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훈 독도관의 진실]③ 울도군수 심흥택의 다급한 보고

입력 2019.09.02 (07:01) 수정 2019.09.08 (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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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한국 정부가 독도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로 가져가자는 일본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는 처지임은 모두가 잘 아는 사실입니다. 솔직히 말해 한국 정부가 독도가 역사적으로 그의 고유한 영토임을 증명하기 위해 국제 사회에 제시할 증거는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 실정입니다" (이영훈 외, 반일 종족주의 169~170페이지)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의 근거는 1905년 일본의 량코도 영토편입 결정입니다.

1883년 조선인들이 울릉도에 살기 시작했고, 일본 어부들도 울릉도에 머물면서 양측의 갈등은 제법 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1900년 대한제국이 칙령을 공포한 것도 일본에 대해 울릉도와 그 주변 도서의 영유권을 공식적으로 확인하려는 의도였습니다.

그런데도 일본 어민들은 쉽게 울릉도와 독도에서 물러나지 않았습니다. 이 무렵 독도의 강치(바다사자) 어업을 독점하던 나카이 요사부로(中井養三郞)라는 일본인이 '량코도 편입 청원'을 일본 정부에 제출합니다. (일본은 17세기 이후 독도를 송도라고 부르다가, 1849년 프랑스 포경선 리앙쿠르호가 이 섬을 발견해 'Liancourt Rocks(리앙쿠르 락)'이라고 부른 이후 이 섬을 량코도라고 불렀음)

일본 어민이 1934년 독도에서 그물에 잡힌 강치를 끌어올리고 있다. 일본의 남획으로 독도 강치는 멸종됐다. 서해문집 제공일본 어민이 1934년 독도에서 그물에 잡힌 강치를 끌어올리고 있다. 일본의 남획으로 독도 강치는 멸종됐다. 서해문집 제공

그러자 1905년 1월 일본 각의는 이 섬을 죽도(竹島·다케시마)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이고, 영토편입을 선언합니다.

근거는 이렇습니다. "이 무인도는 타국이 점령했다고 인정할만한 증거가 없는 반면, 1903년 이래 나카이 요사부로가 어사(漁舍)를 만들어 어로 활동을 한바 국제법상 점령의 사실이 있다."

즉 주인 없는 무주지를 일본인이 먼저 점령해 살고 시설물을 설치했으며, 이 땅을 일본 정부가 영토 선언했으니 일본의 영토라는 것입니다. (이 고시는 1905년 2월 22일 자로 고시됐는데, 이영훈 교수는 '반일 종족주의'책에서 이 연도를 1904년으로 잘못 기재하고 있음)

이 갑작스러운 영토 선언을 조선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일본은 이 엄청난 영토선언을 이웃 나라 조선에는 정식 통보도 하지 않았습니다. 조선이 알게 된 것은 이듬해인 1906년 3월입니다. (국제법적으로 이 영토선언이 무효인 것은 시리즈 4편에서 소개됩니다)

일본의 조사단이 독도(일본 명칭으로는 죽도)를 시찰한 뒤 울릉도를 방문합니다. 그들은 울도군수 심흥택을 만나 독도(일본 명칭으로는 죽도)를 일본 영토로 편입한 사실을 알립니다. 이에 놀란 심흥택은 이 사실을 강원도 관찰사 이명래에게 보고했고, 이 보고는 중앙정부에도 전달됩니다.

8월 25~26일 실시된 한국군의 독도방어훈련8월 25~26일 실시된 한국군의 독도방어훈련

당시 심흥택의 보고서는, 1906년 독도가 누구 소유인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문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심흥택은 이렇게 보고서에 적었습니다.

"본군(本郡)소속 독도가 먼바다 백 리 밖에 있는데, 일본 관리가 와서 일본 영지(領地)로 삼았다고 한다"

보고서에서 나오듯 심흥택은 독도를 분명히 본군 소속으로, 독도가 우리 관할임을 명명백백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울릉도를 관할하는 울도 군수만큼 울릉도의 관할 범위를 잘 아는 사람이 또 어디 있습니까.

그러자 조정에서는 놀라움을 표하면서 이렇게 지시합니다. "보고는 읽어봤고, 독도 영지설은 전속이 근거가 없으니 섬의 형편과 일본인이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다시 보고하라"(獨島領地之說 全屬無根)

이 대목에서 이영훈 교수는 "중앙정부는 그에 대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면서 독도를 마치 조선이 영토로 여기지 않았다는 식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심흥택의 추가 보고서가 남아 있지 않고, 일본의 영토편입에 조선이 정식으로 항의조차 하지 않았다'는 일본 학자들과 비슷한 시각을 보입니다.

