째 무대에 이어서 3개의 '무대'가 더 있습니다. 그래서 모두 4개의 무대가 한 작품입니다.

중앙에서 강아지를 붙잡고 쇠꼬챙이로 못된 짓을 하고 있는 어린이가 바로 '톰 네로'라고 하는 이 작품의 주인공(가상인물)입니다. 톰 네로 주변에도 많은 소년들이 개, 고양이 등을 상대로 못된 짓을 하고 있죠.

그림 좌측 상단에 보면 웬 아이가 고양이에 풍선을 매달아 던지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풍선은 고양이의 무게 때문에 곧 땅으로 떨어지게 되겠죠... 고양이는 어떻게 될까요?

호가스가 실제로 18세기 영국 런던 거리의 분위기를 그려낸 것이라고 합니다. 산업혁명 중이었던 당시 런던 거리는 아마도 더욱더 벌어지고 있는 빈부격차와 이미 존재해 왔던 계급간의 갈등, 그리고 일자리를 얻으려 도시로 밀려들었지만 결국엔 자본가들과 귀족들의 저곡가 정책에 따라 도시 빈민이 돼야 했던 대다수 런던 시민들의 고통스러운 모습들로 가득 차 있었나 봅니다.

고통을 받는 사람은, 고통을 받았다고 가만히 고통만 받고 있는 것이 아니라 호가스의 이 그림처럼 누군가 다른 약자를 찾아서 괴롭히는데 나서게 되기도 하죠.

그래서 이 그림 속의 거리에는, 학대받은 아이들의 손을 통해 동물학대가 계속되고 있는 겁니다.(상세한 설명은 시사기획창 6월 4일 방송에서 피어스 번 교수의
인터뷰를 통해 들으시면 됩니다)

이 작품은 그가 그린 자화상과 달리 동물학대와 아동학대(두 번째 그림에 나옵니다), 그리고 살인(세 번째 그림에 나옵니다) 등이 노골적으로 그려져 있고 차갑고 기괴한 분위기까지 느낄 수 있게 돼 있습니다. 인물 한명 한명의 표정이 아주 생동감 있게 그려져 있기 때문이죠. 눈치 빠른 분은 이미 알아채셨겠지만 나머지 3개의 무대에서도 톰 네로의 이후의 삶이 펼쳐집니다. 그는 동물학대에 이어 살인을 저지르게 되고,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마치게 됩니다. 죽고 난 이후에도 인간으로서는 당해선 안 될 수모까지 겪게 됩니다.

링크, 즉 동물학대를 하는 사람이 어떻게 다른 범죄로 연결되는가 하는 점, 그리고 그 최후가 어떻게 되는가 하는 측면을 톰 네로의 삶을 통해 아주 극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거죠. 그래서 이 그림은 서두에 말씀드린 '링크 가설'의 18세기 버전이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이 작품이 그려진 시기가 1751년임을 생각해보면, 이미 그 당시에도 링크 가설과 같은 이야기들이 속설처럼 존재하고 있었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도 그렇지 않았습니까? 어렸을 때 어른들이 그러셨죠. "말 못하는 짐승이라고 그렇게 괴롭히고 못살게 굴면 나중에 벌 받는다"라고요.

우리가 잘 아는 독일의 철학자 칸트 역시 이 링크 가설을 철학적으로, 윤리적으로 뒷받침할 만한 이야기를 자신의 책에서 밝힌 바 있죠. 한번 인용해 보겠습니다.

<<<비록 이성을 지니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생명이 있는 피조물인 동물들을 폭력적으로 그리고 잔인한 방식으로 다루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인간의 의무와 더더욱 진정으로 대립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동물들의 고통에 대한 인간의 공감이 무뎌지게 되고 결과적으로 타인과의 관계에서 도덕성에 대단히 유익한 천성적 소질이 약화되어 점점 더 고갈되기 때문이다. (칸트 도덕형이상학 제2장 중에서)>>>

칸트가 정말 그런 이야기를 했어? 하고 의아하신 분들은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갖고 있는 책은 한길사에서 나온 것인데 한국 칸트학회가 기획한 버전입니다. 버전별로 번역은 다소 차이가 있지만, 뜻은 같았습니다.

동물학대 문제는 그러나 그런 이성으로써가 아니라, 우리의 감성으로 접근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주변의 반려 동물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십시오.
그들도 감정이 있고, 공감할 줄 아는 생명체임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애초부터 고기로, 장난감으로, 위안거리로서 존재했던 상품으로서의 무생물 같은 대상물은 아니었으니 말입니다.

