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강제동원 피해배상 끝” 주장 왜 계속되나…팩트체크 그 후

입력 2019.07.21 (10:04) 수정 2019.07.21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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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팩트체크 후에도 계속되는 논란

일본의 갑작스런 수출 규제로 시작된 한일 갈등 국면이 길어지면서 불똥이 우리 정부에게도 튄 모양새다.

일본의 수출 규제에 나선 건 지난해 우리 대법원이 일제강점기 전범 기업에 강제동원됐던 피해자들의 손을 들어준 데 대한 일종의 보복 성격인데, 일부 언론과 정치인은 대법원이 그 원인을 제공해 일본과의 신뢰 관계를 훼손했다며 질책했다.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 당시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손해배상이 끝났는데, 대법원이 이걸 무리하게 인정해 주려다 이 사달이 났다는 것이다.

노무현 정부도 소환됐다. 노무현 정부도 이 부분을 인정했는데 문재인 정부가, 김명수 대법원이 뒤집었다는 주장이다.

2019년 7월 17일 KBS 뉴스9 <팩트체크K>에서 이 같은 주장은 사실이 아니라고 따져 밝혔지만, 여전히 같은 주장을 반복하는 기사와 주장이 끊이지 않고 있다.



# "노무현 정부 때 강제동원 문제 끝났다고 결론" 주장 살펴보니….

조선일보는 2019년 7월 17일 자 <"강제징용 보상은 1965년 청구권 협정에 포함" 노무현 정부 당시 민관 공동위서 결론 낸 사안>이라는 기사에서 "한·일 관계를 '전후 최악'의 상태로 몰고 온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문제는 2005년 8월 노무현 정부 당시 민관 공동위원회가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에 반영됐다'고 발표했던 사안"이라고 보도했다.

이어 "민관공동위의 결론은 '1965년 협정 체결 당시 제반 상황을 고려할 때 국가가 어떠한 경우에도 개인 권리를 소멸시킬 수 없다는 주장을 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며 "개인 청구권은 살아있지만 65년 협정에 따라 행사하기 어렵다는 취지였다"고 적었다.

같은 날 아침 자유한국당 회의에서 나온 심재철 의원의 발언은 해당 보도를 그대로 베낀 듯했다. (심 의원은 KBS팩트체크팀에게 외교 전문가로부터 들은 내용이라고 밝혔다.)

"민관위가 당시 내린 공동 결론은, 개인 청구권은 살아있지만 65년 협정에 따라 행사하기 어렵다는 것"이었고 "일본에 다시 법적 피해 보상을 요구하는 것은 신의칙상 곤란하다는 국제법의 룰에 따라 강제징용 배상 문제는 끝난 것으로 인식됐다"는 것이다.

2005년 노무현 정부가 한일협정으로 강제동원 피해 문제가 정리됐다고 봤는지, 피해자 개인이 일본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할 권리가 없어졌다고 봤는지 좀 더 자세히 정리해봤다.


2005년 민관공동위원회 회의 모습2005년 민관공동위원회 회의 모습

# 노무현 정부 '민·관 공동위원회'는 어떤 곳?

1990년대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피해보상 소송은 일본 법원에서 번번이 가로막혔다. 일본 법원은 1965년 한일협정 때 강제동원 문제도 마무리됐다는 이유를 내세웠다.

답답했던 강제동원 희생자 유족 단체들은 정부를 상대로 한일협정의 구체적인 내용을 공개하라고 요구했고, 2004년 2월 서울행정법원은 협정 관련 자료를 공개하라며 피해자 단체의 손을 들어줬다.

한일협정 문서가 공개되자 논란은 더 커졌다. 우리 정부의 굴욕적인 한일협정 과정이 문서에 고스란히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정부가 한일협정으로 개인청구권을 소멸시키고, 그 대가로 일본 정부에서 돈을 받아놓고도 실제 피해자들에게는 제대로 보상하지 않았다는 비난이 제기됐다.

2005년 3월 노무현 정부는 민관공동위원회를 꾸려 한일협정의 법리적 쟁점을 다시 따져보고, 피해자들을 위한 대책을 마련하기로 했다.

