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당을 보면 시대가 보인다…영화 속 최강 악당들

입력 2019.10.02 (07:01)

읽어주기 기능은 크롬기반의
브라우저에서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영화는 시대를 담는다. 사극에도 현대인의 욕망과 애환이 넘치고 미래 SF에는 지금 사람들의 기대와 우려가 엇갈린다. 당신이 영화 속 악당에게 어떤 식으로든 매력을 느꼈다면, 그 캐릭터는 현실 세계의 단면을 품고 있을 소지가 크다. 선과 악이 다투는 숱한 이야기들 속에서 악당이 어떻게 취급되는지를 보면 해당 작품의 세계관이 가늠되기도 한다. 관객의 기억에 새겨진 무시무시한 악역들과 그 의미를 돌아봤다.

개인을 볼 것인가 구조를 볼 것인가

'다이하드'(1988)와 같은 경찰 액션에서 악당들은 종종 명분을 내세우곤 한다. 빌딩 전체 사람들을 인질로 잡은 한스 일당은 테러범인 동료들을 석방하라는 조건을 내건다. 우두머리 한스는 명분을 위해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인질을 살해한다. 할리우드 영화 속 악당 가운데 손꼽힐 만한 냉혈한이지만, 극 종반 그 모든 악행이 거액의 돈을 노린 것뿐이었음이 드러나는 순간 한스는 졸렬해진다. 영화가 악역을 보잘것없이 만들어버릴 때 범죄가 횡행하는 사회적 맥락은 제거된다.

다른 경우도 있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뮌헨'(2006)은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 이스라엘 선수들을 대상으로 자행된 팔레스타인 무장 조직의 인질극으로 시작한다. 인질극은 끔찍한 희생을 낳고 이스라엘 정보국은 테러 조직원들을 하나하나 찾아내 암살한다. 물론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이스라엘 정보원인 주인공(에릭 바나)은 악역 아닌 악역들로부터 숱한 위협에 시달린다. 수천 년에 이르는 이-팔 간의 갈등은 보복이 보복을 부르는 악순환의 상징이라고 말하면서, 영화는 이제 미국은 어떻게 할 건지 묻는다. 9·11 테러 이후 중동 전쟁이 한창이던 때였다. 이처럼 어떤 영화는 악당을 향한 적개심을 돋우는 대신 폭력이 악순환하는 구조를 본다.

악(惡)은 무엇을 먹고 자라는가

'배트맨' 시리즈의 공간 배경인 고담시가 하나의 캐릭터나 다름없는 건 그래서다. 범죄와 부패가 가득해 누구도 믿을 수 없는 곳에서 악이 잉태된다. '다크 나이트'(2008)는 '뮌헨'이 주목한 2000년대에 '폭력은 무엇을 먹고 자라는지'를 묻는다. 악의 화신을 자처하는 조커는 배트맨에게 말한다. "네가 나를 완전하게 만들어주지." 이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동전의 양면처럼, 선과 악은 서로 등을 기대고 있다. 조커는 선악의 경계를 끊임없이 무너뜨리려 한다. 인물들의 선의를 응원하며 영화를 보는 관객은 그래서 더욱 섬뜩하다.

199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양들의 침묵'(1991)의 한니발 렉터(안소니 홉킨스)를 빼놓을 수 없다. 사건을 해결하는 주인공 스털링 요원(조디 포스터)보다 더 깊은 인상을 남기면서 '한니발'(2001), '레드 드래곤'(2002), '한니발 라이징'(2007) 등 연작을 배출했다. '양들의 침묵'은 개봉 이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남·여 주연상, 각본상 등 5개 주요 부문을 휩쓸었다. 공포영화가 아카데미 작품상을 가져간 최초의 기록이다. 한니발은 우리가 가장 견고하다고 느끼는 격리 시스템, 즉 감옥 안에서 FBI 요원을 가르친다. 밖에선 희대의 연쇄 납치 살인이 잇따르고, 공권력은 무력하다.


