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가 군대 간 이야기②

입력 2019.09.13 (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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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주〉
시사기획 창 ‘트럼프의 선택은(6월 11일 방송)’편에 출연해 트럼프의 뉴욕군사학교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동창생 샌디 매킨토시(Sandy McIntosh)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담은 기고문을 KBS에 보내왔습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중학생 트럼프가 군대에 간 이야기’입니다. 중년 이상 우리나라 남자들이 군대에서 겪었음직한 군대식 문화를 트럼프는 중고등학생 때 경험한 셈인데, 이 시절의 경험이 오늘날의 트럼프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게 매킨토시의 판단입니다. 한반도 비핵화 협상의 주요변수인 트럼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판단에서 번역본을 4회에 걸쳐 싣습니다. 뉴욕에서 시인이자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매킨토시가 직접 겪고 본 트럼프를 쓴 글이기에 좀 긴 감은 있지만 다른 곳에서는 찾기 어려운 1차 정보를 많이 담고 있으며, 소설처럼 잘 읽히는 편입니다. 한 가지 유념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트럼프는 호불호가 극단적으로 갈리는 인물인데 이 글은 트럼프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전형적인 뉴요커의 시각을 담고 있습니다.

4. 로르샤흐 테스트 같았던 군사학교

우리는 서로 달랐지만 도널드와 나는 똑같은 이유로 뉴욕군사학교에 보내졌다. 도널드 아버지나 우리 아버지나 이 이 학교가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아들의 행동을 고쳐줄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지금은 이런 학교들이 쇠퇴일로를 걷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뉴욕군사학교는 꽤 인기가 있었다. 남북전쟁이후 줄곧 그랬다.

남북전쟁은 끔찍한 비극이었다. 군인들은 부상을 입고 절뚝거리며 고향으로 돌아왔다. 군대식 말투를 고향으로 가져온 군인들도 있었다. 그래도 북부에서나 남부에서나 전쟁터에서 돌아온 군인들은 환영을 받았다. 퇴역장교였던 찰스 제퍼슨 라이트는 이 점에 착안해 돈을 벌 목적으로 뉴욕군사학교를 포함해 군사학교 몇 개를 설립했다.

뉴욕군사학교는 시작부터 로르샤흐 테스트 같았다. 어떤 부모들에게 이 학교는 뉴욕 타임즈 매거진에 매주 실리는 광고 문구처럼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는 "질서정연한 학습 환경"을 약속하고 있었다. 다른 부모들에게 이 학교는 변형된 형태의 소년원이었는데 소년법원의 판사들이 격리와 처벌을 위해 추천하는 곳이었다. 또 다른 부모들에게는 사회적 부적응아나 이혼한 가정의 아이들을 내다버리기에 편리한 하치장 같은 곳이었다.

특히 두 종류의 아버지들이 이 학교의 엄한 규율에 환호했다. 쿠바의 풀헨시오 바티스타 같은 라틴 아메리카의 장군들이나 존 고티 같은 마피아 두목들이 그러했는데, 자기 아들이 가업을 잇게 하려고 이 학교에 보내는 경우였다.

도널드는 자신이 못 알아듣는 언어를 말하는 외국 학생들에게 관심이 없었다("걔네들이 널 비웃고 있어" 그는 내게 경고했다). 하지만 나는 걔네들과 사귀면서 많은 걸 배웠다.

가령, 내 룸메이트 오비디오는 과테말라 공무원의 아들이었는데, 같은 방을 쓰던 프랭키와 내게 가끔씩 다른 문화의 통찰력을 선사해주곤 했다.

9월의 어느 날, 우리는 서로 여름방학을 어떻게 보냈는지를 놓고 허풍을 떨고 있었다. 프랭키는 6주 동안 노 젓는 카누와 휘플볼을 할 수 있는 여름 캠프에서 지도원으로 봉사했다고 했다. 나는 비치클럽 수영장에서 스쿠버 다이빙을 배웠다고 자랑했다.

