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관계 개선의 ‘실마리’ 다섯 가지

지난해 10월 한국 대법원의 일제 강제징용 배상 판결과 이에 대항한 일본의 수출 규제 조치.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종료와 잇단 영토 도발, 여기에 WTO 제소까지…… 한일 관계는 악화일로를 걷고 있습니다. 대화 채널은 막혀버렸습니다. 강제 동원 피해자를 위한 일본 기업 자산 매각 결정을 눈앞에 두고 한일 관계는 중대기로에 서 있습니다.

한일 간의 입장차가 전혀 좁혀지지 않은 상황, 일각에서는 한일 관계 파탄까지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주 희미하지만, 한일 관계 개선 가능성을 짐작할 수 있는 몇 개의 실마리가 보이고 있습니다.

① 이낙연 총리의 일왕 즉위식 참석

이낙연 총리는 오는 22일부터 24일까지 나루히토 일왕 즉위식 참석차 일본을 방문합니다. 외교부 당국자는 "총리의 일정을 꽉 차게 짜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또 "이 총리가 이번 방일에서 가시적인 성과를 내기 위해 준비를 많이 하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아베 총리와의 회담입니다. 한일 갈등이 불거진 이후 첫 최고위급 회담입니다. 이 총리는 무엇보다 한일 간 대화 창구를 복원하는 데 중점을 둘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꽉 막힌 한일 관계를 단숨에 해결할 수 없으니 소통 창구부터 만들자는 겁니다.

아베 총리도 화답하는 모양새입니다. 아베 총리는 오늘(16일)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한일 관계에 대해 "대화는 늘 계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우리는 그런 기회를 닫을 생각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강제징용 배상과 관련해 강경한 입장엔 변함이 없지만, 그래도 대화를 해 볼 여지는 있다고 한 발 뒤로 물러선 겁니다.

이낙연 총리가 지일파라는 점도 눈여겨볼만 합니다. 이 총리는 기자 시절이던 1990년 일왕 즉위식 때 도쿄특파원단 간사로 활약했습니다. 국회의원 시절엔 한일 의원연맹 간사장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아베 총리와의 인연도 깊습니다. 지난 2005년 아베 총리가 관방장관이 되기 전 서울을 찾았을 때 삼청각에서 소주잔을 기울였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② 한일 정상회담 개최 가능성

다음달 태국에서는 동남아국가연합(ASEAN)+한중일 정상회의가 열립니다. 또 칠레에서는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예정돼 있습니다. 한일 정상이 나란히 참석할 가능성이 큽니다. 현재 분위기로 볼 때 양자 회담이 성사될 가능성은 낮습니다. 하지만 이낙연 총리가 대화의 물꼬를 튼다면 가능성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닙니다.

12월 말엔 한중일 정상회의가 개최될 수 있습니다. 정례적인 성격의 회의인데, 한중일 외교당국은 정상회의 개최를 위한 구체적인 일정과 방안을 협의 중입니다. 12월 말까지 한일 당국간 이견이 좁혀지고 대화 분위기가 무르익는다면 한중일 정상회의를 계기로 한일 양자 회담도 열릴 수 있습니다. 성사된다면 지난해 10월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 이후 첫 정상 간 만남입니다.

정상 간 접촉이 성사만 된다면 '탑다운' 방식의 문제 해결도 기대해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일 양측 모두 정상 간 접촉에는 신중한 분위기입니다. 이견을 좁히는 충분한 사전 논의 없이 정상 간 협의를 했다가 성과가 없으면 두 정상 모두에게 큰 부담이 되기 때문입니다. 연말로 예상되는 일본 기업의 자산 매각 집행의 진행 여부도 정상회담의 변수가 될 전망입니다.

