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표준계약서가 뭔가요’…열정페이에 신음하는 영상 노동자들

입력 2019.07.09 (08:03) 수정 2019.07.09 (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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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면접관 "최저시급도 못 줘"..그래도 돈보다 경험?

김○○/드라마 연출팀 '막내'
"(면접 때)'이 일 자체가 환경상 최저시급을 못 주는데 할 의향이 있냐'고 물으세요. 근데 보통 이런 직종을 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단순 알바보다는 경험을 쌓거나 비슷한 직종을 희망하기 때문에 돈보다는 경험 때문에 하는 거 같아요."


지난달 24일, 경기도의 한 지하철역 인근 공원에서 김 모 씨(가명)를 만났습니다. 취재진에게 자신은 소위 '열정페이'식으로 드라마 제작 현장에서 일했다고 털어놨습니다.

'최저임금 만 원'과 '52시간 근무제' 등이 화두인 시대지만, 김 씨는 1년여 전에 겪은 일이었습니다. 김 씨는 지난해 초 유명 케이블 채널에서 방영된 인기 드라마에서 연출팀 '막내'로 근무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어떤 일을 해야 하고 얼마만큼의 급여를 받는지 등 기본적인 내용을 담은 계약서 한 장 받아보지 못했습니다.

김 씨는 면접 당시 한 달에 100만 원이 조금 안 되는 금액을 받는다고 '구두'로 들었습니다. 그러나, 김 씨가 노동의 대가로 실제 손에 쥘 수 있던 돈은 2주에 30만 원에 불과했습니다. 하루 8~12시간씩 매주 5~6일 근무이니, 대강 계산해도 최소 주 50시간 이상이고, 한 달이면 200시간 이상을 일했는데도, 2주에 30만 원이었으니, 시급으로 따져 3천 원을 받은 셈이었습니다.

■ "이 일 계속하고 싶으면 참아라"

이뿐이 아니었습니다. 김 씨는 모두가 무시하고 하대까지 하는 수모를 감내해야 했습니다. 누군가는 비흡연자인 김 씨에게 재떨이 청소를 시키고, 누군가는 '장난'이라며 귀를 잡아당기고, 누군가는 계속해서 팔을 때리고...그러면서, 걸핏하면 "다신 방송가에 발도 못 붙이게 할 수 있다"는 말을 수시로 들어야 했습니다.

김 씨는 이 모든 걸 '업무'의 한 부분이라 여기고 참고 또 참았습니다. 순전히 드라마에 대한 '꿈'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한 다리 건너면 모두가 안다는 드라마 업계에서, 지금 그만두면 더 이상 이 일을 다시 못할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 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도무지 개선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이 업계의 구조적인 문화에 염증을 느끼면서, 다시 발붙일 생각마저 사라지면서 김 씨는 결국 '퇴사'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 "시간외 수당하고 4대 보험? 그거 사실 꿈 같은 얘기에요 진짜"


상대적으로 '표준근로계약서' 도입이 자리잡았다는 영화계 역시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손규식 감독은 지난 2016년 말 영화 < 아버지의 전쟁 >에서 녹음감독을 맡았었습니다. 손 감독은 지인과의 인연으로, '예산 부족'을 호소하는 제작사의 사정을 봐서 표준근로계약서가 아닌 도급 계약서를 써주었습니다. 도급 계약서는 계약 종료 시점과 받을 금액만 기재되어 있습니다. 제작비가 거의 30억 원에 이르는 상업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정식 근로계약서는 써주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한겨울에도 매일 12시간 이상 밤낮없이 일했지만, 시간외 수당이나 야간 수당 따윈 아예 없었습니다.

손규식 씨/영화 '아버지의 전쟁' 녹음감독
"프로듀서가 ‘아, 저희가 예산이 적지 않습니까...’이렇게 나오더라고. 시간외 수당하고 4대 보험? 야 그거 사실 꿈같은 얘기에요 진짜."


설상가상으로, 촬영 시작 후 석 달 만에 영화 촬영이 중단되면서 영화사는 약속한 잔금 700만 원을 지급하지 않았습니다. 촬영 중단이 된 뒤 다시 촬영 재개만을 기다리다 계약 기간을 훌쩍 넘기고도 잔금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손 씨는 다른 스태프들과 함께 제작사를 근로기준법 위반으로 고소했습니다. 하지만 돌아온 제작사의 답변은 더욱 황당했습니다. '제작사는 스태프들과 도급계약을 맺었지, 근로계약을 맺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스태프들을 근로자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법원은 항소심 재판까지 '근로자성'을 인정해 스태프들의 손을 들어주었고 이제 최종심을 앞두고 있습니다.