여름방학 때 뭐했냐고 묻자 오비디오는 입을 다물었다. 얘기해보라고 자꾸 졸라대자 오비디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아빠가 나보고 남자다움을 배워야 될 때가 됐다고 했어. 그래서 여름 동안 과테말라시티의 매음굴에 보냈어."

16살짜리들에겐 충격적인 뉴스였다. 한동안 침묵이 흐르고 나자 마침내 프랭키가 말했다. "와우! 시시한 캠프보다 백배 낫네."

5. 학교에 말뚝박은 교관

도널드가 입학했을 때 중학교 과정인 F중대에 배속 받았다. 그 중대의 교관은 두바이어스 소령이었다.

당시 졸업앨범을 보면 도널드는 M1 소총을 들고 부동자세를 하고 있다. 그는 주변의 다른 학생들보다 키가 큰 깡마른 13살이었다. 그 표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도널드가 엄청 떨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바로 앞에서 두바이어스 소령이 노려보고 있었으니까.


시오도어 두바이어스는 학교에 말뚝을 박은 사람이었다.

‘도비’라고도 불리는 두바이어스는 1926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태어나 1942년에 뉴욕군사학교에 입학했다가 곧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 위해 휴학을 했다. 이탈리아의 격전지에서 싸웠다는데, 무솔리니의 시체가 주유소 지붕에 매달려 있는 장면도 봤다고 했다. 뉴욕군사학교로 돌아오고 나서는 만능운동 선수에 맹렬한 승부사로 명성을 날렸다. 권투, 라크로스, 야구, 농구, 축구 등 여러 종목의 학교대표팀에 이름을 올렸다. 졸업반 때는 학생 대표와 반장을 도맡았다. 졸업과 동시에 교장이 그에게 교관으로 학교에 남아달라고 부탁했다. 실제 군대에서는 상병에 불과했지만 학교는 그를 소령으로 대우해주었다. 그 때부터 장장 50년 동안 주말만 빼고는 학교를 떠나지 않았다(먼 친척 한 명이 유럽으로 그를 초청했는데 '이 학교를 떠날 순 없다'면서 거절했다고 했다).

도비에겐 단순무식한 철학이 있었다. 연병장이나 운동장에서 그와 한 편인 추종자가 되거나 아니면 그 반대편에 서거나 둘 중의 하나다. 그와 한 편이면 보상을 받았다. 공부나 문화적인 활동에 시간을 너무 낭비하거나, 그의 편이 아니면 벌을 받고 모욕을 당했다.

"침대에 각을 잡으라고 했는데, 도널드가 할 생각을 안 하는 거야." 도비가 말했다. 그래서 도비는 각을 어떻게 잡는지 가르쳐주려고 나섰다.

어느 전기작가에게 도널드는 말했다. "당시만 해도 교관들이 학생들의 뺨을 때렸어요. 지금 같으면 감옥에 갈 일이죠. 성질이 더러운 교관이었죠. 학생들을 거칠게 다뤘어요. 그냥 살아남는 법을 배우는 수밖에 없어요. 조금이라도 요령을 부리면 득달같이 달려와서 요절을 냈죠."

처음 몇 달 동안 도널드는 몸서리를 쳤다. 도널드는 도비를 보고 아버지를 떠올렸다. 그러나 아버지는 기껏해야 감정적인 체벌을 했지만 도비는 반항하는 학생을 길들이는 훨씬 다양한 방법들을 알고 있었다.

6. 괴롭힘

바닷가 군용텐트에서 만났을 때부터 도널드는 내가 입학하면 겪게 될 괴롭힘을 설명해주었다.

"첫째, 괴롭힘은 학교 규정에 써 있어. 대충 이런 식이지. '모든 동아리는 신참자한테 신고식 규정을 적용한다.'"

군사학교에선 신고식이라는 게 성행했다. 학생들도 교관들도 마찬가지였다. 입학 첫해에는 누구나 의례적인 "신참자" 규정의 적용을 받았다. 가령, ‘암소의 용도는?’ 하고 물으면 신참자는 미리 외워둔 내용을 줄줄 대답해야 한다. 복도에서 선배를 만나면 선배가 잘 지나가도록 벽에 찰싹 붙어야 한다. 명령이 떨어지면 억지로라도 재치기를 해야 한다. 웃기지도 않는 신고식이었다.