정부 측 위원 9명과 민간위원 10명 등 모두 21명으로 위원회가 구성됐다. 여기에는 당시 국무총리였던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이었던 문재인 대통령도 포함됐다.

당시 민관위원회의 활동과 논의 내용, 결론 등은 백서(「국무총리실 한일수교회담 문서공개 등 대책기획단 활동 백서」)와 보도자료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중요한 키워드가 아래 표로 구분한 '보상과 배상', '국가와 개인'이다.


2005년 민관공동위원회 판단 취지2005년 민관공동위원회 판단 취지

# '보상'과 '배상'의 문제

먼저 '보상'과 '배상' 문제, '보상'은 재산상의 손실에 관해 지급하는 것이고, '배상'은 남의 권리를 침해(불법 행위)한 사람이 침해당한 사람의 손해를 물어주는 것이다.

민관위원회 논의 당시에도 일본의 불법행위에 대한 배상 책임 문제는 핵심 쟁점이었다. 이 때문에 백서도 '보상'과 '배상'을 구분하고 있다.

위원회는 한일청구권협정의 기본 성격을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 차원이 아니라 해방 전 재정적·민사적 채권·채무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라고 못 박았다.

협정 문서에 나와 있는 내용으로는 청구권의 범위가 명확하지 않지만, 협상 과정에서 한일 양국이 강제동원의 불법성을 전혀 논의하지 않았던 점 등을 들며 일본의 불법행위는 청구권 협정의 범위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판단하기도 했다.

즉, 피해자 개인에 대한 '배상' 문제는 청구권 협정에 포함되지 않았고, 일본에서 받은 무상 '3억 불'에는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에서 받아야 했던 임금과 수당, 개인의 재산권, 피해자들에 대한 정치적 차원에서의 '보상'만 포함됐다는 것이다.

실제로 한일 회담 당시 일본 측도 자신들이 주게 될 돈이 불법행위에 대한 배상금이 아닌 정치적 차원의 보상이며, 한국의 경제개발을 지원할 지원금이라는 입장을 일관되게 강조했다.

# 노무현 정부가 지급한 6천억 원의 진실

박정희 정부는 일본에서 받은 청구권 자금 3억 달러 대부분을 경제개발에 사용했다. 실제 피해자 보상에는 10%도 쓰지 않았다. 이마저도 강제동원으로 사망한 유족에 대해서만 1인당 30만 원씩 보상금을 지급했다.

노무현 정부는 2005년 민관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특별법을 만들어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6천억 원의 보상금을 지급했다. 하지만 이는 과거 정부의 미진함을 늦게나마 보상해 주려는 의도였을 뿐 일본 정부의 불법 행위를 우리 정부가 대신 갚아주려 했던 건 아니다.

위원회는 특히 활동을 마치며 낸 보도자료에서 "위안부 문제 등 일본 정부와 군(軍) 등 국가 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 행위는 청구권 협정으로 해결된 것으로 볼 수 없고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이 남아 있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2018년 대법원판결은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에 관한 것으로, 역시 같은 맥락에 있다. 당시 대법원은 "일본 기업들의 반인도적인 불법행위는 일본 정부의 불법 식민지배 및 침략전쟁과 직결됐다"고 전제하고, "원고(강제동원 피해자)들은 피고(일본 기업)들을 상대로 미지급 임금이나 보상금을 청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위자료를 청구하고 있는 것"이라는 점을 판결문에서 밝혔다.

강제동원 피해자 대리인단의 임재성 변호사는 "보상문제는 한일협정에 포함됐다고 본 2005년 민관공동위원회의 정리를 존중해 미불임금에 대해서는 소송을 안 했던 것"이라며 배상과 보상을 구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965년 한일수교회담1965년 한일수교회담

# 한일협정으로 개인청구권도 소멸했다?

다음으로 배·보상의 대상을 국가와 개인으로 구분할 필요가 있다.

국가 간 협정에 따라 개인의 청구권까지 사라지는지 아닌지는 강제동원 피해자 손해배상청구 소송의 또 다른 쟁점이다.

