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즈업 북한] 갈등·화합 상징 비무장지대

입력 2019.07.06 (08:08) 수정 2019.07.06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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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남북미 정상의 회동을 계기로 비무장지대와 판문점에 대한 인식과 시각도 달라지고 있습니다.

과거 판문점하면 분단, 갈등 이런 단어들이 떠올랐는데, 이번 남북미 회동과 지난해 4.27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판문점과 비무장지대가 평화와 화합의 장소로 바뀌고 있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는데요.

이번주 클로즈업 북한에서는 판문점과 비무장지대의 66년 역사 짚어봤습니다.

[리포트]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향해 걷는 미국 트럼프 대통령.

그리고 맞은편에서 모습을 드러낸 북한 김정은 위원장.

분단의 상징.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북미 두 정상이 마주 선 순간.

[김정은/북한 국무위원장 : "이런데서 각하를 만나게 될 줄 생각 못했습니다."]

김정은 위원장의 깜짝 제안이 이어졌다.

[김정은/북한 국무위원장 : "각하께서 한 발자국 건너오시면 사상 처음으로 우리 땅을 밟으시는 미국 대통령이 될 겁니다."]

그리고 마침내, 트럼프 대통령은 5센티미터 높이의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한 땅을 밟은 첫 현직 미국 대통령이 됐다.

판문점 북측 지역 판문각 앞까지 이어진 두 정상의 발걸음에 전 세계가 주목했고, 북한 당국 역시 기록영화 형태로 북미의 만남을 전하며 각별한 의미를 담았다.

[조선중앙TV/7월1일 : "모든 예상과 억측, 상식과 관례를 초월한 조미 수뇌분들의 이 파격적인 상봉은 세계를 커다란 충격과 격동으로 끓게 했습니다."]

갈등과 반목, 분단의 상징이었던 한반도의 비무장지대가 화해와 변화라는 새로운 길목에 서게 된 것이다.

남과 북이 서로 총부리를 겨눴던 6.25 전쟁.

전쟁 발발 3년 1개월 만인 1953년 7월 27일.

유엔군과 중국, 북한군 대표는 정전 협정을 체결했다.

한반도의 허리를 가르는 길이 248킬로미터의 군사분계선을 만들고, 이를 중심으로 남북은 각각 2킬로미터씩 뒤로 물러나 남방한계선과 북방한계선을 설정했다.

그리고 그 내부는 비무장지대로 만들었다.

하지만 그 이름이 무색할 만큼 비무장지대엔 각종 군사력이 집중됐다.

긴장감은 수그러들지 않았고 소규모 교전도 수시로 발생했다.

그리고 1968년 벌어진 북한무장공비의 청와대 습격, 이른바 김신조 사건으로 비무장 지대엔 전에 없던 드높은 철책까지 설치된다.

여기에 1976년 8월 비무장지대의 중심인 공동경비구역, 판문점까지 휴전 이후 최대의 위기를 맞게 된다.

판문점 내 미루나무를 가지치기하던 미군 장교 두 명을 북한군이 도끼로 살해한 사건.

이른바 ‘도끼 만행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북미 간 적대감은 최고조에 달했다.

판문점 안에 군사분계선을 표시하는 콘크리트 턱이 만들어졌고, 남북의 경비 초소도 분리됐다.

[김재한/한림대학교 정치행정학과 교수 : "도끼만행사건은 이게 왜 중요하냐면 비무장지대를 관리하는 패턴을 바꾼 겁니다. 판문점은 아시다시피 군사분계선까지 민간인이 가잖아요. 그래서 판문점을 영어로 JSA라고 부르잖아요. 경비를 공동으로 섰던 겁니다. 그때부터 분리경비를 하는 거죠, 군사분계선으로. 남측 북측 각각 그래서 사실은 이름은 JSA지만 공동경비구역이지만 실제로 분리경비구역을 하고 있는 거죠."]