졸업반이 가까울수록 규율 위반이나 학업성적 미달에 대한 처벌로서 더 심한 괴롭힘이 따라왔다. 가장 무서운 괴롭힘은 샤워실에서 벌어졌다. 10개에서 15개 사이의 샤워꼭지에서 뜨거운 물이 쏟아져 나온다. 목구멍을 태워버릴 것 같은 뜨거운 증기가 샤워실을 가득 채운다. 괴롭힘의 대상이 되는 학생은 두터운 겨울군복을 입고 ‘앞으로 나란히’를 한 상태에서 부동자세로 서 있어야 한다. 앞으로 뻗은 두 팔 위에 4킬로그램 가까운 M1 소총을 얹어 놓는다. 10분만 지나면 M1 소총이 20킬로그램처럼 느껴진다. 총을 떨어뜨리기라도 하면 옆방으로 끌려가 육체적인 체벌을 당하게 된다.

도널드가 내게 말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방식은 말이야, 한 녀석을 잡아다가 팬티만 남기고 홀랑 벗기는 거야.침대에서 매트리스를 벗겨내면 스프링이 나오거든. 그런 다음 전기선을 가져다가 껍데기를 벗기고 스프링에 연결하는 거야. 그리고 그 녀석을 그 위에 눕히고 나서 전기플러그를 꽂는 거야. 그 녀석은 비명을 지르겠지. 곧 퓨즈가 나가버릴 테니까 막사는 깜깜해지겠지. 그리고 영선반 직원이 와서 퓨즈를 고치겠지.”

도널드가 그러는 걸 직접 본적은 없다. 그렇지만 막사에 전기가 나갈 때마다 나는 도널드가 전기선을 들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다.

뉴욕군사학교의 괴롭힘은 도널드가 졸업한 이듬해 절정에 이르렀다. 뉴욕타임즈 기자가 참석한 가운데 개교 75주년 행사가 열릴 무렵이었다. 기념식 바로 전날, E 포대라고 알려진 무시무시한 중대의 캡틴이 쇠로 만든 체인으로 중대원 한 명을 마구 내려쳤다. 그날 밤, 맞은 학생은 달아났다. 탈영이었다. 그 학생은 학교를 빠져나와 병원으로 갔다. 병원 측은 치료를 해주고 나서 부모에게 전화를 했고, 부모는 경찰을 불렀다. 그 결과 교장부터 줄줄이 옷을 벗었다.

두바이어스는 학생 때부터 괴롭힘에 일가견이 있었지만 정말로 심한 체벌에는 아주 조심스러워 했다. 자기가 직접 체벌을 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시키곤 했다.

내가 졸업한 이듬해 도비의 F중대 캡틴이었던 톰 윌리엄스는 이런 이야기를 내게 들려 해주었다. 중대원들이 점심식사를 하려고 도열하고 있던 참이었는데 도비가 군기 빠진 학생 한 명을 혼내고 있었다. 그 애의 반응이 성에 차지 않자 도비가 윌리엄스에게 명령했다. “저 자식 얼굴에 한 방 날려! 날려 버려!” 윌리엄스는 머뭇거렸다. “난 그게 잘못된 행동이란 걸 알았어.” 윌리엄스가 말했다. “하지만 내가 뭘 할 수 있었겠어? 도비의 얼굴에 한 방 날려줄 수도 있었겠지만 그런 생각을 하기엔 난 너무 어렸다고. 그래서 그 불쌍한 녀석의 얼굴에 주먹을 날릴 수밖에 없었지. 풀썩 쓰러지더군. 벌써 50년이 흘렀지만 기억이 생생해. 그이후로 말이야, 매일매일 죄책감을 품고 살고 있다고.”

