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짓 하면 철창신세…‘신림동 강간미수 영상’ 판결이 남긴 것

입력 2019.10.17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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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에서 피고인에게 법률상 강간의 고의가 있었다고 특정하여 피고인을 처벌하긴 어렵다고 할 것입니다."
"설령 피고인이 강간을 목적으로 위 범죄사실 기재와 같은 내용의 행위를 했다하더라도, 검사가 제출한 증거들만으로는 피고인이 강간의 수단으로 피해자에게 폭행이나 협박을 개시하였다고 인정하기 부족하고, 달리 이를 인정할 증거가 없습니다."
- 2019년 10월 16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1부 재판장 김연학 부장판사 판결 선고 중

예견된 결론이었습니다. 시민들이 '신림동 강간미수 영상'을 보고 느낀 자연스런 분노와 별개로, 이 사건에서 '강간(성폭행)미수'죄가 법적으로 성립하기는 어렵다는 의견은 기소 전부터 우세했습니다. 법조인이 아닌 사람들 사이에서도 "저 남자가 집안에 들어가서 피해자를 성폭행하려 했는지, 강제추행하려 했는지 그 마음속을 어떻게 아느냐"라는 얘기가 나왔습니다.

재판부도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길지만 그 부분 판결문을 잠깐 인용해 보겠습니다.

"피고인의 구체적인 (강간) 고의를 추단케 할 만한 사실에 근거하지 않고도 타인의 주거에 침입한 범인이 가질 수 있을 것으로 보이는 강간, 강제추행, 살인, 강도 등 각종 범죄에 관한 고의 중 하나를 그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더 높아 보인다는 이유로 법관이 임의로 선택하여 그에 따라 처벌할 수 있게 된다면, 이는 그 자체로 국가형벌권의 자의적인 행사라고 하지 않을 수 없고, 그러한 국가형벌권의 자의적인 행사로부터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법치국가 형법의 기본원칙인 죄형법정주의에도 반할 위험성이 크다."

판결에서 오히려 눈길을 끈 것은, 징역 1년이라는 재판부의 양형이었습니다. 뒤에서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지만, 주거침입 혐의만으로 벌금형이나 집행유예가 아닌 '실형'을 선고하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입니다.

실형을 피하기 위해 피해자에게 합의금 3천만 원을 준 뒤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입장을 받아내고, 재판부에 반성문도 16차례나 내는 등 갖은 노력을 했던 피고인 조 모 씨. 하지만 어제(16일) 판결로 일단 석방의 희망은 사라진 셈이 됐습니다. 선고 후 다시 교도관들에게 이끌려 법정을 나가던 조 씨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분명히 미간을 찌푸린 채 인상을 쓰고 있었습니다.

■ 주거침입죄와 '실형'

"법률상으로는 피고인이 강간 범행의 실행에 착수했다 보기 어렵다 할지라도, 일반적으로 주거침입죄로 처벌하는 그런 주거침입죄와는 달리, 피해자의 주거의 평온을 해함으로써 성범죄의 불안이나 공포를 유발한 사실만으로도 피고인을 엄히 처벌할 수밖에 없습니다." (판결 선고 중)

20분 넘게 판결을 읽어내려 간 재판장이 판결문 원문에는 없는 표현을 즉석에서 덧붙인 부분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주거침입죄로 처벌하는 그런 주거침입죄와는 달리"라는 부분입니다. 조 씨가 범한 주거침입죄는 일반적이지 않고, 처벌도 달리해야 한다는 뜻일 겁니다.

그렇다면 '일반적인' 주거침입죄의 처벌은 어떨까요? 이번 달(2019년 10월) 전국의 1심 법원에서 '주거침입' 혐의만으로 기소된 사건에 대해 내린 판결 10건을 살펴봤습니다. 이 가운데 실형이 선고된 사건은 단 1건뿐이었고 ▲징역형의 집행유예가 2건 ▲벌금형이 5건 ▲벌금형의 집행유예가 1건 ▲선고유예가 1건이었습니다. 주거침입죄에 대해 실형이 선고되는 비율이 낮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결과입니다.

유일하게 실형이 나온 사건을 살펴볼까요. 부산에 사는 한 중국집 배달원이 올 7월 어느날 새벽 4시쯤 면식이 없는 한 10대 여성이 사는 집 건물에 침입한 사건인데요. 판결문을 보면 이 배달원은 마스크를 쓰거나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로 피해자 집 현관문을 수차례 강하게 두드리고, "물건을 놔두고 갔으니 문 열어 보라"라고 외치며 위협했다고 합니다. 신림동 사건과 수법이 비슷하지만 주거침입 혐의로만 기소된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 중국집 배달원은 이미 2016년 주거침입강제추행 혐의로 징역형의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전력이 있고, 집행유예 기간에 또 다시 범행을 한 사람이었습니다. 재판부는 이런 전력을 고려해 실형을 선고했던 겁니다.