사건은 북한이 김일성 명의로 사과를 하고 미군이 미루나무 제거 작전이라는 상징적인 조치를 마친 뒤 일단락 됐다.

하지만 비무장지대 안에서 남북 간 무력충돌은 계속됐다. 사소한 충돌도 크게 번졌고, 안타까운 죽음이 반복됐다.

그러나 2000년대, 남북 관계 개선과 함께 비무장 지대에도 변화의 움직임이 일었다.

[뉴스9/2000년 6월 : "남북 정상회담이후 분단의 현장 비무장지대에서도 해빙의 분위기가 조금씩 일고 있습니다."]

김대중 정부는 비무장 지대를 생태계 보존 지대로 접근, 북한의 협력을 이끌어 내려했고.

경의선 철도와 개성공단 도로, 동해안 육로관광 등을 통해 막혀있는 비무장지대를 열고자 했다.

그리고 2007년 10월 2일. 분단 이후 처음으로 대한민국 대통령이 군사분계선을 걸어서 넘어 북으로 향했다.

[노무현 대통령/2007년 10월 : "이 장벽 때문에 우리 국민들은 우리 민족들은 너무 많은 고통을 받아왔습니다. 이제 저는 이번에 대통령으로서 이 금단의 선을 넘어갑니다."]

비무장지대에 불어온 훈풍. 남측은 2007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비무장지대 내의 경계 초소, GP의 공동 철수까지 제안했지만 북측은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조한범/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 "북한으로서는 사실은 안보적 위협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실 북한의 위협을 생각하지만 재래식 전력이 열세인 북한의 입장에서는 사실은 비무장지대의 비무장화는 자신들에게 안보적 위협이라고 생각할 수 있고 결국 자신들의 방어선에 대한 위협으로 인식을 하고 평화지대 할 경우에 그다음에 한국군은 한미를 압박할 수 있는 전진배치를 무장해제하는 걸로 받아들 이기 때문에 북한 쪽에서 사실은 거부했던 거죠."]

실제 이 시기 전방에서 군인으로 근무했던 탈북민 역시 남북 간 분위기와 상관없이 비무장지대에서만큼은 무장을 했다고 전한다.

[차리혁/전 북한군 지휘소대장/2014년 탈북 : "전방에 있는 판문점 지역이나 이쪽에는 권총을 소지하게 되지 자동소총 소지 못하게 돼있어요, 이게. 그런데 자동소총을 소지했었고 그거 자체가 북한에서는 이미 순간에 어떠한 일이 발생할지 모르기 때문에 그리고 남측과의 어떤 분쟁이 일어날지도 모르고 그러잖아요. 그러면 즉시 대응을 하기 위해서 즉시 대응을 할라고 하게 되면 무장이 있어야 돼요."]

이후 북한의 2차 핵실험과 천안함 피격 등으로 남북관계가 다시 악화되자 비무장 지대를 둘러싼 갈등의 골은 깊어졌다.

[북한 인민군 판문점 대표부 대변인 담화/2010년 3월 29일 : "남조선 군부호전광들의 2월 중순부터 비무장지대에 심리전 요원들을 비롯한 어중이떠중이들을 끌어 들여 견학이요, 참관이요 하는 반공화국 심리전 행위이다."]

그리고 2017년, 비무장지대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판문점 일대에서 총성과 함께 탈주극이 벌어졌다.

판문점 북측 초소 앞을 지나쳐 남쪽으로 질주하는 군용 지프. 배수로에 차량이 빠지자 무장한 북한 병사들이 달려들고, 북한군 병사가 차를 버리고 급히 군사분계선을 넘는다.

이른바 귀순병사 오청성 사건이다.

사건 2주 뒤 공개된 현장은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을 고스란히 보여줬다.

그리고 비무장지대 내에서 언제라도 총격전이 벌어질 수 있음을 다시 한 번 각인 시켰다.