Sandy McIntosh(작가)/(번역: 박성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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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9-13 08:02:46
    취재K
〈역자 주〉
시사기획 창 ‘트럼프의 선택은(6월 11일 방송)’편에 출연해 트럼프의 뉴욕군사학교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동창생 샌디 매킨토시(Sandy McIntosh)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담은 기고문을 KBS에 보내왔습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중학생 트럼프가 군대에 간 이야기’입니다. 중년 이상 우리나라 남자들이 군대에서 겪었음직한 군대식 문화를 트럼프는 중고등학생 때 경험한 셈인데, 이 시절의 경험이 오늘날의 트럼프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게 매킨토시의 판단입니다. 한반도 비핵화 협상의 주요변수인 트럼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판단에서 번역본을 4회에 걸쳐 싣습니다. 뉴욕에서 시인이자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매킨토시가 직접 겪고 본 트럼프를 쓴 글이기에 좀 긴 감은 있지만 다른 곳에서는 찾기 어려운 1차 정보를 많이 담고 있으며, 소설처럼 잘 읽히는 편입니다. 한 가지 유념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트럼프는 호불호가 극단적으로 갈리는 인물인데 이 글은 트럼프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전형적인 뉴요커의 시각을 담고 있습니다.

4. 로르샤흐 테스트 같았던 군사학교

우리는 서로 달랐지만 도널드와 나는 똑같은 이유로 뉴욕군사학교에 보내졌다. 도널드 아버지나 우리 아버지나 이 이 학교가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아들의 행동을 고쳐줄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지금은 이런 학교들이 쇠퇴일로를 걷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뉴욕군사학교는 꽤 인기가 있었다. 남북전쟁이후 줄곧 그랬다.

남북전쟁은 끔찍한 비극이었다. 군인들은 부상을 입고 절뚝거리며 고향으로 돌아왔다. 군대식 말투를 고향으로 가져온 군인들도 있었다. 그래도 북부에서나 남부에서나 전쟁터에서 돌아온 군인들은 환영을 받았다. 퇴역장교였던 찰스 제퍼슨 라이트는 이 점에 착안해 돈을 벌 목적으로 뉴욕군사학교를 포함해 군사학교 몇 개를 설립했다.

뉴욕군사학교는 시작부터 로르샤흐 테스트 같았다. 어떤 부모들에게 이 학교는 뉴욕 타임즈 매거진에 매주 실리는 광고 문구처럼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는 "질서정연한 학습 환경"을 약속하고 있었다. 다른 부모들에게 이 학교는 변형된 형태의 소년원이었는데 소년법원의 판사들이 격리와 처벌을 위해 추천하는 곳이었다. 또 다른 부모들에게는 사회적 부적응아나 이혼한 가정의 아이들을 내다버리기에 편리한 하치장 같은 곳이었다.

특히 두 종류의 아버지들이 이 학교의 엄한 규율에 환호했다. 쿠바의 풀헨시오 바티스타 같은 라틴 아메리카의 장군들이나 존 고티 같은 마피아 두목들이 그러했는데, 자기 아들이 가업을 잇게 하려고 이 학교에 보내는 경우였다.

도널드는 자신이 못 알아듣는 언어를 말하는 외국 학생들에게 관심이 없었다("걔네들이 널 비웃고 있어" 그는 내게 경고했다). 하지만 나는 걔네들과 사귀면서 많은 걸 배웠다.

가령, 내 룸메이트 오비디오는 과테말라 공무원의 아들이었는데, 같은 방을 쓰던 프랭키와 내게 가끔씩 다른 문화의 통찰력을 선사해주곤 했다.

9월의 어느 날, 우리는 서로 여름방학을 어떻게 보냈는지를 놓고 허풍을 떨고 있었다. 프랭키는 6주 동안 노 젓는 카누와 휘플볼을 할 수 있는 여름 캠프에서 지도원으로 봉사했다고 했다. 나는 비치클럽 수영장에서 스쿠버 다이빙을 배웠다고 자랑했다.