결핍과 공포, 분노가 낳은 악(惡)

잘 만든 공포영화는 한 시대의 결핍이나 불안을 현미경으로 확대하는 기능을 한다. 베트남전과 워터게이트 등을 거치며 기존의 권위가 무너져간 70년대, '아버지'의 부재 속에 느끼는 공포감을 끌어올린 고전 '엑소시스트'(1975)가 대표적인 예다. '양들의 침묵'에는 당시 공화당 집권이 12년간 이어지면서 공공 시스템에 대한 지식인들의 불신이 커지는 가운데 구소련의 장막이 흔들리면서 와해돼가는 냉전체제 등 불안정한 시대 기운이 녹아있다.

80년대를 풍미한 최강 악당으로는 '터미네이터'(1984)가 꼽힌다. 이 영화가 가져오는 공포는 '기술이 인간의 통제를 벗어날지 모를 위기감'이다. 미래 인공지능이 반란을 일으키고 인간 저항군의 지도자를 제거하려는 인조인간이 시간여행을 통해 현재로 날아온다. 개인용 컴퓨터 보급이 확산하고 디지털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이 대중의 피부에 와닿았던 때였다. 테크놀로지의 진화 속도가 다른 문화의 그것에 비해 압도적으로 빨라지면서 문화지체 현상이 급류를 탔다. 구형 터미네이터 T-800이든 신형 T-1000이든 이들이 주는 공포의 핵심은 어떤 공격을 가해도 다시 살아난다는 것. 기술이 인간을 압도할 것이라는 공포감을 흥미진진하게 펼쳐낸 사례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의 인공지능 컴퓨터 '할'(HAL) 이후 수많은 SF 영화 속 인공지능이 사용자의 통제를 이탈하며 공포를 불렀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장면들은 조지 루카스 감독이 '스타워즈'(1977)를 디자인하는 데 직접적인 영향을 줬다. 70년대 영화 속 악당을 꼽자면 단연 '스타워즈'의 다스 베이더다. 냉전시대 소련과의 우주 개발 경쟁이 한창이던 당시 나치 전체주의에서 가져온 제국군의 악당이지만, 그 또한 저항군 쪽에서 수련받던 제다이 기사였다. 그가 저항군의 주역 루크 스카이워커에게 "내가 너의 아버지다!(I'm your father!)"라고 밝히는 대목은 지금 봐도 충격적이다. 강력한 '포스'를 가진 주요 인물이 자칫 '어둠의 편'으로 넘어갈지 몰라 관객은 조마조마하다. '다크 나이트'의 하비 덴트 검사가 그런 것처럼 동전 하나 뒤집히듯 선과 악, 생과 사가 엇갈린다. 누구보다 강력한 포스를 지닌 아나킨 스카이워커를 어둠의 편으로 데려가 다스 베이더로 만든 것은 자신의 분노였다.

'조커', 한 사회가 취약한 인간을 대하는 태도

분노는 어떻게 악을 키우는가. 2일 개봉한 '조커'에서 플렉(호아킨 피닉스)은 어린 시절 학대로 뇌를 다친 뒤 긴장 상황에서 웃음을 멈출 수 없는 질환을 앓고 있다.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세상은 그를 존중하지 않고, 복지 예산이 줄어들면서 최소한의 정신 상담마저 받을 수 없게 된다. 복지 예산 삭감은 현 트럼프 정부가 실행하고 있는 미국사회의 논란거리기도 하다. 아버지라 믿던 이에게 버림받은 플렉은 자신을 무시한 이들을 하나하나 죽여가며 사이코패스 '조커'가 된다.

