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다녀갔어요” 한보 4남이 21년 만에 잡힌 이유는?

입력 2019.08.01 (11:36) 수정 2019.08.01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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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어느 토요일 오전.

한보그룹 정태수 회장의 넷째 아들, 정한근 씨가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했습니다.

21년 만에 한국 땅을 밟은 정 씨는 점퍼에 달린 모자를 쓴 채 눈을 꼭 감았습니다. 얼굴은 검고 수염이 자라있었습니다. '재벌 2세' 시절 TV에 나오던 하얗고 통통한 얼굴의 30대와는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어디에 있습니까?" 취재진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질문을 피해 걷던 정 씨는 잠시 휘청거리기도 했습니다.

"건강이 어디 안 좋은가요?" 그를 데려온 검찰 관계자에게 물었습니다. "비행시간이 길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건강, 괜찮아요." 함께 긴 비행을 했을 텐데, 검찰 관계자들은 정 씨와 달리 씩씩해 보였습니다.

사실 정 씨는 한국행 비행시간보다 더 긴 시간, 쫓기고 있었습니다.

도주 전 검찰 조사를 받고 나오는 정한근 씨도주 전 검찰 조사를 받고 나오는 정한근 씨

"아버지가 다녀갔습니다."

21년 동안 꽁꽁 숨어지냈던 정한근 씨, 오랜 친구와 현지 한국인 등 협력자 덕분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이제 와서 그의 위치를 알렸을까요?

체포 공조자 중 큰 공을 세운 건 정 씨의 자녀였습니다.

정 씨 자녀는 캐나다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었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숨겨둔 재산, 이 재산을 근거로 캐나다 시민권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도망자 신세지만 신분을 세탁한 '가짜 여권'으로 정 씨는 자녀를 만나기 위해 태연하게 캐나다를 오가곤 했습니다.

'아버지가 다녀갔다' 자녀들은 이 사실을 검찰에 알렸습니다. 물론 직접 알린 것은 아닙니다. 대검찰청 국제협력단은 자녀들의 SNS를 주목하고 있었습니다.

이따금 올린 사진에는 아버지 정한근이 다녀간 흔적이 남았고, 검찰은 이 날짜와 장소를 분석했습니다. 사진이 올라온 날짜 전후로 캐나다에 들어간 인물을 추적했습니다. 검찰이 추정하고 있던 정 씨의 '가짜 명의 여권'이 잡혔습니다. 정 씨가 오간 국가와 행적을 추적할 단서가 됐습니다.

에콰도르 현지에서 정태수 회장의 장례를 치르고 있는 정한근 씨에콰도르 현지에서 정태수 회장의 장례를 치르고 있는 정한근 씨

검찰이 알렸다. "어서 도망가세요"

그렇게 아무도 모르게 쫓기고 있던 정 씨는 지난 6월, 검찰 작전을 눈치챘습니다. 한국 검찰이 에콰도르 거주지를 파악하고 자신을 잡으러 다닌다는 소식을 들은 겁니다.

정 씨는 아버지 정태수 회장과 오래 머무르던 안전하고 화려한 도피처를 버리기로 했습니다. 검찰이 이렇게 조심성 없이 추적하다니…. 하지만 덫이었습니다.

애초 검찰이 에콰도르에서 정 씨 부자를 잡으려고 한 건 맞습니다. 하지만 에콰도르는 우리와 범죄인도 조약을 맺지 않은 국가였습니다. 정태수 씨든 정한근 씨든 바로 눈앞에 보여도, 에콰도르 땅 위에 있는 이상 우리 검찰 손으로는 체포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국가 간 협조 작업을 했지만, 체포와 인도까지 외교적 절차가 쉽지는 않았습니다. 그 사이 어디론가 사라지면 다시 첫 단계부터 찾아야 하는 상황.

검찰은 전략을 바꿨습니다. 정한근이 아예 에콰도르를 뜨게 하는 작전이었습니다.

'검찰이 에콰도르에서 당신을 쫓고 있다. 도망가라.' 정보를 일부러 흘렸습니다. 그리고 먹혔습니다. 정한근은 짐을 꾸렸습니다.

정한근 씨가 에콰도르에서 도주하면서 챙긴 유골함정한근 씨가 에콰도르에서 도주하면서 챙긴 유골함

검찰은 두 가지를 노렸습니다.

하나는 확실한 포위망. 에콰도르 정부가 정 씨를 체포하는 절차는 복잡하지만, 정 씨의 '출국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건 가능했습니다. 출국 예상 국가인 파나마와는 이미 공조를 끝냈기 때문에, 정 씨가 파나마에 도착만 한다면 묶어둘 수 있었습니다.

또 하나는 정 씨의 '짐'이었습니다. 만약 정 씨를 에콰도르의 한 골목에서 체포했다면, 정 씨는 맨몸에 빈손이었겠지요. 그렇다면 검찰은 아무런 증거 없이 정 씨의 진술에만 의지해, 숨은 재산과 행적 등을 캐야 합니다.