총알을 다섯 발이나 맞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판문점 경무대 출신 오청성씨.

2년이 지난 지금 그는 판문점에서의 총격은 너무나 당연했다고 얘기한다.

[오청성/전 판문점 경무대 병사/2017년 탈북 : "제가 한국 올 때 자체도 한국 북한 쪽에서도 총탄을 발사했었고 하니까 그 부분은 그쪽에서 항시적으로 뭐 유엔에서 체결한 게 DMZ 부분에서는 비무장화로 무장화를 해제 그러니까 소지하면 안 되는데 그대 AK도 나왔었고 하다 보니까 항시적으로 그쪽은 준비시켜요, 북한 정권에서. 특히 DMZ 라인 쪽 군인들은 항시적인 무기 소지할 때 탄환을 무조건 소지해야 되고...."]

김정은 위원장 역시 집권직후부터 판문점을 시찰하고 초소를 찾을 만큼 비무장지대 근무병에 대한 대우도, 선발 기준도 각별하다고 한다.

[오청성/전 판문점 경무대 병사/2017년 탈북 : "DMZ 민경이라고 하는데 일명. 민경 부대들도 일단 저희 JSA 판문점 경무대 보다는 식단 수준이 못하지만 그래도 백미는 아마 먹을걸요. 일단 기본적으로 신체 건강이라던가 그다음 체력적으로도 많이 테스트를 하고 그다음 토대로 했을 때는 집안에 성분 이런 그런 토대가 좋아야지만이 DMZ 쪽에서 근무를 할 수 있고 신장 같은 경우에도 뽑는 기준이 틀려요. 170이상이 되어야 하고."]

그러나 갈등과 긴장의 비무장지대에도 평화의 바람은 불기 시작했다.

[김정은/북한 국무위원장/2018년 4월 : "정말 마음 설렘이 그치지 않고요, 역사적인 장소에서 만나니까, 또 대통령께서 이런 자리에 나와서 맞이해 주신 데 대해서 정말 감동적입니다."]

정전 이후 처음으로 북한 최고 지도자가 비무장지대 남쪽 땅을 밟은 것이다.

지난해 남과 북은 4.27 판문점 선언과 9.19 남북군사 합의에 따라 평화로운 비무장 지대로의 첫 걸음을 내딛었다.

가장 먼저 판문점의 모든 화기를 철수했고, 이로써 남북의 경비 병력은 총기를 휴대하지 않게 됐다.

이어 비무장지대에 있는 남북의 일부 감시초소 건물이 사라지고, 오솔길이 생겨나기도 했다.

그러나 9.19 군사합의 이행이 정체국면인 것도 현실이다.

지난 4월부터 화살머리고지 일대에서 공동 유해 발굴이 예정돼 있었지만 북한의 불참으로 우리 군만 단독으로 진행하고 있고, 남북 GP 전면 철수, 판문점 자유왕래등도 진전이 없는 상태다.

하지만 비무장 지대 평화 진전을 위해선 성급한 기대보단 객관적인 분석과 치밀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평가다.

[김재한/한림대학교 정치행정학과 교수 : "정치적인 목적 또는 자기의 그런 여러 가지 다른 생각을 갖고 비무장지대를 다루게 되면 또 그것도 굉장히 위험한 거거든요 우리가 흔히 말하는 학문적으로 인과관계가 있잖아요. 이렇게 되면 평화가 이루어지고 이렇게 되면 전쟁이 발발할 가능성이 있다 그런 아주 사회과학적인 법칙에 기초해서 정책을 수립하고 추진하면 역사적으로 길이길이 남을 어떤 결과물이 나오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장장 248킬로미터의 철책선.

그리고 한반도를 갈라놓은 66년의 시간이 고스란히 머물고 있는 곳 비무장 지대.

