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로 새긴 사랑·민주주의…이희호가 김대중에게

입력 2019.06.11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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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슬픈 소식 하나가 들렸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별세한 지 10년.. 그의 곁을 지켰던 이희호 여사가 우리 사회에 큰 여운을 남기고 그의 곁으로 떠났습니다.

김 전 대통령의 단순한 배우자를 넘어 정치적 동지이자 조언자였던 이희호 여사. 그를 추모하며 떠오른 게 있었습니다. 군사 독재에 맞서 싸우는 남편에게 한줄 한줄 마음으로 써 내려갔던 수백 통의 편지들입니다. 민주화 투쟁의 선봉에서 치열하게 싸우는 동안 김 전 대통령을 버티게 해줬던 것 중 하나는 이 여사의 애틋한 사랑과 북돋음이 가득 담긴 '옥중 서신'들이었을 겁니다.

책 ‘옥중서신 - 이희호가 김대중에게’책 ‘옥중서신 - 이희호가 김대중에게’

1972년, 유신이 선포되던 해, 치료차 일본으로 나갔던 김 전 대통령은 유신이 선포되자 국내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강력한 반대 성명을 쓰고, 미국과 일본으로 망명 생활에 들어갔습니다. 강도 높은 반독재, 반유신 투쟁을 전개했던 그때, 이 여사는 정부의 감시를 피해 김 전 대통령에게 수시로 편지를 보냈습니다.

당신만이 한국을 대표해서 말할 수 있습니다(1972년 12월 19일)
"현재로는 당신만이 한국을 대표해서 말할 수 있는 것 아니겠어요? 어느 누구도 바른말을 하지 못하고 가슴 답답해하고 있으니까요. (중략) 희생할 각오를 하셔도 값있게 희생하셔야지 값없이 소리 없이 희생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여러 점으로 깊이 생각하시고 처신하실 줄 믿습니다." - 당신을 사랑하는 희호

쉬이 닿을 수 없는 남편...그에 대한 걱정으로 잠 못 이루는 날 속에서도, 몰래 보낸 편지에는 투쟁에 대한 강한 격려와 남편에 대한 믿음이 짙게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한국 정세 소식을 전하고, 조언하는 역할도 잊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제 한국에는 야당이 없어요. 신민당, 통일당 양당이 서로 야당이라고 싸우고 있어요. 조금만 하면 입건하고 구속하니까 선거운동에서는 무서워서 제대로 말을 못하는데, 무슨 말들을 하나 궁금증 때문에 유세장에는 의외로 사람들이 많이 모인대요." (1973년 2월 19일)

"요즘도 우리에 대한 감시는 계엄 때나 다름없습니다. 정말로 자유가 그리워요. 나만이 아니고 우리 국민 누구나가 다 바라는 것이 자유일 것입니다. "(1973년 3월 25일)

1973년 8월 8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피랍된 지 5일 9시간 만에 서울 동교동 자택에 돌아와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1973년 8월 8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피랍된 지 5일 9시간 만에 서울 동교동 자택에 돌아와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1973년 8월 8일, 김 전 대통령의 납치, 5일 만의 극적인 생환...하지만 시련과 고난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1976년 3월, 가톨릭 신자 700여 명과 수십 명의 개신교 신자들이 명동성당에서 3.1절 기념미사 드리고 있던 그때, 김 전 대통령 등 민주인사 10인이 서명한 <민주구국선언서>가 발표되자 김 전 대통령은 '긴급조치 위반 9호'로 구속됐습니다.

징역 5년에 자격정지 5년. 남편이 진주 교도소에 수감됐던 당시, 이어지는 가시밭길 속에서도 이 여사는 의연함을 잃지 않았습니다. 불을 때지 않는 교도소에 있는 남편을 생각하며 난방도 하지 않은 채 겨울을 보냈습니다. 대신, 꾹꾹 눌러 담아낸 편지에 온기를 담아 사랑과 위로를 전했습니다.