여름방학 때 뭐했냐고 묻자 오비디오는 입을 다물었다. 얘기해보라고 자꾸 졸라대자 오비디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아빠가 나보고 남자다움을 배워야 될 때가 됐다고 했어. 그래서 여름 동안 과테말라시티의 매음굴에 보냈어."

16살짜리들에겐 충격적인 뉴스였다. 한동안 침묵이 흐르고 나자 마침내 프랭키가 말했다. "와우! 시시한 캠프보다 백배 낫네."

5. 학교에 말뚝박은 교관

도널드가 입학했을 때 중학교 과정인 F중대에 배속 받았다. 그 중대의 교관은 두바이어스 소령이었다.

당시 졸업앨범을 보면 도널드는 M1 소총을 들고 부동자세를 하고 있다. 그는 주변의 다른 학생들보다 키가 큰 깡마른 13살이었다. 그 표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도널드가 엄청 떨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바로 앞에서 두바이어스 소령이 노려보고 있었으니까.


시오도어 두바이어스는 학교에 말뚝을 박은 사람이었다.

‘도비’라고도 불리는 두바이어스는 1926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태어나 1942년에 뉴욕군사학교에 입학했다가 곧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 위해 휴학을 했다. 이탈리아의 격전지에서 싸웠다는데, 무솔리니의 시체가 주유소 지붕에 매달려 있는 장면도 봤다고 했다. 뉴욕군사학교로 돌아오고 나서는 만능운동 선수에 맹렬한 승부사로 명성을 날렸다. 권투, 라크로스, 야구, 농구, 축구 등 여러 종목의 학교대표팀에 이름을 올렸다. 졸업반 때는 학생 대표와 반장을 도맡았다. 졸업과 동시에 교장이 그에게 교관으로 학교에 남아달라고 부탁했다. 실제 군대에서는 상병에 불과했지만 학교는 그를 소령으로 대우해주었다. 그 때부터 장장 50년 동안 주말만 빼고는 학교를 떠나지 않았다(먼 친척 한 명이 유럽으로 그를 초청했는데 '이 학교를 떠날 순 없다'면서 거절했다고 했다).

도비에겐 단순무식한 철학이 있었다. 연병장이나 운동장에서 그와 한 편인 추종자가 되거나 아니면 그 반대편에 서거나 둘 중의 하나다. 그와 한 편이면 보상을 받았다. 공부나 문화적인 활동에 시간을 너무 낭비하거나, 그의 편이 아니면 벌을 받고 모욕을 당했다.

"침대에 각을 잡으라고 했는데, 도널드가 할 생각을 안 하는 거야." 도비가 말했다. 그래서 도비는 각을 어떻게 잡는지 가르쳐주려고 나섰다.

어느 전기작가에게 도널드는 말했다. "당시만 해도 교관들이 학생들의 뺨을 때렸어요. 지금 같으면 감옥에 갈 일이죠. 성질이 더러운 교관이었죠. 학생들을 거칠게 다뤘어요. 그냥 살아남는 법을 배우는 수밖에 없어요. 조금이라도 요령을 부리면 득달같이 달려와서 요절을 냈죠."

처음 몇 달 동안 도널드는 몸서리를 쳤다. 도널드는 도비를 보고 아버지를 떠올렸다. 그러나 아버지는 기껏해야 감정적인 체벌을 했지만 도비는 반항하는 학생을 길들이는 훨씬 다양한 방법들을 알고 있었다.

6. 괴롭힘

바닷가 군용텐트에서 만났을 때부터 도널드는 내가 입학하면 겪게 될 괴롭힘을 설명해주었다.

"첫째, 괴롭힘은 학교 규정에 써 있어. 대충 이런 식이지. '모든 동아리는 신참자한테 신고식 규정을 적용한다.'"

군사학교에선 신고식이라는 게 성행했다. 학생들도 교관들도 마찬가지였다. 입학 첫해에는 누구나 의례적인 "신참자" 규정의 적용을 받았다. 가령, ‘암소의 용도는?’ 하고 물으면 신참자는 미리 외워둔 내용을 줄줄 대답해야 한다. 복도에서 선배를 만나면 선배가 잘 지나가도록 벽에 찰싹 붙어야 한다. 명령이 떨어지면 억지로라도 재치기를 해야 한다. 웃기지도 않는 신고식이었다.