③ 국가정보원 등의 물밑 접촉 시도

그동안 한일 간 물밑 대화 채널 가동은 원활하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일단 청와대의 대일 핫라인이 취약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정의용 안보실장과 야치 쇼타로 전 국가안보국장 간의 대화가 원활하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주목할 만한 점은 서훈 국가정보원장의 카운터 파트였던 기타무라 시게루가 지난달 야치 쇼타로의 후임으로 국가안전보장국장으로 자리를 옮겼다는 겁니다. 기타무라 국장은 지난달까지 우리나라의 국정원장 격인 내각정보관으로 일하며 서훈 원장과 교류해왔습니다. 서 원장은 지난해 남북 대화 국면에서 세 차례 일본을 방문해 기타무라 국장을 만났습니다. 따라서 서훈 원장과 기타무라 시게루 국가안보국장 간에 핫라인이 가동되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제기됩니다. 서 원장과 기타무라 국장이 양국 정상의 신임을 받고 있기 때문에 정상의 의중을 전달할 수 있는 적임자라는 겁니다.

서훈 국정원장은 이와는 별개로 직접 일본 관계자들을 간접적으로 만나면서 여러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국회 외교통일위원장인 윤상현 자유한국당 의원은 지난 4일 도쿄 주일 한국대사관 국정감사에서 "어제 호텔에 화과자가 있어 누가 보냈나 했더니 서훈 원장이 보냈더라"며 "서 원장이 (한일 관계와 관련해) 뛰고 있다는 걸 직감했다"고 말했습니다. 국정원도 한일관계 개선 태스크포스팀을 만들고 인력을 보강하면서 채널 복원에 애쓰는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④ '미국통' 신임 주한 일본 대사 부임

신임 주한 일본 대사에 도미타 고지 전 금융 세계 경제 관련 정상회의 담당 대사가 임명됐습니다. 우리 정부의 아그레망을 받아 22일 부임합니다. 도미타 대사는 극우 작가인 미시마 유키오의 사위로 유명합니다. 미시마 유키오는 탐미주의 소설가로 이름을 알렸으며 점차 급진적인 민족주의자로 변모했습니다. 1970년에는 자위대의 각성과 궐기를 외치며 할복자살을 했습니다.

외교부 당국자는 "도미타 대사가 한국에 대해서는 강경파로 분류되는 것은 맞다"고 말했습니다. 다만 "극우 작가의 가족이라서 심각한 극우 성향일 거라고 생각되지만, 실제로는 전임인 나가미네 대사보다는 더 유연한 입장을 보일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도미타 대사는 일본 북미국장을 지낸 대표적인 미국통입니다. 이 때문에 한일 관계를 미국의 시각으로도 이해하는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또 2004년부터 3년 동안 주한 일본대사관 정무공사를 지내서 한국의 사정에도 밝은 편으로 알려졌습니다.

모든 한일 관계 정책을 아베 정권 수뇌부가 결정하는 상황에서 신임 도미타 대사의 역할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지만, 대사 교체를 계기로 모종의 역할은 기대해볼 수 있지 않느냐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⑤ 일본 내 분위기 변화의 조짐

여전히 일본 내 반한 감정은 거셉니다. 일각의 혐한 분위기도 잦아들지 않고 있습니다. 수출 규제 조치를 잘했다는 여론이 우세하고, 한일 갈등의 책임이 한국에 있다는 시각도 많습니다. 이런 분위기에 맞춰 아베 정권 수뇌부의 강경한 입장에도 변함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내 일각에서 분위기 변화의 조짐이 감지됩니다. 불매 운동의 타격이 큰 관광업계에서부터 목소리가 나옵니다. 일본 관광청을 담당하는 아카바 가즈요시 국토교통상은 "한국은 일본에 문화를 전해준 은인의 나라"라고 말했습니다. 여론조사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한 방송사의 여론조사 결과 응답자 10명 중 8명이 한일 관계가 개선되어야 한다고 답했습니다.

여당인 자민당 내부에서도 양보론이 나오고 있습니다. 가와무라 다케오 전 관방장관은 12일 "한일 파트너십은 1998년으로 돌아가야 한다"며 "한일은 서로 가장 가까운 국가로 어떻게 잘해 나갈지를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일본 자민당 2인자인 니카이 간사장도 지난달 27일 "일본이 양보할 수 있는 것은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정책 결정자인 아베 총리와 그 측근들의 입장이 워낙 강경하다는 점에서 지나친 낙관론은 경계해야 합니다. 대화를 시작한다고 해도 갈 길이 멉니다. 하지만 한일 앞에 놓인 몇 가지 실마리를 잘 활용할 경우 한일 대화가 복원될 가능성도 조심스럽게 점쳐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