책 ‘옥중서신-이희호가 김대중에게’ 일부책 ‘옥중서신-이희호가 김대중에게’ 일부

우리 가족들은 결코 실망을 아니합니다 (1977년 4월 23일)
"오히려 영광스러운 고난의 대열을 따라 묵묵히 행진하고 있는 엄숙한 시기인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참으로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고 쓰지도 못하는 이 실정이 안타깝기만 합니다. 다시 한 번 당신의 고난이 헛되지 않다는 것을 더욱 확신하면서 내가 대신 당신의 그 어려움을 겪지 못하는 것이 미안합니다."

무엇보다 이 여사가 가장 힘들었을 때는 1980년이었을 겁니다. 김 전 대통령이 내란음모 사건으로 사형 선고를 받아 언제 형이 집행될지 모르는 절망밖에 없는 상황, 그때에도 이 여사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존경하는 당신에게'로 시작하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이 있을 수 있다는 힘과 용기를 북돋아 주는 것, 김 전 대통령을 버티게 해준 건 단연 그것이지 않았을까요?

"차라리 당신이 정말 폭력을 좋아하는 성격이라도 지니고 있고, 또 그다지도 안타깝게 민주주의를 갈구하지 않았다면, 이처럼 뼈와 살이 깎여나가는 아픔을 느끼지 않아도 좋았을 것을 하고 생각해봅니다." (1980년 11월 21일)

"세상과 완전히 단절되어 있는 당신을 생각할 때 이 무슨 뜻입니까 하고 하나님께 물어봅니다. 반드시 뜻이 있을 겁니다." (1981년 1월 6일)


김 전 대통령은 1983년 미국 망명 시절, 샌프란시스코에서 있었던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내가 없었더라면 내가 오늘날 무엇이 되었을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오늘 내가 여러분과 함께할 수 있는 것은 내 아내 덕분이고, 나는 이희호의 남편으로서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나는 그것이 너무 자랑스럽습니다."


이 여사는 이제 영원한 동반자였던, 김 전 대통령의 곁으로 갔습니다. 10년 전 뜨거웠던 여름, 그가 홀연히 세상을 떠난 뒤로 나누지 못했던 그간의 얘기를, 그간 전하지 못했던 편지들을 이젠 하나하나 꺼내보고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는 떠났지만, 그들이 편지에마저 새겼던 사랑과 자유, 민주주의는 여전히 그 뜨거움을 간직한 채 우리 사회에 오래도록 남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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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편지로 새긴 사랑·민주주의…이희호가 김대중에게
    • 입력 2019-06-11 16:44:38
    취재K
어젯밤, 슬픈 소식 하나가 들렸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별세한 지 10년.. 그의 곁을 지켰던 이희호 여사가 우리 사회에 큰 여운을 남기고 그의 곁으로 떠났습니다.

김 전 대통령의 단순한 배우자를 넘어 정치적 동지이자 조언자였던 이희호 여사. 그를 추모하며 떠오른 게 있었습니다. 군사 독재에 맞서 싸우는 남편에게 한줄 한줄 마음으로 써 내려갔던 수백 통의 편지들입니다. 민주화 투쟁의 선봉에서 치열하게 싸우는 동안 김 전 대통령을 버티게 해줬던 것 중 하나는 이 여사의 애틋한 사랑과 북돋음이 가득 담긴 '옥중 서신'들이었을 겁니다.

책 ‘옥중서신 - 이희호가 김대중에게’
1972년, 유신이 선포되던 해, 치료차 일본으로 나갔던 김 전 대통령은 유신이 선포되자 국내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강력한 반대 성명을 쓰고, 미국과 일본으로 망명 생활에 들어갔습니다. 강도 높은 반독재, 반유신 투쟁을 전개했던 그때, 이 여사는 정부의 감시를 피해 김 전 대통령에게 수시로 편지를 보냈습니다.