졸업반이 가까울수록 규율 위반이나 학업성적 미달에 대한 처벌로서 더 심한 괴롭힘이 따라왔다. 가장 무서운 괴롭힘은 샤워실에서 벌어졌다. 10개에서 15개 사이의 샤워꼭지에서 뜨거운 물이 쏟아져 나온다. 목구멍을 태워버릴 것 같은 뜨거운 증기가 샤워실을 가득 채운다. 괴롭힘의 대상이 되는 학생은 두터운 겨울군복을 입고 ‘앞으로 나란히’를 한 상태에서 부동자세로 서 있어야 한다. 앞으로 뻗은 두 팔 위에 4킬로그램 가까운 M1 소총을 얹어 놓는다. 10분만 지나면 M1 소총이 20킬로그램처럼 느껴진다. 총을 떨어뜨리기라도 하면 옆방으로 끌려가 육체적인 체벌을 당하게 된다.

도널드가 내게 말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방식은 말이야, 한 녀석을 잡아다가 팬티만 남기고 홀랑 벗기는 거야.침대에서 매트리스를 벗겨내면 스프링이 나오거든. 그런 다음 전기선을 가져다가 껍데기를 벗기고 스프링에 연결하는 거야. 그리고 그 녀석을 그 위에 눕히고 나서 전기플러그를 꽂는 거야. 그 녀석은 비명을 지르겠지. 곧 퓨즈가 나가버릴 테니까 막사는 깜깜해지겠지. 그리고 영선반 직원이 와서 퓨즈를 고치겠지.”

도널드가 그러는 걸 직접 본적은 없다. 그렇지만 막사에 전기가 나갈 때마다 나는 도널드가 전기선을 들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다.

뉴욕군사학교의 괴롭힘은 도널드가 졸업한 이듬해 절정에 이르렀다. 뉴욕타임즈 기자가 참석한 가운데 개교 75주년 행사가 열릴 무렵이었다. 기념식 바로 전날, E 포대라고 알려진 무시무시한 중대의 캡틴이 쇠로 만든 체인으로 중대원 한 명을 마구 내려쳤다. 그날 밤, 맞은 학생은 달아났다. 탈영이었다. 그 학생은 학교를 빠져나와 병원으로 갔다. 병원 측은 치료를 해주고 나서 부모에게 전화를 했고, 부모는 경찰을 불렀다. 그 결과 교장부터 줄줄이 옷을 벗었다.

두바이어스는 학생 때부터 괴롭힘에 일가견이 있었지만 정말로 심한 체벌에는 아주 조심스러워 했다. 자기가 직접 체벌을 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시키곤 했다.

내가 졸업한 이듬해 도비의 F중대 캡틴이었던 톰 윌리엄스는 이런 이야기를 내게 들려 해주었다. 중대원들이 점심식사를 하려고 도열하고 있던 참이었는데 도비가 군기 빠진 학생 한 명을 혼내고 있었다. 그 애의 반응이 성에 차지 않자 도비가 윌리엄스에게 명령했다. “저 자식 얼굴에 한 방 날려! 날려 버려!” 윌리엄스는 머뭇거렸다. “난 그게 잘못된 행동이란 걸 알았어.” 윌리엄스가 말했다. “하지만 내가 뭘 할 수 있었겠어? 도비의 얼굴에 한 방 날려줄 수도 있었겠지만 그런 생각을 하기엔 난 너무 어렸다고. 그래서 그 불쌍한 녀석의 얼굴에 주먹을 날릴 수밖에 없었지. 풀썩 쓰러지더군. 벌써 50년이 흘렀지만 기억이 생생해. 그이후로 말이야, 매일매일 죄책감을 품고 살고 있다고.”

Sandy McIntosh(작가)/(번역: 박성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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