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만장한 삶…김대중-이희호 47년의 동행

입력 2019.06.11 (12:13) 수정 2019.06.11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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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동교동 178-1번지.

이 곳에는 문패 두 개가 나란히 걸려있습니다.

하나는 '김대중' 하나는 '이희호'입니다.

두 사람은 1962년 5월 부부의 연을 맺습니다.

당시 이희호 여사의 나이는 마흔 살, 그보다 두 살 아래 연하인 김 전 대통령은 어린 두 아들에 노모가 있는 정치 재수생이었습니다.

이 여사는 훗날 자서전에서 "김대중과 나의 결혼은 모험이었다. 운명은 문 밖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거세게 노크했다"고 그 때를 회상했습니다.

그런 운명적 만남은 가시밭의 연속이었습니다.

김 전 대통령이 겪은 6년의 감옥 생활, 10년의 망명과 연금 시절을 함께 견뎠습니다.

생전 이 여사는 살면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순간이 "라디오를 통해 남편의 사형 선고를 들었을 때"라고 말했습니다.

1980년 5월이었습니다.

[故 이희호/여사/KBS 아침마당 출연 : "사형이냐 무기징역이냐... 결정 전 신문 보는 게 매일매일 너무 힘들었어요."]

수인번호 9번, 사형수 김대중.

옥중의 남편을 생각하며 매일 편지를 보내고, 겨울에도 자신의 안방에 불을 넣지 못하게 했단 일화는 지금도 회자됩니다.

가택 연금 시절, 달력에 X자 표시를 해가며 연금이 풀릴때까지 인고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어딜 가도 늘 기관원이 따라붙던 엄혹했던 시기, 아들의 결혼식도 집에서 치러야 했습니다.

"비가 그치지 않아 거실에서 식을 올렸다. 집 밖에는 초대받지 않은 손님, 경찰과 정보원이 하객보다 많았다."

이 여사가 떠올리는 아들 결혼식의 한 장면입니다.

5년간의 미국 망명 생활을 마치고 1987년 귀국한 뒤 87년 92년 97년 대선을 함께 치르며 남편의 유세를 도왔습니다.

[故 이희호/여사/1997년 유세 : "이 나라의 훌륭한 지도자가 우리에게는 요구되고 있습니다."]

결국 영부인의 자리에 올라 역사적인 순간 순간을 김 전 대통령과 함께 지켜봤습니다.

이렇게 남편 '김대중'을 떼 놓고 '이희호'를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 자신의 일생만으로도 여성 운동가로 주목받기에 손색없는 삶이었습니다.

시작은 6·25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던 1952년. 여성문제연구원 창립 멤버로 실무를 도맡았고 1959년 YWCA 총무로 일하며 본격적인 여성 인권 운동에 나섰습니다.

그의 첫 캠페인은 '혼인신고를 합시다'

많은 여성들이 혼인 신고도 없이 살다가 쫓겨나는 일이 흔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이런 이력 때문에 DJ 정부 시절 여성부 창설 모성보호 3법 개정 여성 장관 4명과 첫 여성 대사 임명 등을 놓고 "DJ 여성정책의 절반은 이 여사 몫"이란 얘기가 공공연히 나돌기도 했습니다.

이 여사는 10년 전 남편을 먼저 떠나보냅니다.

당시 병상에 누운 김 전 대통령 두 손에는 벙어리 장갑이 끼워졌습니다.

손발이 차가워진 남편을 위해 이 여사가 손수 뜬, 마지막 선물이었습니다.

빈소에서는 애써 슬픔을 감추며 마주하기 불편할법한 문병객들까지 일일이 미소로 맞았습니다.

[故 이희호/여사/2009년 8월 : "미음 같은 걸 호스로 음식이 들어가는데요, 때에 따라서는 금식을 요할 때가 있고, (의사) 선생님들께서 알아서 주시죠."]

두 달 전인 지난 4월엔 장남 홍일 씨도 먼저 떠나보냈습니다.

홍일 씨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에는 당시 이 여사가 입원 중이었지만, 상태가 위중해 장남의 별세 소식은 전달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리고 이희호 여사까지, 파란만장한 삶을 접고 남편과 아들의 곁으로 돌아가면서 동교동 자택에 걸려있던 문패는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습니다.