현실 세계에 끔찍한 범죄자가 등장했을 때, 죄를 저지른 개인이 극악무도한 인간이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는 기사가 있는가 하면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나기까지 사회적 배경을 짚어내려는 언론도 있다. 언론사나 기자마다 세계관이 다른 것이다. 악을 저지른 개인보다 이를 탄생시킨 도시의 무례함과 사회 안전망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꼬집어 발언한 영화 '조커'에게, 올해 베니스국제영화제는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을 안겼다.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악당을 보면 시대가 보인다…영화 속 최강 악당들
    • 입력 2019-10-02 07:01:16
    취재K
영화는 시대를 담는다. 사극에도 현대인의 욕망과 애환이 넘치고 미래 SF에는 지금 사람들의 기대와 우려가 엇갈린다. 당신이 영화 속 악당에게 어떤 식으로든 매력을 느꼈다면, 그 캐릭터는 현실 세계의 단면을 품고 있을 소지가 크다. 선과 악이 다투는 숱한 이야기들 속에서 악당이 어떻게 취급되는지를 보면 해당 작품의 세계관이 가늠되기도 한다. 관객의 기억에 새겨진 무시무시한 악역들과 그 의미를 돌아봤다.

개인을 볼 것인가 구조를 볼 것인가

'다이하드'(1988)와 같은 경찰 액션에서 악당들은 종종 명분을 내세우곤 한다. 빌딩 전체 사람들을 인질로 잡은 한스 일당은 테러범인 동료들을 석방하라는 조건을 내건다. 우두머리 한스는 명분을 위해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인질을 살해한다. 할리우드 영화 속 악당 가운데 손꼽힐 만한 냉혈한이지만, 극 종반 그 모든 악행이 거액의 돈을 노린 것뿐이었음이 드러나는 순간 한스는 졸렬해진다. 영화가 악역을 보잘것없이 만들어버릴 때 범죄가 횡행하는 사회적 맥락은 제거된다.

다른 경우도 있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뮌헨'(2006)은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 이스라엘 선수들을 대상으로 자행된 팔레스타인 무장 조직의 인질극으로 시작한다. 인질극은 끔찍한 희생을 낳고 이스라엘 정보국은 테러 조직원들을 하나하나 찾아내 암살한다. 물론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이스라엘 정보원인 주인공(에릭 바나)은 악역 아닌 악역들로부터 숱한 위협에 시달린다. 수천 년에 이르는 이-팔 간의 갈등은 보복이 보복을 부르는 악순환의 상징이라고 말하면서, 영화는 이제 미국은 어떻게 할 건지 묻는다. 9·11 테러 이후 중동 전쟁이 한창이던 때였다. 이처럼 어떤 영화는 악당을 향한 적개심을 돋우는 대신 폭력이 악순환하는 구조를 본다.

악(惡)은 무엇을 먹고 자라는가

'배트맨' 시리즈의 공간 배경인 고담시가 하나의 캐릭터나 다름없는 건 그래서다. 범죄와 부패가 가득해 누구도 믿을 수 없는 곳에서 악이 잉태된다. '다크 나이트'(2008)는 '뮌헨'이 주목한 2000년대에 '폭력은 무엇을 먹고 자라는지'를 묻는다. 악의 화신을 자처하는 조커는 배트맨에게 말한다. "네가 나를 완전하게 만들어주지." 이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동전의 양면처럼, 선과 악은 서로 등을 기대고 있다. 조커는 선악의 경계를 끊임없이 무너뜨리려 한다. 인물들의 선의를 응원하며 영화를 보는 관객은 그래서 더욱 섬뜩하다.

199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양들의 침묵'(1991)의 한니발 렉터(안소니 홉킨스)를 빼놓을 수 없다. 사건을 해결하는 주인공 스털링 요원(조디 포스터)보다 더 깊은 인상을 남기면서 '한니발'(2001), '레드 드래곤'(2002), '한니발 라이징'(2007) 등 연작을 배출했다. '양들의 침묵'은 개봉 이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남·여 주연상, 각본상 등 5개 주요 부문을 휩쓸었다. 공포영화가 아카데미 작품상을 가져간 최초의 기록이다. 한니발은 우리가 가장 견고하다고 느끼는 격리 시스템, 즉 감옥 안에서 FBI 요원을 가르친다. 밖에선 희대의 연쇄 납치 살인이 잇따르고, 공권력은 무력하다.


