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태지·성수대교…90년대는 우리에게 무엇이었을까

입력 2019.08.28 (14:53) 수정 2019.08.28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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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벌새’ (29일 개봉)

25년 전이다. 투투의 '일과 이분의 일', 마로니에의 '칵테일 사랑'이 KBS '가요톱10'에서 1, 2위를 다퉜다. 서태지와 아이들을 따로 말할 필요는 없겠다. 듀스, 핑클, 김건모, 신승훈이 우리를 즐겁게 했다. 장동건·심은하·손지창이 활약한 '마지막 승부', 차인표가 검지를 흔들던 '사랑을 그대 품 안에' 등 미니시리즈는 밤마다 시청자들을 TV 앞에 앉혔다. 충무로에선 기존 한국 영화의 관습을 벗어나려는 기류가 태동하고 있었다. '너에게 나를 보낸다'(감독 장선우)와 '게임의 법칙'(감독 장현수), '세상 밖으로'(감독 여균동)가 그때 나왔다. 1994년 우리는 새롭고 재밌는 것들에 들떠 있었다.

그 해 10월 21일 아침, 단짝 친구와 함께 강남구 집에서 성동구 학교로 향하던 주인공은 아차 싶었다. '오늘 미술 시간 있는데, 스케치북을 놓고 나왔어.' 시내버스에 친구를 먼저 태워 보낸 다음 부랴부랴 스케치북을 챙겨 택시를 잡아 탔지만, 성수대교는 더 이상 건널 수 있는 다리가 아니었다. 이어폰 한쪽씩을 나눠 끼고 피노키오의 '사랑과 우정 사이'를 듣곤 했던 친구는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버스를 타지 않아 살아남은 주인공은 3년 뒤 재개통한 성수대교를 찾는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단편 영화 '기념촬영'(1997, 감독 정윤철) 이야기다.

94년 대치동 살던 여학생이 보고 듣고 느낀 것

그로부터 20여 년 뒤, 베를린 영화제 등 국내외 영화제에서 25개 상을 휩쓸며 '괴물 같은 데뷔작'이라는 말을 듣는 영화 '벌새'(감독 김보라)가 29일 개봉한다. 20년 사이 스크린에 담긴 성수대교의 풍경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주인공 은희(박지후)는 94년 대치동 복도식 아파트에 사는 중학교 2학년이다. 고등학생 언니는 매일 한강을 건너 강북 학교에 다닌다. 단짝 친구와 나누는 대화는 이렇다. "너네 오빠는 어떻게 때려?" "우리 오빠는 골프채로 때려. 넌?" 은희네 집의 모든 질서는 아빠가 정하는데, 그 중심에는 중3 오빠의 입시가 있다.

차별과 폭력에 상시 노출돼 있는 은희가 재개발 예정지를 지나 학교에 가면 우열반 이동수업이 기다리고 있다. 많이들 그랬듯 남자 친구를 사귀고 키스를 감행하지만 그게 인생에서 그다지 중요한 일인 것 같지는 않다고, 이후 은희는 생각했다. 사상 최악의 폭염이 닥친 그해 여름 북한 김일성 주석의 사망도 그의 삶을 스치듯 지나간다. 하지만 성수대교 붕괴는 이 여학생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모두 대치동에서 중학교에 다닌 감독이 보고 듣고 느낀 일들이다.

"우리는 무엇을 놓치고 달려온 걸까"

"90년대를 정직하게 기억하고 싶었다"는 김 감독은 '벌새'의 배경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성수대교 붕괴 이후 우리가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보고 싶었어요. 올림픽을 치른 우리나라에는 서구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열망이 컸고, 이런 거대한 공기 속에서 다리가 무너졌고, 성수대교의 물리적 붕괴와 영화 속 관계의 붕괴가 맞닿아 있다고 생각했어요." (당시 사고 조사 결과 올림픽을 앞두고 86년 개통한 올림픽대로와 94년 4월 개통한 동부간선도로가 성수대교를 통해 이어지면서 통행량을 폭증시켰으나, 하중 점검은 이뤄지지 않았음이 밝혀졌다.)

감독의 설명은 이어진다. "이 영화 시놉시스를 2012년에 썼는데, 이후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을 때 강한 기시감 같은 걸 느꼈어요. 어떤 식으로든 우리가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는 것 같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여기저기서 곪은 상처처럼 드러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요. 94년 은희가 가족과 학교로부터 받은 억압, 그런 사회적 공기가 여전히 한국 사회에 있기 때문에 이 영화에 많은 분들이 공감해주는 것 같아요. 지금 우리가 당시의 자장 속에 머물러 있는 느낌이 있어요."