KBS 뉴스 이윤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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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란만장한 삶…김대중-이희호 47년의 동행
    • 입력 2019-06-11 12:17:38
    • 수정2019-06-11 12:2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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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동교동 178-1번지.

이 곳에는 문패 두 개가 나란히 걸려있습니다.

하나는 '김대중' 하나는 '이희호'입니다.

두 사람은 1962년 5월 부부의 연을 맺습니다.

당시 이희호 여사의 나이는 마흔 살, 그보다 두 살 아래 연하인 김 전 대통령은 어린 두 아들에 노모가 있는 정치 재수생이었습니다.

이 여사는 훗날 자서전에서 "김대중과 나의 결혼은 모험이었다. 운명은 문 밖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거세게 노크했다"고 그 때를 회상했습니다.

그런 운명적 만남은 가시밭의 연속이었습니다.

김 전 대통령이 겪은 6년의 감옥 생활, 10년의 망명과 연금 시절을 함께 견뎠습니다.

생전 이 여사는 살면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순간이 "라디오를 통해 남편의 사형 선고를 들었을 때"라고 말했습니다.

1980년 5월이었습니다.

[故 이희호/여사/KBS 아침마당 출연 : "사형이냐 무기징역이냐... 결정 전 신문 보는 게 매일매일 너무 힘들었어요."]

수인번호 9번, 사형수 김대중.

옥중의 남편을 생각하며 매일 편지를 보내고, 겨울에도 자신의 안방에 불을 넣지 못하게 했단 일화는 지금도 회자됩니다.

가택 연금 시절, 달력에 X자 표시를 해가며 연금이 풀릴때까지 인고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어딜 가도 늘 기관원이 따라붙던 엄혹했던 시기, 아들의 결혼식도 집에서 치러야 했습니다.

"비가 그치지 않아 거실에서 식을 올렸다. 집 밖에는 초대받지 않은 손님, 경찰과 정보원이 하객보다 많았다."

이 여사가 떠올리는 아들 결혼식의 한 장면입니다.

5년간의 미국 망명 생활을 마치고 1987년 귀국한 뒤 87년 92년 97년 대선을 함께 치르며 남편의 유세를 도왔습니다.

[故 이희호/여사/1997년 유세 : "이 나라의 훌륭한 지도자가 우리에게는 요구되고 있습니다."]

결국 영부인의 자리에 올라 역사적인 순간 순간을 김 전 대통령과 함께 지켜봤습니다.

이렇게 남편 '김대중'을 떼 놓고 '이희호'를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 자신의 일생만으로도 여성 운동가로 주목받기에 손색없는 삶이었습니다.

시작은 6·25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던 1952년. 여성문제연구원 창립 멤버로 실무를 도맡았고 1959년 YWCA 총무로 일하며 본격적인 여성 인권 운동에 나섰습니다.

그의 첫 캠페인은 '혼인신고를 합시다'

많은 여성들이 혼인 신고도 없이 살다가 쫓겨나는 일이 흔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이런 이력 때문에 DJ 정부 시절 여성부 창설 모성보호 3법 개정 여성 장관 4명과 첫 여성 대사 임명 등을 놓고 "DJ 여성정책의 절반은 이 여사 몫"이란 얘기가 공공연히 나돌기도 했습니다.

이 여사는 10년 전 남편을 먼저 떠나보냅니다.

당시 병상에 누운 김 전 대통령 두 손에는 벙어리 장갑이 끼워졌습니다.

손발이 차가워진 남편을 위해 이 여사가 손수 뜬, 마지막 선물이었습니다.

빈소에서는 애써 슬픔을 감추며 마주하기 불편할법한 문병객들까지 일일이 미소로 맞았습니다.

[故 이희호/여사/2009년 8월 : "미음 같은 걸 호스로 음식이 들어가는데요, 때에 따라서는 금식을 요할 때가 있고, (의사) 선생님들께서 알아서 주시죠."]

두 달 전인 지난 4월엔 장남 홍일 씨도 먼저 떠나보냈습니다.

홍일 씨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에는 당시 이 여사가 입원 중이었지만, 상태가 위중해 장남의 별세 소식은 전달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리고 이희호 여사까지, 파란만장한 삶을 접고 남편과 아들의 곁으로 돌아가면서 동교동 자택에 걸려있던 문패는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습니다.

KBS 뉴스 이윤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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