그들은 우리 사회에서 소리 없이 고통받는 약자입니다. 우리가 아는 다른 약자들보다 더욱 약자입니다. 자신의 고통을 인간에게 호소하거나 고발할 수 없는 그런 존재니까요.

반려동물은 산업화된 현대 도시에 살도록 허락받은 유일한 동물입니다.

자신들의 의지와 관계없이 그들은 우리가 사는 곳에서 태어나 우리의 감정의 노예가 되기도 하고 우리 곁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이 사회의 최약자로서 고통도 받게 됩니다. 또 어느 순간 먹을거리 신세로 전락하기도 합니다.

그들이 우리 곁에 사는 동안 적어도 그들이 우리를 까닭없이 두려워 하지는 않게 대해 줬으면 하는 그런 마음일 뿐입니다.
  • [시사기획 창 : 동물학대와 인간] 18세기의 링크 가설
    • 입력 2019-06-04 15:02:45
    취재K
링크 가설(Link Hypothesis)은 다소 '위험하다'라는 인상을 줄 만한 가설입니다.

아주 짧게 설명하자면, "동물학대를 하는 사람은 나중에 사람을 상대로도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라는 게 골자입니다. 1990년대 이후 미국의 사회학과 범죄학 분야에서 발전돼 온 '가설'입니다.

나름 비판도 많이 받은 가설이지만, 그 비판을 수용하고 그에 따라 논리적 체계를 발전시켜 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학자에 따라 '발전 이론'이나 '이동 이론' 등의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이보다 더 발전된 이론으로 '일반화된 일탈' 가설도 있습니다. 동물학대를 저지른 사람이 꼭 사람을 상대로 한 범죄를 저지른다기보다는 동물학대 범죄를 여러 반사회적 범죄 중의 하나로 상정해야 한다라는 내용입니다. 대수롭지 않은 일이 아니라 '범죄'라고 말입니다.

사실 이번 취재를 통해 알게 됐지만 동물학대는 가정폭력이나 아동학대와도 맥을 같이 하고 있는 분명한 범죄입니다. 방송을 보시면 어떻게 연관돼 있는지 아실 수 있습니다.

이번에 취재 과정에서 잭 레빈 교수와 피어스 번 교수 두 분을 만나 인터뷰를 했습니다. 그분들은 사회학자와 범죄학자로서 링크 이론에 대해 실증적인 연구를 많이 해온 분들입니다.

많이 궁금하신 분은 지난해 여름에 국내에서도 출간된 책 '동물학대의 사회학'을 읽어보시면 좋을 듯합니다. 물론 출판사와 저는 아무 관계 없습니다. 다만 우리나라에서 여지껏 이런 책이 나온 적이 없기 때문에 권하고는 싶습니다. 일단 재밌습니다.

링크가설이 어떤 것인지는 대략 설명을 했습니다. 분명한 것은 전의 기사에서 말씀드린 대로 미국의 FBI나 경찰뿐 아니라 심지어 동물보호단체들까지도 이러한 가설에 입각해서 동물학대 범죄에 대응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자 이젠 이 링크 가설의 올드 버전, 보다 더 정확히 말하면 18세기 영국 버전의 링크 가설에 대해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아래 그림은 18세기 영국의 화가인 윌리엄 호가스의 자화상입니다.

윌리엄 호가스 자화상윌리엄 호가스 자화상

호가스 앞의 퍼그 강아지는, 그의 반려견 '트럼프'입니다. 트럼프가 호가스의 초상화를 지키고 선 듯한 이 그림의 분위기. 호가스가 자신의 반려견을 얼마나 아끼고 사랑했는지를 보여줍니다.

호가스의 또 다른 작품 '4개의 잔혹한 무대'를 보시죠. 분위기가 아주 다릅니다.
사실 호가스는 자화상 같은 그림을 그리기도 했지만, 풍자화가로 더 유명합니다.

4개의 잔혹한 무대 첫 번째 그림4개의 잔혹한 무대 첫 번째 그림

'4개의 잔혹한 무대' 중 첫 번째 그림입니다. 이 작품은 이 첫 번째 무대에 이어서 3개의 '무대'가 더 있습니다. 그래서 모두 4개의 무대가 한 작품입니다.

중앙에서 강아지를 붙잡고 쇠꼬챙이로 못된 짓을 하고 있는 어린이가 바로 '톰 네로'라고 하는 이 작품의 주인공(가상인물)입니다. 톰 네로 주변에도 많은 소년들이 개, 고양이 등을 상대로 못된 짓을 하고 있죠.

그림 좌측 상단에 보면 웬 아이가 고양이에 풍선을 매달아 던지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풍선은 고양이의 무게 때문에 곧 땅으로 떨어지게 되겠죠... 고양이는 어떻게 될까요?