당신만이 한국을 대표해서 말할 수 있습니다(1972년 12월 19일)
"현재로는 당신만이 한국을 대표해서 말할 수 있는 것 아니겠어요? 어느 누구도 바른말을 하지 못하고 가슴 답답해하고 있으니까요. (중략) 희생할 각오를 하셔도 값있게 희생하셔야지 값없이 소리 없이 희생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여러 점으로 깊이 생각하시고 처신하실 줄 믿습니다." - 당신을 사랑하는 희호

쉬이 닿을 수 없는 남편...그에 대한 걱정으로 잠 못 이루는 날 속에서도, 몰래 보낸 편지에는 투쟁에 대한 강한 격려와 남편에 대한 믿음이 짙게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한국 정세 소식을 전하고, 조언하는 역할도 잊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제 한국에는 야당이 없어요. 신민당, 통일당 양당이 서로 야당이라고 싸우고 있어요. 조금만 하면 입건하고 구속하니까 선거운동에서는 무서워서 제대로 말을 못하는데, 무슨 말들을 하나 궁금증 때문에 유세장에는 의외로 사람들이 많이 모인대요." (1973년 2월 19일)

"요즘도 우리에 대한 감시는 계엄 때나 다름없습니다. 정말로 자유가 그리워요. 나만이 아니고 우리 국민 누구나가 다 바라는 것이 자유일 것입니다. "(1973년 3월 25일)

1973년 8월 8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피랍된 지 5일 9시간 만에 서울 동교동 자택에 돌아와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1973년 8월 8일, 김 전 대통령의 납치, 5일 만의 극적인 생환...하지만 시련과 고난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1976년 3월, 가톨릭 신자 700여 명과 수십 명의 개신교 신자들이 명동성당에서 3.1절 기념미사 드리고 있던 그때, 김 전 대통령 등 민주인사 10인이 서명한 <민주구국선언서>가 발표되자 김 전 대통령은 '긴급조치 위반 9호'로 구속됐습니다.

징역 5년에 자격정지 5년. 남편이 진주 교도소에 수감됐던 당시, 이어지는 가시밭길 속에서도 이 여사는 의연함을 잃지 않았습니다. 불을 때지 않는 교도소에 있는 남편을 생각하며 난방도 하지 않은 채 겨울을 보냈습니다. 대신, 꾹꾹 눌러 담아낸 편지에 온기를 담아 사랑과 위로를 전했습니다.

책 ‘옥중서신-이희호가 김대중에게’ 일부
우리 가족들은 결코 실망을 아니합니다 (1977년 4월 23일)
"오히려 영광스러운 고난의 대열을 따라 묵묵히 행진하고 있는 엄숙한 시기인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참으로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고 쓰지도 못하는 이 실정이 안타깝기만 합니다. 다시 한 번 당신의 고난이 헛되지 않다는 것을 더욱 확신하면서 내가 대신 당신의 그 어려움을 겪지 못하는 것이 미안합니다."

무엇보다 이 여사가 가장 힘들었을 때는 1980년이었을 겁니다. 김 전 대통령이 내란음모 사건으로 사형 선고를 받아 언제 형이 집행될지 모르는 절망밖에 없는 상황, 그때에도 이 여사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존경하는 당신에게'로 시작하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이 있을 수 있다는 힘과 용기를 북돋아 주는 것, 김 전 대통령을 버티게 해준 건 단연 그것이지 않았을까요?

"차라리 당신이 정말 폭력을 좋아하는 성격이라도 지니고 있고, 또 그다지도 안타깝게 민주주의를 갈구하지 않았다면, 이처럼 뼈와 살이 깎여나가는 아픔을 느끼지 않아도 좋았을 것을 하고 생각해봅니다." (1980년 11월 21일)

"세상과 완전히 단절되어 있는 당신을 생각할 때 이 무슨 뜻입니까 하고 하나님께 물어봅니다. 반드시 뜻이 있을 겁니다." (1981년 1월 6일)


김 전 대통령은 1983년 미국 망명 시절, 샌프란시스코에서 있었던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내가 없었더라면 내가 오늘날 무엇이 되었을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오늘 내가 여러분과 함께할 수 있는 것은 내 아내 덕분이고, 나는 이희호의 남편으로서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나는 그것이 너무 자랑스럽습니다."


이 여사는 이제 영원한 동반자였던, 김 전 대통령의 곁으로 갔습니다. 10년 전 뜨거웠던 여름, 그가 홀연히 세상을 떠난 뒤로 나누지 못했던 그간의 얘기를, 그간 전하지 못했던 편지들을 이젠 하나하나 꺼내보고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는 떠났지만, 그들이 편지에마저 새겼던 사랑과 자유, 민주주의는 여전히 그 뜨거움을 간직한 채 우리 사회에 오래도록 남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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