결국 형사처벌 전력이 없는 '신림동' 사건의 피고인에게 실형이 선고된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판결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 단순 주거침입 아닌 "여성에 대한 폭력"

이런 판단을 두고 한 중견로펌의 변호사는 재판부가 "여성에 대한 폭력"이라는 문제를 고려했다고 평가했습니다.

이 변호사는 "(성범죄라는 점을 떠나) 형벌의 최후 수단성, 무죄추정의 원칙 등 피고인 인권 보장을 위해 쌓아온 형사법 특유의 법 원칙을 지켜나간다는 측면에서 재판부가 깊이 고민한 흔적이 보인다"라면서, "그런 측면에서 구체적 사건에 천착해서 강간미수로 의율(법규를 구체적 사건에 적용)할 때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벗어나면서, 대신 주거침입 행동에 내포된 여성에 대한 폭력이라는 측면의 문제를 고려한 게 균형점인 것 같다"라고 평가했습니다.

실제로 판결문에는 이런 재판부의 고뇌가 묻어납니다.

"이 사건은 … 불특정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행으로 선량한 시민들 누구나 그와 같은 범죄의 피해자가 될 수도 있다는 불안과 공포를 일으킨다는 점에서 비난가능성 또한 높다. 이 사건의 범행 장면은 언론 등에 수차례 보도됨으로써 1인 가구가 나날이 증가하는 상황에서 주거침입 범죄에 대한 우려와 불안감을 한층 증폭시켰다. 피고인은 이 사건 범행 동기와 관련하여 술을 한잔 하자고 말을 걸기 위하여 피해자의 주거지까지 뒤따라갔다고 진술하나, 그 경위에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을 뿐 아니라 범행의 내용 및 태양(행태) 등에 비추어 보면, 그와 같은 행위로 인한 위험성이 상당히 크다." (판결문 중)

서지현 검사 등 여러 성폭력 피해자를 대리해 온 이은의 변호사도 이번 판결을 긍정적으로 평가했습니다.

이 변호사는 '신림동' 사건을 강간미수로 처벌하긴 어려웠다면서도 "일상적인 주거침입의 경우보다는 무겁게 다루어져야 한다는 법조계의 목소리가 있었다"라면서 "(징역 1년이라는) 양형을 보았을 때 재판부에서도 그런 부분을 받아들인 것으로 보여진다" "그런 점에서 굉장히 의미 있는 판결이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변호사는 이어 "대중적으로 알려진 사건과 그렇지 않은 사건을 대하는 검찰과 법원의 온도차가 있었다는 건 엄연한 현실"이라면서 이번 판결이 "주거에 침입한 이후 강도와 성폭력 등 범죄로 나아갈 수 있었을 법한 상황이 인정되는 경우에는, 양형에 실질적으로 반영해줄 수 있는 계기가 돼야 한다"라고 밝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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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10-17 13:5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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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에서 피고인에게 법률상 강간의 고의가 있었다고 특정하여 피고인을 처벌하긴 어렵다고 할 것입니다."
"설령 피고인이 강간을 목적으로 위 범죄사실 기재와 같은 내용의 행위를 했다하더라도, 검사가 제출한 증거들만으로는 피고인이 강간의 수단으로 피해자에게 폭행이나 협박을 개시하였다고 인정하기 부족하고, 달리 이를 인정할 증거가 없습니다."
- 2019년 10월 16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1부 재판장 김연학 부장판사 판결 선고 중

예견된 결론이었습니다. 시민들이 '신림동 강간미수 영상'을 보고 느낀 자연스런 분노와 별개로, 이 사건에서 '강간(성폭행)미수'죄가 법적으로 성립하기는 어렵다는 의견은 기소 전부터 우세했습니다. 법조인이 아닌 사람들 사이에서도 "저 남자가 집안에 들어가서 피해자를 성폭행하려 했는지, 강제추행하려 했는지 그 마음속을 어떻게 아느냐"라는 얘기가 나왔습니다.

재판부도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길지만 그 부분 판결문을 잠깐 인용해 보겠습니다.

"피고인의 구체적인 (강간) 고의를 추단케 할 만한 사실에 근거하지 않고도 타인의 주거에 침입한 범인이 가질 수 있을 것으로 보이는 강간, 강제추행, 살인, 강도 등 각종 범죄에 관한 고의 중 하나를 그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더 높아 보인다는 이유로 법관이 임의로 선택하여 그에 따라 처벌할 수 있게 된다면, 이는 그 자체로 국가형벌권의 자의적인 행사라고 하지 않을 수 없고, 그러한 국가형벌권의 자의적인 행사로부터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법치국가 형법의 기본원칙인 죄형법정주의에도 반할 위험성이 크다."

판결에서 오히려 눈길을 끈 것은, 징역 1년이라는 재판부의 양형이었습니다. 뒤에서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지만, 주거침입 혐의만으로 벌금형이나 집행유예가 아닌 '실형'을 선고하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입니다.