조선일보와 심재철 의원은 2005년 민관공동위원회가 65년 한일협정에 따라 개인청구권을 행사하기 어렵다는 취지로 결론 내렸다고 언급했다. 하지만 민관위원회 자료에 나타난 결론은 다르다. "우리 정부가 일본에 다시 법적 피해보상을 요구하는 것은 신의칙상 곤란"하지만 "피해자 개인들이 '강제동원은 일제의 불법적인 한반도 지배 과정에서 발생한 정신적 물질적 총체적 피해'라는 법적 논거로 일본에 배상을 청구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적고 있다.

"청구권 협정 자체에 의해 한국인 개인의 권리가 직접 소멸한 것은 아니라고 판단됨"
"일본 측도 한일협정으로 개인청구권이 소멸하지 않았으나, 그 후 입법조치를 통해 비로소 소멸함"
또 국가와 달리 개인들의 배상 청구는 가능하다는 의견들도 민관위원회의 백서 곳곳에서 찾을 수 있었다.

특히,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으로 위원회에 참여한 문 대통령은 "개인의 참여나 위임이 없는 상태에서 국가 간 협정으로 개인의 청구권을 어떤 법리로 소멸시킬 수 있는지 검토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개인청구권의 효력에 대해서만큼은 사법부의 판단도 비교적 일관됐는데, 2012년 5월 대법원의 파기환송 선고 이전에도 재판부는 "소멸한 것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일본제철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1심 재판부가 "청구권 협정에 의하여 대한민국 국민에 대한 청구권 자체가 소멸하였다고 볼 수는 없다"(서울중앙지법 2008.4.3. 선고 2005가합16473 판결)고 판시한 것이다.

이어 대법원의 2012년 파기환송, 2018년 확정판결 모두 2005년 민관위의 논의와 결정을 반영하고 있었다.

일본 정부도 한때는 한국민의 개인 청구권을 인정한 것으로 드러났다. 1991년 8월 일본 국회 속기록에는 야나이 순지(柳井俊二) 당시 외무성 조약국장이 "한일 청구권 협정은 한일 양국이 국가로서 가진 외교 보호권을 서로 포기한 것이지 개인의 청구권을 국내법적 의미에서 소멸시킨 것은 아니"라고 밝히고 있다.


한일수교회담 회의록한일수교회담 회의록

# 현 정부 비판 위해 '사법 농단'도 정당화

일본의 경제 보복에 대한 현 정권 책임론은 교묘하게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사법 농단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이어졌다.

심재철 의원은 전 정권의 사법 농단을 "외교 문제에 관해서는 사법부도 행정부의 입장을 듣고 신중하게 판단하려는 사법자제(自制)의 전통을 이었던 것"이었다고 평가하며 "문재인 정권에선 이 같은 사법 자제를 모두 사법 농단이라 보고 처벌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미 앞서 한 현직 고법 부장판사는 "강제동원 판결을 지연시킨 건 외교적 문제를 풀 시간을 준 것"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한때는 일본 정부도 인정했던 강제동원 피해자의 위자료 청구권을, 역사적 진실을 외면한 채 피해자들의 고통에 눈감았던 양 전 대법원장의 사법 농단을 옹호하면서까지 무력화하려는 시도로 해석되는 이유다.


# 그래도 이어지는 "강제동원 피해배상 끝" 주장

이렇게 팩트가 확인되고 있는데도 2005년 민관공동위원회에 참여했던 현직 변호사는 최근 잇따른 언론 인터뷰에서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에 배상 문제가 반영된 것으로 간주한다"고 거듭 주장하고 있다. KBS팩트체크팀은 해당 변호사를 포함 복수의 위원들과 통화했다. 다른 위원들은 "한일협정은 국가 대 국가 차원이었기 때문에 개인 희생자들이 일본 기업을 상대로 문제제기하는 건 막을 수 없다고 봤다"고 말하기도 했다.

2004년 한일수교회담 회의록이 공개됐을 당시 국민들을 아프게 했던 것은 협상의 결과뿐만이 아니라 과거 우리 정부가 식민지배의 책임조차 따져 묻지 못했던 굴욕적인 태도였다.