하지만 검찰을 따돌릴 수 있다고 여긴 정 씨는 중요한 짐을 지니고 도주에 나섰습니다. 아버지 유골함과 서류, 노트북, 내용을 지우지 못한 핸드폰까지…. 정 씨의 가방 무게만 20kg이 넘었습니다. 오롯하게 검찰이 확보해 증거가 됐습니다.

故 정태수 한보그룹 회장故 정태수 한보그룹 회장

"미국만은 피하자"

그렇게 파나마에서 잡힌 정 씨는 여권을 반납하고 긴 한국행을 시작했습니다. 미국을 경유해오면 빨랐지만, 검찰은 더욱더 먼 길을 택했습니다.

국적기에 타기 전까지 정 씨는 법적으로는 체포되지 않은 상태. '우리 땅'으로 치는 국적기에서만 한국 검찰에게 체포 권한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칫 미국을 거쳐오다가 정 씨가 "시민권자"라며 미국에 호소하면 상황이 복잡해질 수 있었습니다. 가짜 명의로 만든 시민권이지만 이를 확인하는 절차를 거치고, 그렇게 미국에서 소송까지 이어지면 정 씨 송환까지 몇 년씩 걸릴 수도 있었습니다.

정 씨의 국내 재판 시효는 2023년. 1년만 늦게 송환돼도, 정 씨가 한국에서 공판을 2년 이상 끌며 재판을 그대로 종결시켜버릴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하루도 늦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검찰은 미국 땅을 피해, 브라질 상파울루와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를 거쳐 돌아돌아 왔습니다.

정 씨는 국적기에 타기 전, '아프다'며 치료를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그가 생각하는 마지막 기회였을까요. 국적기에 타는 순간 체포된다는 걸 아마 정 씨도 알았을 겁니다. 검찰 직원들은 이 과정까지 모두 사진으로 증거를 남기며, 혹여 자해할 가능성에도 대비해 뜬 눈으로 곁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국적기에 탄 순간, 21년 만에 정 씨는 검찰에 체포됐습니다.

322억 원 횡령 혐의를 받는 정 씨의 재판은 지난달 18일 시작됐습니다. 검찰은 정 씨 부자의 범죄수익을 찾기 위해 수사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정 씨는 잡혔지만, 그의 재산은 여전히 쫓기고 있는 셈이지요. 이 역시 긴 추적이 예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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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빠가 다녀갔어요” 한보 4남이 21년 만에 잡힌 이유는?
    • 입력 2019-08-01 11:36:33
    • 수정2019-08-01 15:14:33
    취재K
지난 6월 어느 토요일 오전.

한보그룹 정태수 회장의 넷째 아들, 정한근 씨가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했습니다.

21년 만에 한국 땅을 밟은 정 씨는 점퍼에 달린 모자를 쓴 채 눈을 꼭 감았습니다. 얼굴은 검고 수염이 자라있었습니다. '재벌 2세' 시절 TV에 나오던 하얗고 통통한 얼굴의 30대와는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어디에 있습니까?" 취재진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질문을 피해 걷던 정 씨는 잠시 휘청거리기도 했습니다.

"건강이 어디 안 좋은가요?" 그를 데려온 검찰 관계자에게 물었습니다. "비행시간이 길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건강, 괜찮아요." 함께 긴 비행을 했을 텐데, 검찰 관계자들은 정 씨와 달리 씩씩해 보였습니다.

사실 정 씨는 한국행 비행시간보다 더 긴 시간, 쫓기고 있었습니다.

도주 전 검찰 조사를 받고 나오는 정한근 씨
"아버지가 다녀갔습니다."

21년 동안 꽁꽁 숨어지냈던 정한근 씨, 오랜 친구와 현지 한국인 등 협력자 덕분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이제 와서 그의 위치를 알렸을까요?

체포 공조자 중 큰 공을 세운 건 정 씨의 자녀였습니다.

정 씨 자녀는 캐나다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었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숨겨둔 재산, 이 재산을 근거로 캐나다 시민권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도망자 신세지만 신분을 세탁한 '가짜 여권'으로 정 씨는 자녀를 만나기 위해 태연하게 캐나다를 오가곤 했습니다.

'아버지가 다녀갔다' 자녀들은 이 사실을 검찰에 알렸습니다. 물론 직접 알린 것은 아닙니다. 대검찰청 국제협력단은 자녀들의 SNS를 주목하고 있었습니다.

이따금 올린 사진에는 아버지 정한근이 다녀간 흔적이 남았고, 검찰은 이 날짜와 장소를 분석했습니다. 사진이 올라온 날짜 전후로 캐나다에 들어간 인물을 추적했습니다. 검찰이 추정하고 있던 정 씨의 '가짜 명의 여권'이 잡혔습니다. 정 씨가 오간 국가와 행적을 추적할 단서가 됐습니다.