호가스가 실제로 18세기 영국 런던 거리의 분위기를 그려낸 것이라고 합니다. 산업혁명 중이었던 당시 런던 거리는 아마도 더욱더 벌어지고 있는 빈부격차와 이미 존재해 왔던 계급간의 갈등, 그리고 일자리를 얻으려 도시로 밀려들었지만 결국엔 자본가들과 귀족들의 저곡가 정책에 따라 도시 빈민이 돼야 했던 대다수 런던 시민들의 고통스러운 모습들로 가득 차 있었나 봅니다.

고통을 받는 사람은, 고통을 받았다고 가만히 고통만 받고 있는 것이 아니라 호가스의 이 그림처럼 누군가 다른 약자를 찾아서 괴롭히는데 나서게 되기도 하죠.

그래서 이 그림 속의 거리에는, 학대받은 아이들의 손을 통해 동물학대가 계속되고 있는 겁니다.(상세한 설명은 시사기획창 6월 4일 방송에서 피어스 번 교수의
인터뷰를 통해 들으시면 됩니다)

이 작품은 그가 그린 자화상과 달리 동물학대와 아동학대(두 번째 그림에 나옵니다), 그리고 살인(세 번째 그림에 나옵니다) 등이 노골적으로 그려져 있고 차갑고 기괴한 분위기까지 느낄 수 있게 돼 있습니다. 인물 한명 한명의 표정이 아주 생동감 있게 그려져 있기 때문이죠. 눈치 빠른 분은 이미 알아채셨겠지만 나머지 3개의 무대에서도 톰 네로의 이후의 삶이 펼쳐집니다. 그는 동물학대에 이어 살인을 저지르게 되고,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마치게 됩니다. 죽고 난 이후에도 인간으로서는 당해선 안 될 수모까지 겪게 됩니다.

링크, 즉 동물학대를 하는 사람이 어떻게 다른 범죄로 연결되는가 하는 점, 그리고 그 최후가 어떻게 되는가 하는 측면을 톰 네로의 삶을 통해 아주 극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거죠. 그래서 이 그림은 서두에 말씀드린 '링크 가설'의 18세기 버전이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이 작품이 그려진 시기가 1751년임을 생각해보면, 이미 그 당시에도 링크 가설과 같은 이야기들이 속설처럼 존재하고 있었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도 그렇지 않았습니까? 어렸을 때 어른들이 그러셨죠. "말 못하는 짐승이라고 그렇게 괴롭히고 못살게 굴면 나중에 벌 받는다"라고요.

우리가 잘 아는 독일의 철학자 칸트 역시 이 링크 가설을 철학적으로, 윤리적으로 뒷받침할 만한 이야기를 자신의 책에서 밝힌 바 있죠. 한번 인용해 보겠습니다.

<<<비록 이성을 지니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생명이 있는 피조물인 동물들을 폭력적으로 그리고 잔인한 방식으로 다루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인간의 의무와 더더욱 진정으로 대립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동물들의 고통에 대한 인간의 공감이 무뎌지게 되고 결과적으로 타인과의 관계에서 도덕성에 대단히 유익한 천성적 소질이 약화되어 점점 더 고갈되기 때문이다. (칸트 도덕형이상학 제2장 중에서)>>>

칸트가 정말 그런 이야기를 했어? 하고 의아하신 분들은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갖고 있는 책은 한길사에서 나온 것인데 한국 칸트학회가 기획한 버전입니다. 버전별로 번역은 다소 차이가 있지만, 뜻은 같았습니다.

동물학대 문제는 그러나 그런 이성으로써가 아니라, 우리의 감성으로 접근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주변의 반려 동물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십시오.
그들도 감정이 있고, 공감할 줄 아는 생명체임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애초부터 고기로, 장난감으로, 위안거리로서 존재했던 상품으로서의 무생물 같은 대상물은 아니었으니 말입니다.

그들은 우리 사회에서 소리 없이 고통받는 약자입니다. 우리가 아는 다른 약자들보다 더욱 약자입니다. 자신의 고통을 인간에게 호소하거나 고발할 수 없는 그런 존재니까요.

반려동물은 산업화된 현대 도시에 살도록 허락받은 유일한 동물입니다.

자신들의 의지와 관계없이 그들은 우리가 사는 곳에서 태어나 우리의 감정의 노예가 되기도 하고 우리 곁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이 사회의 최약자로서 고통도 받게 됩니다. 또 어느 순간 먹을거리 신세로 전락하기도 합니다.

그들이 우리 곁에 사는 동안 적어도 그들이 우리를 까닭없이 두려워 하지는 않게 대해 줬으면 하는 그런 마음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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