갈등과 반목을 넘어, 항구적 평화를 안착시키기 위한 당사국 간 노력이 절실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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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클로즈업 북한] 갈등·화합 상징 비무장지대
    • 입력 2019-07-06 08:40:19
    • 수정2019-07-06 09:06:26
    남북의 창
[앵커]

남북미 정상의 회동을 계기로 비무장지대와 판문점에 대한 인식과 시각도 달라지고 있습니다.

과거 판문점하면 분단, 갈등 이런 단어들이 떠올랐는데, 이번 남북미 회동과 지난해 4.27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판문점과 비무장지대가 평화와 화합의 장소로 바뀌고 있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는데요.

이번주 클로즈업 북한에서는 판문점과 비무장지대의 66년 역사 짚어봤습니다.

[리포트]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향해 걷는 미국 트럼프 대통령.

그리고 맞은편에서 모습을 드러낸 북한 김정은 위원장.

분단의 상징.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북미 두 정상이 마주 선 순간.

[김정은/북한 국무위원장 : "이런데서 각하를 만나게 될 줄 생각 못했습니다."]

김정은 위원장의 깜짝 제안이 이어졌다.

[김정은/북한 국무위원장 : "각하께서 한 발자국 건너오시면 사상 처음으로 우리 땅을 밟으시는 미국 대통령이 될 겁니다."]

그리고 마침내, 트럼프 대통령은 5센티미터 높이의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한 땅을 밟은 첫 현직 미국 대통령이 됐다.

판문점 북측 지역 판문각 앞까지 이어진 두 정상의 발걸음에 전 세계가 주목했고, 북한 당국 역시 기록영화 형태로 북미의 만남을 전하며 각별한 의미를 담았다.

[조선중앙TV/7월1일 : "모든 예상과 억측, 상식과 관례를 초월한 조미 수뇌분들의 이 파격적인 상봉은 세계를 커다란 충격과 격동으로 끓게 했습니다."]

갈등과 반목, 분단의 상징이었던 한반도의 비무장지대가 화해와 변화라는 새로운 길목에 서게 된 것이다.

남과 북이 서로 총부리를 겨눴던 6.25 전쟁.

전쟁 발발 3년 1개월 만인 1953년 7월 27일.

유엔군과 중국, 북한군 대표는 정전 협정을 체결했다.

한반도의 허리를 가르는 길이 248킬로미터의 군사분계선을 만들고, 이를 중심으로 남북은 각각 2킬로미터씩 뒤로 물러나 남방한계선과 북방한계선을 설정했다.

그리고 그 내부는 비무장지대로 만들었다.

하지만 그 이름이 무색할 만큼 비무장지대엔 각종 군사력이 집중됐다.

긴장감은 수그러들지 않았고 소규모 교전도 수시로 발생했다.

그리고 1968년 벌어진 북한무장공비의 청와대 습격, 이른바 김신조 사건으로 비무장 지대엔 전에 없던 드높은 철책까지 설치된다.

여기에 1976년 8월 비무장지대의 중심인 공동경비구역, 판문점까지 휴전 이후 최대의 위기를 맞게 된다.

판문점 내 미루나무를 가지치기하던 미군 장교 두 명을 북한군이 도끼로 살해한 사건.

이른바 ‘도끼 만행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북미 간 적대감은 최고조에 달했다.

판문점 안에 군사분계선을 표시하는 콘크리트 턱이 만들어졌고, 남북의 경비 초소도 분리됐다.

[김재한/한림대학교 정치행정학과 교수 : "도끼만행사건은 이게 왜 중요하냐면 비무장지대를 관리하는 패턴을 바꾼 겁니다. 판문점은 아시다시피 군사분계선까지 민간인이 가잖아요. 그래서 판문점을 영어로 JSA라고 부르잖아요. 경비를 공동으로 섰던 겁니다. 그때부터 분리경비를 하는 거죠, 군사분계선으로. 남측 북측 각각 그래서 사실은 이름은 JSA지만 공동경비구역이지만 실제로 분리경비구역을 하고 있는 거죠."]