영화 ‘유열의 음악앨범’ (28일 개봉)영화 ‘유열의 음악앨범’ (28일 개봉)

'죄 없는 죄책감'이라는 집단 기억

우연히도 같은 주 개봉하는 '유열의 음악앨범'(감독 정지우) 역시 1994년에서 출발한다. 90년대 배경의 상업 멜로영화로서 당시 재난의 풍경은 대부분 지웠다. 그런데도 앞만 보고 달리는 우리 사회의 개발 논리와 속도에 대한 욕망 같은 것들이 영화의 바탕에 깔려 있다. 주인공 현우(정해인)는 친구의 사고를 겪고 죄책감에 시달리는 인물이다. 이는 재난 이후 남겨진 이들에게 주어진 '죄 없는 죄책감'이라는 한국인의 집단 기억이기도 하다.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1997년 IMF 구제금융 사태, 2003년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 세월호 참사에 이르기까지, 잘못한 자들은 따로 있는데도 주변에 남겨진 죄 없는 이들이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IMF 사태를 다룬 영화 '국가부도의 날'(2018, 감독 최국희)에서 역시 마찬가지다. 사태를 바로잡으려고 애쓴 인물일수록 자책한다. 극 중 한국은행 한시현 팀장(김혜수)은 구제 금융만큼은 막아보려고 고군분투한다. "해고가 쉬워지고 비정규직이 늘어나고 실업이 일상이 되는 세상, IMF가 만들어낼 그런 세상이 돼서는 안 됩니다"라는 그의 대사는 오늘을 정확하게 겨냥한다.

"거기도 그럽니까. 그래도 20년이 지났는데, 뭐라도 달라졌겠죠." 드라마 '시그널'(2016, 극본 김은희)에서 이재한 형사(조진웅)의 대사가 지금도 회자되는 건 그래서다. 적잖은 영화와 드라마들이 삐삐와 카세트테이프 녹음기, 거기서 흘러나오는 인기가요를 활용해 추억을 돋운다. 다수의 소비 주체들이 '그때가 좋았지' 하게 되는 것은 당시를 똑똑히 기억할 만큼 먼 과거가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다. 앞만 보고 달리다 재난을 반복하는 이 사회에서 20여 년 전을 그저 예쁜 상품으로만 추억할 일은 아니라는 것이, 90년대를 정직하게 기억하려는 작품들이 우리에게 보내오는 신호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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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태지·성수대교…90년대는 우리에게 무엇이었을까
    • 입력 2019-08-28 14:53:02
    • 수정2019-08-28 15:5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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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벌새’ (29일 개봉)

25년 전이다. 투투의 '일과 이분의 일', 마로니에의 '칵테일 사랑'이 KBS '가요톱10'에서 1, 2위를 다퉜다. 서태지와 아이들을 따로 말할 필요는 없겠다. 듀스, 핑클, 김건모, 신승훈이 우리를 즐겁게 했다. 장동건·심은하·손지창이 활약한 '마지막 승부', 차인표가 검지를 흔들던 '사랑을 그대 품 안에' 등 미니시리즈는 밤마다 시청자들을 TV 앞에 앉혔다. 충무로에선 기존 한국 영화의 관습을 벗어나려는 기류가 태동하고 있었다. '너에게 나를 보낸다'(감독 장선우)와 '게임의 법칙'(감독 장현수), '세상 밖으로'(감독 여균동)가 그때 나왔다. 1994년 우리는 새롭고 재밌는 것들에 들떠 있었다.

그 해 10월 21일 아침, 단짝 친구와 함께 강남구 집에서 성동구 학교로 향하던 주인공은 아차 싶었다. '오늘 미술 시간 있는데, 스케치북을 놓고 나왔어.' 시내버스에 친구를 먼저 태워 보낸 다음 부랴부랴 스케치북을 챙겨 택시를 잡아 탔지만, 성수대교는 더 이상 건널 수 있는 다리가 아니었다. 이어폰 한쪽씩을 나눠 끼고 피노키오의 '사랑과 우정 사이'를 듣곤 했던 친구는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버스를 타지 않아 살아남은 주인공은 3년 뒤 재개통한 성수대교를 찾는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단편 영화 '기념촬영'(1997, 감독 정윤철) 이야기다.

94년 대치동 살던 여학생이 보고 듣고 느낀 것

그로부터 20여 년 뒤, 베를린 영화제 등 국내외 영화제에서 25개 상을 휩쓸며 '괴물 같은 데뷔작'이라는 말을 듣는 영화 '벌새'(감독 김보라)가 29일 개봉한다. 20년 사이 스크린에 담긴 성수대교의 풍경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주인공 은희(박지후)는 94년 대치동 복도식 아파트에 사는 중학교 2학년이다. 고등학생 언니는 매일 한강을 건너 강북 학교에 다닌다. 단짝 친구와 나누는 대화는 이렇다. "너네 오빠는 어떻게 때려?" "우리 오빠는 골프채로 때려. 넌?" 은희네 집의 모든 질서는 아빠가 정하는데, 그 중심에는 중3 오빠의 입시가 있다.