한일협정 이후 50년이 넘게 흘렀지만, 국민들을 아프게 하는 건 여전히 우리 내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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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7-21 10:04:17
    • 수정2019-07-21 10:04:30
    취재후·사건후
# 팩트체크 후에도 계속되는 논란

일본의 갑작스런 수출 규제로 시작된 한일 갈등 국면이 길어지면서 불똥이 우리 정부에게도 튄 모양새다.

일본의 수출 규제에 나선 건 지난해 우리 대법원이 일제강점기 전범 기업에 강제동원됐던 피해자들의 손을 들어준 데 대한 일종의 보복 성격인데, 일부 언론과 정치인은 대법원이 그 원인을 제공해 일본과의 신뢰 관계를 훼손했다며 질책했다.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 당시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손해배상이 끝났는데, 대법원이 이걸 무리하게 인정해 주려다 이 사달이 났다는 것이다.

노무현 정부도 소환됐다. 노무현 정부도 이 부분을 인정했는데 문재인 정부가, 김명수 대법원이 뒤집었다는 주장이다.

2019년 7월 17일 KBS 뉴스9 <팩트체크K>에서 이 같은 주장은 사실이 아니라고 따져 밝혔지만, 여전히 같은 주장을 반복하는 기사와 주장이 끊이지 않고 있다.



# "노무현 정부 때 강제동원 문제 끝났다고 결론" 주장 살펴보니….

조선일보는 2019년 7월 17일 자 <"강제징용 보상은 1965년 청구권 협정에 포함" 노무현 정부 당시 민관 공동위서 결론 낸 사안>이라는 기사에서 "한·일 관계를 '전후 최악'의 상태로 몰고 온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문제는 2005년 8월 노무현 정부 당시 민관 공동위원회가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에 반영됐다'고 발표했던 사안"이라고 보도했다.

이어 "민관공동위의 결론은 '1965년 협정 체결 당시 제반 상황을 고려할 때 국가가 어떠한 경우에도 개인 권리를 소멸시킬 수 없다는 주장을 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며 "개인 청구권은 살아있지만 65년 협정에 따라 행사하기 어렵다는 취지였다"고 적었다.

같은 날 아침 자유한국당 회의에서 나온 심재철 의원의 발언은 해당 보도를 그대로 베낀 듯했다. (심 의원은 KBS팩트체크팀에게 외교 전문가로부터 들은 내용이라고 밝혔다.)

"민관위가 당시 내린 공동 결론은, 개인 청구권은 살아있지만 65년 협정에 따라 행사하기 어렵다는 것"이었고 "일본에 다시 법적 피해 보상을 요구하는 것은 신의칙상 곤란하다는 국제법의 룰에 따라 강제징용 배상 문제는 끝난 것으로 인식됐다"는 것이다.

2005년 노무현 정부가 한일협정으로 강제동원 피해 문제가 정리됐다고 봤는지, 피해자 개인이 일본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할 권리가 없어졌다고 봤는지 좀 더 자세히 정리해봤다.


2005년 민관공동위원회 회의 모습
# 노무현 정부 '민·관 공동위원회'는 어떤 곳?

1990년대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피해보상 소송은 일본 법원에서 번번이 가로막혔다. 일본 법원은 1965년 한일협정 때 강제동원 문제도 마무리됐다는 이유를 내세웠다.

답답했던 강제동원 희생자 유족 단체들은 정부를 상대로 한일협정의 구체적인 내용을 공개하라고 요구했고, 2004년 2월 서울행정법원은 협정 관련 자료를 공개하라며 피해자 단체의 손을 들어줬다.

한일협정 문서가 공개되자 논란은 더 커졌다. 우리 정부의 굴욕적인 한일협정 과정이 문서에 고스란히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정부가 한일협정으로 개인청구권을 소멸시키고, 그 대가로 일본 정부에서 돈을 받아놓고도 실제 피해자들에게는 제대로 보상하지 않았다는 비난이 제기됐다.

2005년 3월 노무현 정부는 민관공동위원회를 꾸려 한일협정의 법리적 쟁점을 다시 따져보고, 피해자들을 위한 대책을 마련하기로 했다.