결핍과 공포, 분노가 낳은 악(惡)

잘 만든 공포영화는 한 시대의 결핍이나 불안을 현미경으로 확대하는 기능을 한다. 베트남전과 워터게이트 등을 거치며 기존의 권위가 무너져간 70년대, '아버지'의 부재 속에 느끼는 공포감을 끌어올린 고전 '엑소시스트'(1975)가 대표적인 예다. '양들의 침묵'에는 당시 공화당 집권이 12년간 이어지면서 공공 시스템에 대한 지식인들의 불신이 커지는 가운데 구소련의 장막이 흔들리면서 와해돼가는 냉전체제 등 불안정한 시대 기운이 녹아있다.

80년대를 풍미한 최강 악당으로는 '터미네이터'(1984)가 꼽힌다. 이 영화가 가져오는 공포는 '기술이 인간의 통제를 벗어날지 모를 위기감'이다. 미래 인공지능이 반란을 일으키고 인간 저항군의 지도자를 제거하려는 인조인간이 시간여행을 통해 현재로 날아온다. 개인용 컴퓨터 보급이 확산하고 디지털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이 대중의 피부에 와닿았던 때였다. 테크놀로지의 진화 속도가 다른 문화의 그것에 비해 압도적으로 빨라지면서 문화지체 현상이 급류를 탔다. 구형 터미네이터 T-800이든 신형 T-1000이든 이들이 주는 공포의 핵심은 어떤 공격을 가해도 다시 살아난다는 것. 기술이 인간을 압도할 것이라는 공포감을 흥미진진하게 펼쳐낸 사례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의 인공지능 컴퓨터 '할'(HAL) 이후 수많은 SF 영화 속 인공지능이 사용자의 통제를 이탈하며 공포를 불렀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장면들은 조지 루카스 감독이 '스타워즈'(1977)를 디자인하는 데 직접적인 영향을 줬다. 70년대 영화 속 악당을 꼽자면 단연 '스타워즈'의 다스 베이더다. 냉전시대 소련과의 우주 개발 경쟁이 한창이던 당시 나치 전체주의에서 가져온 제국군의 악당이지만, 그 또한 저항군 쪽에서 수련받던 제다이 기사였다. 그가 저항군의 주역 루크 스카이워커에게 "내가 너의 아버지다!(I'm your father!)"라고 밝히는 대목은 지금 봐도 충격적이다. 강력한 '포스'를 가진 주요 인물이 자칫 '어둠의 편'으로 넘어갈지 몰라 관객은 조마조마하다. '다크 나이트'의 하비 덴트 검사가 그런 것처럼 동전 하나 뒤집히듯 선과 악, 생과 사가 엇갈린다. 누구보다 강력한 포스를 지닌 아나킨 스카이워커를 어둠의 편으로 데려가 다스 베이더로 만든 것은 자신의 분노였다.

'조커', 한 사회가 취약한 인간을 대하는 태도

분노는 어떻게 악을 키우는가. 2일 개봉한 '조커'에서 플렉(호아킨 피닉스)은 어린 시절 학대로 뇌를 다친 뒤 긴장 상황에서 웃음을 멈출 수 없는 질환을 앓고 있다.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세상은 그를 존중하지 않고, 복지 예산이 줄어들면서 최소한의 정신 상담마저 받을 수 없게 된다. 복지 예산 삭감은 현 트럼프 정부가 실행하고 있는 미국사회의 논란거리기도 하다. 아버지라 믿던 이에게 버림받은 플렉은 자신을 무시한 이들을 하나하나 죽여가며 사이코패스 '조커'가 된다.

현실 세계에 끔찍한 범죄자가 등장했을 때, 죄를 저지른 개인이 극악무도한 인간이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는 기사가 있는가 하면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나기까지 사회적 배경을 짚어내려는 언론도 있다. 언론사나 기자마다 세계관이 다른 것이다. 악을 저지른 개인보다 이를 탄생시킨 도시의 무례함과 사회 안전망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꼬집어 발언한 영화 '조커'에게, 올해 베니스국제영화제는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을 안겼다.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오늘의 핫 클릭

실시간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뉴스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수신료 수신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