그러나 이는 역사적 진실과 다릅니다. 조선 정부도 "독도 영지설에 대한 전속무근"을 밝히고 있고, 또 항의 문서까지 작성했지만 이미 외교권을 빼앗긴 탓에 발송하지 못한 것입니다. 대한제국 정부의 항의 문서는 규장각에 보관돼 있고 대한제국의 항의 사실은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등 주요 신문에 보도됐습니다.

그리고 그때는 1906년 3월입니다. 을사늑약(1905년 11월) 체결로 한국 정부의 외교권이 넘어갔을 때입니다. 이런 사정을 알고 있는 이 교수지만, 독도에 대한 조선의 무관심만을 강조하는 건 균형을 잃은, 편향된 시각입니다.

이 일이 있는지 4년 뒤인 1910년 우리는 일본에게 주권을 빼앗기고 식민지 신세로 전락합니다. 독도도 당연히 같은 운명이었습니다.

오랜 질곡에서 해방돼 1945년 8월 15일 우리는 해방을 맞습니다. 카이로 선언과 포츠담 선언에 따라 일본은 폭력과 탐욕에 의해 약취한 모든 지역에서 나와야 했습니다. 물론 일본은 "독도는 폭력에 의해 빼앗은 것이 아니라 1905년 평화적으로 선점했다"고 주장합니다.

1946년 1월 29일 자 연합국 최고사령부 지령 제677호. 독도를 ‘TAKE’로 표시하고 한국 관할로 표시했다1946년 1월 29일 자 연합국 최고사령부 지령 제677호. 독도를 ‘TAKE’로 표시하고 한국 관할로 표시했다

그러나 이는 독도가 무주지였다는 일본의 일방적인 시각에 의한 것일 뿐입니다. 태평양 전쟁이 끝난 이후인 1946년 1월 29일 자 연합국 최고사령부 지령 제677호에서도 '울릉도, Liancourt Rocks(독도), 제주도'를 분명히 적시해 일본 영토에서 제외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같은 해 6월 22일 자 연합국 최고 사령부 지령 제1033호에서는 일본 선박의 독도 12해리 이내 접근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은 그래서 터무니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일본은 계속 영유권 주장을 하고 있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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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영훈 독도관의 진실]③ 울도군수 심흥택의 다급한 보고
    • 입력 2019-09-02 07:01:03
    • 수정2019-09-08 07:11:32
    취재K
"오늘날 한국 정부가 독도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로 가져가자는 일본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는 처지임은 모두가 잘 아는 사실입니다. 솔직히 말해 한국 정부가 독도가 역사적으로 그의 고유한 영토임을 증명하기 위해 국제 사회에 제시할 증거는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 실정입니다" (이영훈 외, 반일 종족주의 169~170페이지)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의 근거는 1905년 일본의 량코도 영토편입 결정입니다.

1883년 조선인들이 울릉도에 살기 시작했고, 일본 어부들도 울릉도에 머물면서 양측의 갈등은 제법 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1900년 대한제국이 칙령을 공포한 것도 일본에 대해 울릉도와 그 주변 도서의 영유권을 공식적으로 확인하려는 의도였습니다.

그런데도 일본 어민들은 쉽게 울릉도와 독도에서 물러나지 않았습니다. 이 무렵 독도의 강치(바다사자) 어업을 독점하던 나카이 요사부로(中井養三郞)라는 일본인이 '량코도 편입 청원'을 일본 정부에 제출합니다. (일본은 17세기 이후 독도를 송도라고 부르다가, 1849년 프랑스 포경선 리앙쿠르호가 이 섬을 발견해 'Liancourt Rocks(리앙쿠르 락)'이라고 부른 이후 이 섬을 량코도라고 불렀음)

일본 어민이 1934년 독도에서 그물에 잡힌 강치를 끌어올리고 있다. 일본의 남획으로 독도 강치는 멸종됐다. 서해문집 제공
그러자 1905년 1월 일본 각의는 이 섬을 죽도(竹島·다케시마)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이고, 영토편입을 선언합니다.

근거는 이렇습니다. "이 무인도는 타국이 점령했다고 인정할만한 증거가 없는 반면, 1903년 이래 나카이 요사부로가 어사(漁舍)를 만들어 어로 활동을 한바 국제법상 점령의 사실이 있다."