사건은 북한이 김일성 명의로 사과를 하고 미군이 미루나무 제거 작전이라는 상징적인 조치를 마친 뒤 일단락 됐다.

하지만 비무장지대 안에서 남북 간 무력충돌은 계속됐다. 사소한 충돌도 크게 번졌고, 안타까운 죽음이 반복됐다.

그러나 2000년대, 남북 관계 개선과 함께 비무장 지대에도 변화의 움직임이 일었다.

[뉴스9/2000년 6월 : "남북 정상회담이후 분단의 현장 비무장지대에서도 해빙의 분위기가 조금씩 일고 있습니다."]

김대중 정부는 비무장 지대를 생태계 보존 지대로 접근, 북한의 협력을 이끌어 내려했고.

경의선 철도와 개성공단 도로, 동해안 육로관광 등을 통해 막혀있는 비무장지대를 열고자 했다.

그리고 2007년 10월 2일. 분단 이후 처음으로 대한민국 대통령이 군사분계선을 걸어서 넘어 북으로 향했다.

[노무현 대통령/2007년 10월 : "이 장벽 때문에 우리 국민들은 우리 민족들은 너무 많은 고통을 받아왔습니다. 이제 저는 이번에 대통령으로서 이 금단의 선을 넘어갑니다."]

비무장지대에 불어온 훈풍. 남측은 2007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비무장지대 내의 경계 초소, GP의 공동 철수까지 제안했지만 북측은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조한범/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 "북한으로서는 사실은 안보적 위협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실 북한의 위협을 생각하지만 재래식 전력이 열세인 북한의 입장에서는 사실은 비무장지대의 비무장화는 자신들에게 안보적 위협이라고 생각할 수 있고 결국 자신들의 방어선에 대한 위협으로 인식을 하고 평화지대 할 경우에 그다음에 한국군은 한미를 압박할 수 있는 전진배치를 무장해제하는 걸로 받아들 이기 때문에 북한 쪽에서 사실은 거부했던 거죠."]

실제 이 시기 전방에서 군인으로 근무했던 탈북민 역시 남북 간 분위기와 상관없이 비무장지대에서만큼은 무장을 했다고 전한다.

[차리혁/전 북한군 지휘소대장/2014년 탈북 : "전방에 있는 판문점 지역이나 이쪽에는 권총을 소지하게 되지 자동소총 소지 못하게 돼있어요, 이게. 그런데 자동소총을 소지했었고 그거 자체가 북한에서는 이미 순간에 어떠한 일이 발생할지 모르기 때문에 그리고 남측과의 어떤 분쟁이 일어날지도 모르고 그러잖아요. 그러면 즉시 대응을 하기 위해서 즉시 대응을 할라고 하게 되면 무장이 있어야 돼요."]

이후 북한의 2차 핵실험과 천안함 피격 등으로 남북관계가 다시 악화되자 비무장 지대를 둘러싼 갈등의 골은 깊어졌다.

[북한 인민군 판문점 대표부 대변인 담화/2010년 3월 29일 : "남조선 군부호전광들의 2월 중순부터 비무장지대에 심리전 요원들을 비롯한 어중이떠중이들을 끌어 들여 견학이요, 참관이요 하는 반공화국 심리전 행위이다."]

그리고 2017년, 비무장지대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판문점 일대에서 총성과 함께 탈주극이 벌어졌다.

판문점 북측 초소 앞을 지나쳐 남쪽으로 질주하는 군용 지프. 배수로에 차량이 빠지자 무장한 북한 병사들이 달려들고, 북한군 병사가 차를 버리고 급히 군사분계선을 넘는다.

이른바 귀순병사 오청성 사건이다.

사건 2주 뒤 공개된 현장은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을 고스란히 보여줬다.

그리고 비무장지대 내에서 언제라도 총격전이 벌어질 수 있음을 다시 한 번 각인 시켰다.