에콰도르 현지에서 정태수 회장의 장례를 치르고 있는 정한근 씨
검찰이 알렸다. "어서 도망가세요"

그렇게 아무도 모르게 쫓기고 있던 정 씨는 지난 6월, 검찰 작전을 눈치챘습니다. 한국 검찰이 에콰도르 거주지를 파악하고 자신을 잡으러 다닌다는 소식을 들은 겁니다.

정 씨는 아버지 정태수 회장과 오래 머무르던 안전하고 화려한 도피처를 버리기로 했습니다. 검찰이 이렇게 조심성 없이 추적하다니…. 하지만 덫이었습니다.

애초 검찰이 에콰도르에서 정 씨 부자를 잡으려고 한 건 맞습니다. 하지만 에콰도르는 우리와 범죄인도 조약을 맺지 않은 국가였습니다. 정태수 씨든 정한근 씨든 바로 눈앞에 보여도, 에콰도르 땅 위에 있는 이상 우리 검찰 손으로는 체포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국가 간 협조 작업을 했지만, 체포와 인도까지 외교적 절차가 쉽지는 않았습니다. 그 사이 어디론가 사라지면 다시 첫 단계부터 찾아야 하는 상황.

검찰은 전략을 바꿨습니다. 정한근이 아예 에콰도르를 뜨게 하는 작전이었습니다.

'검찰이 에콰도르에서 당신을 쫓고 있다. 도망가라.' 정보를 일부러 흘렸습니다. 그리고 먹혔습니다. 정한근은 짐을 꾸렸습니다.

정한근 씨가 에콰도르에서 도주하면서 챙긴 유골함
검찰은 두 가지를 노렸습니다.

하나는 확실한 포위망. 에콰도르 정부가 정 씨를 체포하는 절차는 복잡하지만, 정 씨의 '출국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건 가능했습니다. 출국 예상 국가인 파나마와는 이미 공조를 끝냈기 때문에, 정 씨가 파나마에 도착만 한다면 묶어둘 수 있었습니다.

또 하나는 정 씨의 '짐'이었습니다. 만약 정 씨를 에콰도르의 한 골목에서 체포했다면, 정 씨는 맨몸에 빈손이었겠지요. 그렇다면 검찰은 아무런 증거 없이 정 씨의 진술에만 의지해, 숨은 재산과 행적 등을 캐야 합니다.

하지만 검찰을 따돌릴 수 있다고 여긴 정 씨는 중요한 짐을 지니고 도주에 나섰습니다. 아버지 유골함과 서류, 노트북, 내용을 지우지 못한 핸드폰까지…. 정 씨의 가방 무게만 20kg이 넘었습니다. 오롯하게 검찰이 확보해 증거가 됐습니다.

故 정태수 한보그룹 회장
"미국만은 피하자"

그렇게 파나마에서 잡힌 정 씨는 여권을 반납하고 긴 한국행을 시작했습니다. 미국을 경유해오면 빨랐지만, 검찰은 더욱더 먼 길을 택했습니다.

국적기에 타기 전까지 정 씨는 법적으로는 체포되지 않은 상태. '우리 땅'으로 치는 국적기에서만 한국 검찰에게 체포 권한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칫 미국을 거쳐오다가 정 씨가 "시민권자"라며 미국에 호소하면 상황이 복잡해질 수 있었습니다. 가짜 명의로 만든 시민권이지만 이를 확인하는 절차를 거치고, 그렇게 미국에서 소송까지 이어지면 정 씨 송환까지 몇 년씩 걸릴 수도 있었습니다.

정 씨의 국내 재판 시효는 2023년. 1년만 늦게 송환돼도, 정 씨가 한국에서 공판을 2년 이상 끌며 재판을 그대로 종결시켜버릴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하루도 늦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검찰은 미국 땅을 피해, 브라질 상파울루와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를 거쳐 돌아돌아 왔습니다.

정 씨는 국적기에 타기 전, '아프다'며 치료를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그가 생각하는 마지막 기회였을까요. 국적기에 타는 순간 체포된다는 걸 아마 정 씨도 알았을 겁니다. 검찰 직원들은 이 과정까지 모두 사진으로 증거를 남기며, 혹여 자해할 가능성에도 대비해 뜬 눈으로 곁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국적기에 탄 순간, 21년 만에 정 씨는 검찰에 체포됐습니다.

322억 원 횡령 혐의를 받는 정 씨의 재판은 지난달 18일 시작됐습니다. 검찰은 정 씨 부자의 범죄수익을 찾기 위해 수사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정 씨는 잡혔지만, 그의 재산은 여전히 쫓기고 있는 셈이지요. 이 역시 긴 추적이 예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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