■ 아직도 요원한 '근로계약서 전면 도입'


'계약서 없는 노동'의 해결책이 '계약서를 도입하는 것'이라는 것은 누가 봐도 자명한 일입니다. 하지만 '근로계약서 전면 도입'까지는 여전히 갈 길이 멀어 보입니다.

지난해 영화진흥위원회가 제작비 10억 원 이상의 영화 스태프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3/4가량이 표준근로계약서를 작성해 본 적이 있다고 답변했습니다. 상업 영화 스태프들에게는 어느 정도 근로계약서 작성이 자리잡은 것입니다. 하지만 저예산 영화와 독립 영화 스태프들의 현실은 달랐습니다. 얼마나 근로계약서가 도입되어 있는지에 대해서 통계조차 잡혀 있지 않고, 여전히 도급 계약 형태가 일반적이었습니다.

드라마 업계의 현실은 더욱 냉혹했습니다. 도급계약에 각 제작팀별로 총액으로 계약하는 '턴키' 계약 등이 여전히 남아있었습니다. 근로계약서 도입은 늦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난달에야 KBS를 비롯한 지상파 3사와 전국언론노조, 한국드라마제작사협회와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 등 드라마 업계의 관계자들이 모인 협의체에서 표준근로계약서 도입에 합의했습니다.

그마저도 '기본합의' 수준이고, 오는 9월 말까지 세부 협의를 거쳐 표준근로계약서에 포함시킬 구체적인 계약 내용 등과 근로조건 등을 합의해야 합니다. 통상 방영 2~3개월 전부터 촬영이 시작되는 점을 감안하면, 내년에 편성된 드라마부터 표준근로계약을 적용할 수 있지만 '협의가 잘 될' 경우입니다.

지상파는 사정이 나은 편입니다. 전체 드라마 제작의 15%가량을 차지하는 종합편성채널 방송사는 아예 논의조차 시작하지 않은 상황입니다.

지금도 영상 노동자들은 '열정페이'나 '꿈을 먹는 사람들'이란 말을 듣기 보다, 일한 만큼 거둬가는 일이 당연한 세상을 위해 '표준근로계약서' 도입이 시급하다고 호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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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후] ‘표준계약서가 뭔가요’…열정페이에 신음하는 영상 노동자들
    • 입력 2019-07-09 08:03:27
    • 수정2019-07-09 08:03:39
    취재후·사건후
■ 면접관 "최저시급도 못 줘"..그래도 돈보다 경험?

김○○/드라마 연출팀 '막내'
"(면접 때)'이 일 자체가 환경상 최저시급을 못 주는데 할 의향이 있냐'고 물으세요. 근데 보통 이런 직종을 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단순 알바보다는 경험을 쌓거나 비슷한 직종을 희망하기 때문에 돈보다는 경험 때문에 하는 거 같아요."


지난달 24일, 경기도의 한 지하철역 인근 공원에서 김 모 씨(가명)를 만났습니다. 취재진에게 자신은 소위 '열정페이'식으로 드라마 제작 현장에서 일했다고 털어놨습니다.

'최저임금 만 원'과 '52시간 근무제' 등이 화두인 시대지만, 김 씨는 1년여 전에 겪은 일이었습니다. 김 씨는 지난해 초 유명 케이블 채널에서 방영된 인기 드라마에서 연출팀 '막내'로 근무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어떤 일을 해야 하고 얼마만큼의 급여를 받는지 등 기본적인 내용을 담은 계약서 한 장 받아보지 못했습니다.

김 씨는 면접 당시 한 달에 100만 원이 조금 안 되는 금액을 받는다고 '구두'로 들었습니다. 그러나, 김 씨가 노동의 대가로 실제 손에 쥘 수 있던 돈은 2주에 30만 원에 불과했습니다. 하루 8~12시간씩 매주 5~6일 근무이니, 대강 계산해도 최소 주 50시간 이상이고, 한 달이면 200시간 이상을 일했는데도, 2주에 30만 원이었으니, 시급으로 따져 3천 원을 받은 셈이었습니다.

■ "이 일 계속하고 싶으면 참아라"

이뿐이 아니었습니다. 김 씨는 모두가 무시하고 하대까지 하는 수모를 감내해야 했습니다. 누군가는 비흡연자인 김 씨에게 재떨이 청소를 시키고, 누군가는 '장난'이라며 귀를 잡아당기고, 누군가는 계속해서 팔을 때리고...그러면서, 걸핏하면 "다신 방송가에 발도 못 붙이게 할 수 있다"는 말을 수시로 들어야 했습니다.