총알을 다섯 발이나 맞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판문점 경무대 출신 오청성씨.

2년이 지난 지금 그는 판문점에서의 총격은 너무나 당연했다고 얘기한다.

[오청성/전 판문점 경무대 병사/2017년 탈북 : "제가 한국 올 때 자체도 한국 북한 쪽에서도 총탄을 발사했었고 하니까 그 부분은 그쪽에서 항시적으로 뭐 유엔에서 체결한 게 DMZ 부분에서는 비무장화로 무장화를 해제 그러니까 소지하면 안 되는데 그대 AK도 나왔었고 하다 보니까 항시적으로 그쪽은 준비시켜요, 북한 정권에서. 특히 DMZ 라인 쪽 군인들은 항시적인 무기 소지할 때 탄환을 무조건 소지해야 되고...."]

김정은 위원장 역시 집권직후부터 판문점을 시찰하고 초소를 찾을 만큼 비무장지대 근무병에 대한 대우도, 선발 기준도 각별하다고 한다.

[오청성/전 판문점 경무대 병사/2017년 탈북 : "DMZ 민경이라고 하는데 일명. 민경 부대들도 일단 저희 JSA 판문점 경무대 보다는 식단 수준이 못하지만 그래도 백미는 아마 먹을걸요. 일단 기본적으로 신체 건강이라던가 그다음 체력적으로도 많이 테스트를 하고 그다음 토대로 했을 때는 집안에 성분 이런 그런 토대가 좋아야지만이 DMZ 쪽에서 근무를 할 수 있고 신장 같은 경우에도 뽑는 기준이 틀려요. 170이상이 되어야 하고."]

그러나 갈등과 긴장의 비무장지대에도 평화의 바람은 불기 시작했다.

[김정은/북한 국무위원장/2018년 4월 : "정말 마음 설렘이 그치지 않고요, 역사적인 장소에서 만나니까, 또 대통령께서 이런 자리에 나와서 맞이해 주신 데 대해서 정말 감동적입니다."]

정전 이후 처음으로 북한 최고 지도자가 비무장지대 남쪽 땅을 밟은 것이다.

지난해 남과 북은 4.27 판문점 선언과 9.19 남북군사 합의에 따라 평화로운 비무장 지대로의 첫 걸음을 내딛었다.

가장 먼저 판문점의 모든 화기를 철수했고, 이로써 남북의 경비 병력은 총기를 휴대하지 않게 됐다.

이어 비무장지대에 있는 남북의 일부 감시초소 건물이 사라지고, 오솔길이 생겨나기도 했다.

그러나 9.19 군사합의 이행이 정체국면인 것도 현실이다.

지난 4월부터 화살머리고지 일대에서 공동 유해 발굴이 예정돼 있었지만 북한의 불참으로 우리 군만 단독으로 진행하고 있고, 남북 GP 전면 철수, 판문점 자유왕래등도 진전이 없는 상태다.

하지만 비무장 지대 평화 진전을 위해선 성급한 기대보단 객관적인 분석과 치밀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평가다.

[김재한/한림대학교 정치행정학과 교수 : "정치적인 목적 또는 자기의 그런 여러 가지 다른 생각을 갖고 비무장지대를 다루게 되면 또 그것도 굉장히 위험한 거거든요 우리가 흔히 말하는 학문적으로 인과관계가 있잖아요. 이렇게 되면 평화가 이루어지고 이렇게 되면 전쟁이 발발할 가능성이 있다 그런 아주 사회과학적인 법칙에 기초해서 정책을 수립하고 추진하면 역사적으로 길이길이 남을 어떤 결과물이 나오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장장 248킬로미터의 철책선.

그리고 한반도를 갈라놓은 66년의 시간이 고스란히 머물고 있는 곳 비무장 지대.

갈등과 반목을 넘어, 항구적 평화를 안착시키기 위한 당사국 간 노력이 절실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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