정부 측 위원 9명과 민간위원 10명 등 모두 21명으로 위원회가 구성됐다. 여기에는 당시 국무총리였던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이었던 문재인 대통령도 포함됐다.

당시 민관위원회의 활동과 논의 내용, 결론 등은 백서(「국무총리실 한일수교회담 문서공개 등 대책기획단 활동 백서」)와 보도자료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중요한 키워드가 아래 표로 구분한 '보상과 배상', '국가와 개인'이다.


2005년 민관공동위원회 판단 취지
# '보상'과 '배상'의 문제

먼저 '보상'과 '배상' 문제, '보상'은 재산상의 손실에 관해 지급하는 것이고, '배상'은 남의 권리를 침해(불법 행위)한 사람이 침해당한 사람의 손해를 물어주는 것이다.

민관위원회 논의 당시에도 일본의 불법행위에 대한 배상 책임 문제는 핵심 쟁점이었다. 이 때문에 백서도 '보상'과 '배상'을 구분하고 있다.

위원회는 한일청구권협정의 기본 성격을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 차원이 아니라 해방 전 재정적·민사적 채권·채무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라고 못 박았다.

협정 문서에 나와 있는 내용으로는 청구권의 범위가 명확하지 않지만, 협상 과정에서 한일 양국이 강제동원의 불법성을 전혀 논의하지 않았던 점 등을 들며 일본의 불법행위는 청구권 협정의 범위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판단하기도 했다.

즉, 피해자 개인에 대한 '배상' 문제는 청구권 협정에 포함되지 않았고, 일본에서 받은 무상 '3억 불'에는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에서 받아야 했던 임금과 수당, 개인의 재산권, 피해자들에 대한 정치적 차원에서의 '보상'만 포함됐다는 것이다.

실제로 한일 회담 당시 일본 측도 자신들이 주게 될 돈이 불법행위에 대한 배상금이 아닌 정치적 차원의 보상이며, 한국의 경제개발을 지원할 지원금이라는 입장을 일관되게 강조했다.

# 노무현 정부가 지급한 6천억 원의 진실

박정희 정부는 일본에서 받은 청구권 자금 3억 달러 대부분을 경제개발에 사용했다. 실제 피해자 보상에는 10%도 쓰지 않았다. 이마저도 강제동원으로 사망한 유족에 대해서만 1인당 30만 원씩 보상금을 지급했다.

노무현 정부는 2005년 민관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특별법을 만들어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6천억 원의 보상금을 지급했다. 하지만 이는 과거 정부의 미진함을 늦게나마 보상해 주려는 의도였을 뿐 일본 정부의 불법 행위를 우리 정부가 대신 갚아주려 했던 건 아니다.

위원회는 특히 활동을 마치며 낸 보도자료에서 "위안부 문제 등 일본 정부와 군(軍) 등 국가 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 행위는 청구권 협정으로 해결된 것으로 볼 수 없고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이 남아 있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2018년 대법원판결은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에 관한 것으로, 역시 같은 맥락에 있다. 당시 대법원은 "일본 기업들의 반인도적인 불법행위는 일본 정부의 불법 식민지배 및 침략전쟁과 직결됐다"고 전제하고, "원고(강제동원 피해자)들은 피고(일본 기업)들을 상대로 미지급 임금이나 보상금을 청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위자료를 청구하고 있는 것"이라는 점을 판결문에서 밝혔다.

강제동원 피해자 대리인단의 임재성 변호사는 "보상문제는 한일협정에 포함됐다고 본 2005년 민관공동위원회의 정리를 존중해 미불임금에 대해서는 소송을 안 했던 것"이라며 배상과 보상을 구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965년 한일수교회담
# 한일협정으로 개인청구권도 소멸했다?

다음으로 배·보상의 대상을 국가와 개인으로 구분할 필요가 있다.

국가 간 협정에 따라 개인의 청구권까지 사라지는지 아닌지는 강제동원 피해자 손해배상청구 소송의 또 다른 쟁점이다.