김 씨는 이 모든 걸 '업무'의 한 부분이라 여기고 참고 또 참았습니다. 순전히 드라마에 대한 '꿈'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한 다리 건너면 모두가 안다는 드라마 업계에서, 지금 그만두면 더 이상 이 일을 다시 못할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 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도무지 개선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이 업계의 구조적인 문화에 염증을 느끼면서, 다시 발붙일 생각마저 사라지면서 김 씨는 결국 '퇴사'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 "시간외 수당하고 4대 보험? 그거 사실 꿈 같은 얘기에요 진짜"


상대적으로 '표준근로계약서' 도입이 자리잡았다는 영화계 역시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손규식 감독은 지난 2016년 말 영화 < 아버지의 전쟁 >에서 녹음감독을 맡았었습니다. 손 감독은 지인과의 인연으로, '예산 부족'을 호소하는 제작사의 사정을 봐서 표준근로계약서가 아닌 도급 계약서를 써주었습니다. 도급 계약서는 계약 종료 시점과 받을 금액만 기재되어 있습니다. 제작비가 거의 30억 원에 이르는 상업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정식 근로계약서는 써주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한겨울에도 매일 12시간 이상 밤낮없이 일했지만, 시간외 수당이나 야간 수당 따윈 아예 없었습니다.

손규식 씨/영화 '아버지의 전쟁' 녹음감독
"프로듀서가 ‘아, 저희가 예산이 적지 않습니까...’이렇게 나오더라고. 시간외 수당하고 4대 보험? 야 그거 사실 꿈같은 얘기에요 진짜."


설상가상으로, 촬영 시작 후 석 달 만에 영화 촬영이 중단되면서 영화사는 약속한 잔금 700만 원을 지급하지 않았습니다. 촬영 중단이 된 뒤 다시 촬영 재개만을 기다리다 계약 기간을 훌쩍 넘기고도 잔금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손 씨는 다른 스태프들과 함께 제작사를 근로기준법 위반으로 고소했습니다. 하지만 돌아온 제작사의 답변은 더욱 황당했습니다. '제작사는 스태프들과 도급계약을 맺었지, 근로계약을 맺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스태프들을 근로자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법원은 항소심 재판까지 '근로자성'을 인정해 스태프들의 손을 들어주었고 이제 최종심을 앞두고 있습니다.

■ 아직도 요원한 '근로계약서 전면 도입'


'계약서 없는 노동'의 해결책이 '계약서를 도입하는 것'이라는 것은 누가 봐도 자명한 일입니다. 하지만 '근로계약서 전면 도입'까지는 여전히 갈 길이 멀어 보입니다.

지난해 영화진흥위원회가 제작비 10억 원 이상의 영화 스태프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3/4가량이 표준근로계약서를 작성해 본 적이 있다고 답변했습니다. 상업 영화 스태프들에게는 어느 정도 근로계약서 작성이 자리잡은 것입니다. 하지만 저예산 영화와 독립 영화 스태프들의 현실은 달랐습니다. 얼마나 근로계약서가 도입되어 있는지에 대해서 통계조차 잡혀 있지 않고, 여전히 도급 계약 형태가 일반적이었습니다.

드라마 업계의 현실은 더욱 냉혹했습니다. 도급계약에 각 제작팀별로 총액으로 계약하는 '턴키' 계약 등이 여전히 남아있었습니다. 근로계약서 도입은 늦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난달에야 KBS를 비롯한 지상파 3사와 전국언론노조, 한국드라마제작사협회와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 등 드라마 업계의 관계자들이 모인 협의체에서 표준근로계약서 도입에 합의했습니다.

그마저도 '기본합의' 수준이고, 오는 9월 말까지 세부 협의를 거쳐 표준근로계약서에 포함시킬 구체적인 계약 내용 등과 근로조건 등을 합의해야 합니다. 통상 방영 2~3개월 전부터 촬영이 시작되는 점을 감안하면, 내년에 편성된 드라마부터 표준근로계약을 적용할 수 있지만 '협의가 잘 될' 경우입니다.

지상파는 사정이 나은 편입니다. 전체 드라마 제작의 15%가량을 차지하는 종합편성채널 방송사는 아예 논의조차 시작하지 않은 상황입니다.

지금도 영상 노동자들은 '열정페이'나 '꿈을 먹는 사람들'이란 말을 듣기 보다, 일한 만큼 거둬가는 일이 당연한 세상을 위해 '표준근로계약서' 도입이 시급하다고 호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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