즉 주인 없는 무주지를 일본인이 먼저 점령해 살고 시설물을 설치했으며, 이 땅을 일본 정부가 영토 선언했으니 일본의 영토라는 것입니다. (이 고시는 1905년 2월 22일 자로 고시됐는데, 이영훈 교수는 '반일 종족주의'책에서 이 연도를 1904년으로 잘못 기재하고 있음)

이 갑작스러운 영토 선언을 조선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일본은 이 엄청난 영토선언을 이웃 나라 조선에는 정식 통보도 하지 않았습니다. 조선이 알게 된 것은 이듬해인 1906년 3월입니다. (국제법적으로 이 영토선언이 무효인 것은 시리즈 4편에서 소개됩니다)

일본의 조사단이 독도(일본 명칭으로는 죽도)를 시찰한 뒤 울릉도를 방문합니다. 그들은 울도군수 심흥택을 만나 독도(일본 명칭으로는 죽도)를 일본 영토로 편입한 사실을 알립니다. 이에 놀란 심흥택은 이 사실을 강원도 관찰사 이명래에게 보고했고, 이 보고는 중앙정부에도 전달됩니다.

8월 25~26일 실시된 한국군의 독도방어훈련
당시 심흥택의 보고서는, 1906년 독도가 누구 소유인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문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심흥택은 이렇게 보고서에 적었습니다.

"본군(本郡)소속 독도가 먼바다 백 리 밖에 있는데, 일본 관리가 와서 일본 영지(領地)로 삼았다고 한다"

보고서에서 나오듯 심흥택은 독도를 분명히 본군 소속으로, 독도가 우리 관할임을 명명백백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울릉도를 관할하는 울도 군수만큼 울릉도의 관할 범위를 잘 아는 사람이 또 어디 있습니까.

그러자 조정에서는 놀라움을 표하면서 이렇게 지시합니다. "보고는 읽어봤고, 독도 영지설은 전속이 근거가 없으니 섬의 형편과 일본인이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다시 보고하라"(獨島領地之說 全屬無根)

이 대목에서 이영훈 교수는 "중앙정부는 그에 대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면서 독도를 마치 조선이 영토로 여기지 않았다는 식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심흥택의 추가 보고서가 남아 있지 않고, 일본의 영토편입에 조선이 정식으로 항의조차 하지 않았다'는 일본 학자들과 비슷한 시각을 보입니다.

그러나 이는 역사적 진실과 다릅니다. 조선 정부도 "독도 영지설에 대한 전속무근"을 밝히고 있고, 또 항의 문서까지 작성했지만 이미 외교권을 빼앗긴 탓에 발송하지 못한 것입니다. 대한제국 정부의 항의 문서는 규장각에 보관돼 있고 대한제국의 항의 사실은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등 주요 신문에 보도됐습니다.

그리고 그때는 1906년 3월입니다. 을사늑약(1905년 11월) 체결로 한국 정부의 외교권이 넘어갔을 때입니다. 이런 사정을 알고 있는 이 교수지만, 독도에 대한 조선의 무관심만을 강조하는 건 균형을 잃은, 편향된 시각입니다.

이 일이 있는지 4년 뒤인 1910년 우리는 일본에게 주권을 빼앗기고 식민지 신세로 전락합니다. 독도도 당연히 같은 운명이었습니다.

오랜 질곡에서 해방돼 1945년 8월 15일 우리는 해방을 맞습니다. 카이로 선언과 포츠담 선언에 따라 일본은 폭력과 탐욕에 의해 약취한 모든 지역에서 나와야 했습니다. 물론 일본은 "독도는 폭력에 의해 빼앗은 것이 아니라 1905년 평화적으로 선점했다"고 주장합니다.

1946년 1월 29일 자 연합국 최고사령부 지령 제677호. 독도를 ‘TAKE’로 표시하고 한국 관할로 표시했다
그러나 이는 독도가 무주지였다는 일본의 일방적인 시각에 의한 것일 뿐입니다. 태평양 전쟁이 끝난 이후인 1946년 1월 29일 자 연합국 최고사령부 지령 제677호에서도 '울릉도, Liancourt Rocks(독도), 제주도'를 분명히 적시해 일본 영토에서 제외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같은 해 6월 22일 자 연합국 최고 사령부 지령 제1033호에서는 일본 선박의 독도 12해리 이내 접근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은 그래서 터무니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일본은 계속 영유권 주장을 하고 있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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