차별과 폭력에 상시 노출돼 있는 은희가 재개발 예정지를 지나 학교에 가면 우열반 이동수업이 기다리고 있다. 많이들 그랬듯 남자 친구를 사귀고 키스를 감행하지만 그게 인생에서 그다지 중요한 일인 것 같지는 않다고, 이후 은희는 생각했다. 사상 최악의 폭염이 닥친 그해 여름 북한 김일성 주석의 사망도 그의 삶을 스치듯 지나간다. 하지만 성수대교 붕괴는 이 여학생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모두 대치동에서 중학교에 다닌 감독이 보고 듣고 느낀 일들이다.

"우리는 무엇을 놓치고 달려온 걸까"

"90년대를 정직하게 기억하고 싶었다"는 김 감독은 '벌새'의 배경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성수대교 붕괴 이후 우리가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보고 싶었어요. 올림픽을 치른 우리나라에는 서구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열망이 컸고, 이런 거대한 공기 속에서 다리가 무너졌고, 성수대교의 물리적 붕괴와 영화 속 관계의 붕괴가 맞닿아 있다고 생각했어요." (당시 사고 조사 결과 올림픽을 앞두고 86년 개통한 올림픽대로와 94년 4월 개통한 동부간선도로가 성수대교를 통해 이어지면서 통행량을 폭증시켰으나, 하중 점검은 이뤄지지 않았음이 밝혀졌다.)

감독의 설명은 이어진다. "이 영화 시놉시스를 2012년에 썼는데, 이후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을 때 강한 기시감 같은 걸 느꼈어요. 어떤 식으로든 우리가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는 것 같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여기저기서 곪은 상처처럼 드러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요. 94년 은희가 가족과 학교로부터 받은 억압, 그런 사회적 공기가 여전히 한국 사회에 있기 때문에 이 영화에 많은 분들이 공감해주는 것 같아요. 지금 우리가 당시의 자장 속에 머물러 있는 느낌이 있어요."

영화 ‘유열의 음악앨범’ (28일 개봉)
'죄 없는 죄책감'이라는 집단 기억

우연히도 같은 주 개봉하는 '유열의 음악앨범'(감독 정지우) 역시 1994년에서 출발한다. 90년대 배경의 상업 멜로영화로서 당시 재난의 풍경은 대부분 지웠다. 그런데도 앞만 보고 달리는 우리 사회의 개발 논리와 속도에 대한 욕망 같은 것들이 영화의 바탕에 깔려 있다. 주인공 현우(정해인)는 친구의 사고를 겪고 죄책감에 시달리는 인물이다. 이는 재난 이후 남겨진 이들에게 주어진 '죄 없는 죄책감'이라는 한국인의 집단 기억이기도 하다.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1997년 IMF 구제금융 사태, 2003년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 세월호 참사에 이르기까지, 잘못한 자들은 따로 있는데도 주변에 남겨진 죄 없는 이들이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IMF 사태를 다룬 영화 '국가부도의 날'(2018, 감독 최국희)에서 역시 마찬가지다. 사태를 바로잡으려고 애쓴 인물일수록 자책한다. 극 중 한국은행 한시현 팀장(김혜수)은 구제 금융만큼은 막아보려고 고군분투한다. "해고가 쉬워지고 비정규직이 늘어나고 실업이 일상이 되는 세상, IMF가 만들어낼 그런 세상이 돼서는 안 됩니다"라는 그의 대사는 오늘을 정확하게 겨냥한다.

"거기도 그럽니까. 그래도 20년이 지났는데, 뭐라도 달라졌겠죠." 드라마 '시그널'(2016, 극본 김은희)에서 이재한 형사(조진웅)의 대사가 지금도 회자되는 건 그래서다. 적잖은 영화와 드라마들이 삐삐와 카세트테이프 녹음기, 거기서 흘러나오는 인기가요를 활용해 추억을 돋운다. 다수의 소비 주체들이 '그때가 좋았지' 하게 되는 것은 당시를 똑똑히 기억할 만큼 먼 과거가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다. 앞만 보고 달리다 재난을 반복하는 이 사회에서 20여 년 전을 그저 예쁜 상품으로만 추억할 일은 아니라는 것이, 90년대를 정직하게 기억하려는 작품들이 우리에게 보내오는 신호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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