조선일보와 심재철 의원은 2005년 민관공동위원회가 65년 한일협정에 따라 개인청구권을 행사하기 어렵다는 취지로 결론 내렸다고 언급했다. 하지만 민관위원회 자료에 나타난 결론은 다르다. "우리 정부가 일본에 다시 법적 피해보상을 요구하는 것은 신의칙상 곤란"하지만 "피해자 개인들이 '강제동원은 일제의 불법적인 한반도 지배 과정에서 발생한 정신적 물질적 총체적 피해'라는 법적 논거로 일본에 배상을 청구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적고 있다.

"청구권 협정 자체에 의해 한국인 개인의 권리가 직접 소멸한 것은 아니라고 판단됨"
"일본 측도 한일협정으로 개인청구권이 소멸하지 않았으나, 그 후 입법조치를 통해 비로소 소멸함"
또 국가와 달리 개인들의 배상 청구는 가능하다는 의견들도 민관위원회의 백서 곳곳에서 찾을 수 있었다.

특히,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으로 위원회에 참여한 문 대통령은 "개인의 참여나 위임이 없는 상태에서 국가 간 협정으로 개인의 청구권을 어떤 법리로 소멸시킬 수 있는지 검토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개인청구권의 효력에 대해서만큼은 사법부의 판단도 비교적 일관됐는데, 2012년 5월 대법원의 파기환송 선고 이전에도 재판부는 "소멸한 것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일본제철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1심 재판부가 "청구권 협정에 의하여 대한민국 국민에 대한 청구권 자체가 소멸하였다고 볼 수는 없다"(서울중앙지법 2008.4.3. 선고 2005가합16473 판결)고 판시한 것이다.

이어 대법원의 2012년 파기환송, 2018년 확정판결 모두 2005년 민관위의 논의와 결정을 반영하고 있었다.

일본 정부도 한때는 한국민의 개인 청구권을 인정한 것으로 드러났다. 1991년 8월 일본 국회 속기록에는 야나이 순지(柳井俊二) 당시 외무성 조약국장이 "한일 청구권 협정은 한일 양국이 국가로서 가진 외교 보호권을 서로 포기한 것이지 개인의 청구권을 국내법적 의미에서 소멸시킨 것은 아니"라고 밝히고 있다.


한일수교회담 회의록
# 현 정부 비판 위해 '사법 농단'도 정당화

일본의 경제 보복에 대한 현 정권 책임론은 교묘하게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사법 농단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이어졌다.

심재철 의원은 전 정권의 사법 농단을 "외교 문제에 관해서는 사법부도 행정부의 입장을 듣고 신중하게 판단하려는 사법자제(自制)의 전통을 이었던 것"이었다고 평가하며 "문재인 정권에선 이 같은 사법 자제를 모두 사법 농단이라 보고 처벌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미 앞서 한 현직 고법 부장판사는 "강제동원 판결을 지연시킨 건 외교적 문제를 풀 시간을 준 것"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한때는 일본 정부도 인정했던 강제동원 피해자의 위자료 청구권을, 역사적 진실을 외면한 채 피해자들의 고통에 눈감았던 양 전 대법원장의 사법 농단을 옹호하면서까지 무력화하려는 시도로 해석되는 이유다.


# 그래도 이어지는 "강제동원 피해배상 끝" 주장

이렇게 팩트가 확인되고 있는데도 2005년 민관공동위원회에 참여했던 현직 변호사는 최근 잇따른 언론 인터뷰에서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에 배상 문제가 반영된 것으로 간주한다"고 거듭 주장하고 있다. KBS팩트체크팀은 해당 변호사를 포함 복수의 위원들과 통화했다. 다른 위원들은 "한일협정은 국가 대 국가 차원이었기 때문에 개인 희생자들이 일본 기업을 상대로 문제제기하는 건 막을 수 없다고 봤다"고 말하기도 했다.

2004년 한일수교회담 회의록이 공개됐을 당시 국민들을 아프게 했던 것은 협상의 결과뿐만이 아니라 과거 우리 정부가 식민지배의 책임조차 따져 묻지 못했던 굴욕적인 태도였다.

한일협정 이후 50년이 넘게 흘렀지만, 국민들을 아프게 하는 건 여전히 우리 내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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