실형을 피하기 위해 피해자에게 합의금 3천만 원을 준 뒤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입장을 받아내고, 재판부에 반성문도 16차례나 내는 등 갖은 노력을 했던 피고인 조 모 씨. 하지만 어제(16일) 판결로 일단 석방의 희망은 사라진 셈이 됐습니다. 선고 후 다시 교도관들에게 이끌려 법정을 나가던 조 씨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분명히 미간을 찌푸린 채 인상을 쓰고 있었습니다.

■ 주거침입죄와 '실형'

"법률상으로는 피고인이 강간 범행의 실행에 착수했다 보기 어렵다 할지라도, 일반적으로 주거침입죄로 처벌하는 그런 주거침입죄와는 달리, 피해자의 주거의 평온을 해함으로써 성범죄의 불안이나 공포를 유발한 사실만으로도 피고인을 엄히 처벌할 수밖에 없습니다." (판결 선고 중)

20분 넘게 판결을 읽어내려 간 재판장이 판결문 원문에는 없는 표현을 즉석에서 덧붙인 부분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주거침입죄로 처벌하는 그런 주거침입죄와는 달리"라는 부분입니다. 조 씨가 범한 주거침입죄는 일반적이지 않고, 처벌도 달리해야 한다는 뜻일 겁니다.

그렇다면 '일반적인' 주거침입죄의 처벌은 어떨까요? 이번 달(2019년 10월) 전국의 1심 법원에서 '주거침입' 혐의만으로 기소된 사건에 대해 내린 판결 10건을 살펴봤습니다. 이 가운데 실형이 선고된 사건은 단 1건뿐이었고 ▲징역형의 집행유예가 2건 ▲벌금형이 5건 ▲벌금형의 집행유예가 1건 ▲선고유예가 1건이었습니다. 주거침입죄에 대해 실형이 선고되는 비율이 낮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결과입니다.

유일하게 실형이 나온 사건을 살펴볼까요. 부산에 사는 한 중국집 배달원이 올 7월 어느날 새벽 4시쯤 면식이 없는 한 10대 여성이 사는 집 건물에 침입한 사건인데요. 판결문을 보면 이 배달원은 마스크를 쓰거나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로 피해자 집 현관문을 수차례 강하게 두드리고, "물건을 놔두고 갔으니 문 열어 보라"라고 외치며 위협했다고 합니다. 신림동 사건과 수법이 비슷하지만 주거침입 혐의로만 기소된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 중국집 배달원은 이미 2016년 주거침입강제추행 혐의로 징역형의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전력이 있고, 집행유예 기간에 또 다시 범행을 한 사람이었습니다. 재판부는 이런 전력을 고려해 실형을 선고했던 겁니다.

결국 형사처벌 전력이 없는 '신림동' 사건의 피고인에게 실형이 선고된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판결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 단순 주거침입 아닌 "여성에 대한 폭력"

이런 판단을 두고 한 중견로펌의 변호사는 재판부가 "여성에 대한 폭력"이라는 문제를 고려했다고 평가했습니다.

이 변호사는 "(성범죄라는 점을 떠나) 형벌의 최후 수단성, 무죄추정의 원칙 등 피고인 인권 보장을 위해 쌓아온 형사법 특유의 법 원칙을 지켜나간다는 측면에서 재판부가 깊이 고민한 흔적이 보인다"라면서, "그런 측면에서 구체적 사건에 천착해서 강간미수로 의율(법규를 구체적 사건에 적용)할 때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벗어나면서, 대신 주거침입 행동에 내포된 여성에 대한 폭력이라는 측면의 문제를 고려한 게 균형점인 것 같다"라고 평가했습니다.

실제로 판결문에는 이런 재판부의 고뇌가 묻어납니다.

"이 사건은 … 불특정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행으로 선량한 시민들 누구나 그와 같은 범죄의 피해자가 될 수도 있다는 불안과 공포를 일으킨다는 점에서 비난가능성 또한 높다. 이 사건의 범행 장면은 언론 등에 수차례 보도됨으로써 1인 가구가 나날이 증가하는 상황에서 주거침입 범죄에 대한 우려와 불안감을 한층 증폭시켰다. 피고인은 이 사건 범행 동기와 관련하여 술을 한잔 하자고 말을 걸기 위하여 피해자의 주거지까지 뒤따라갔다고 진술하나, 그 경위에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을 뿐 아니라 범행의 내용 및 태양(행태) 등에 비추어 보면, 그와 같은 행위로 인한 위험성이 상당히 크다." (판결문 중)

서지현 검사 등 여러 성폭력 피해자를 대리해 온 이은의 변호사도 이번 판결을 긍정적으로 평가했습니다.

이 변호사는 '신림동' 사건을 강간미수로 처벌하긴 어려웠다면서도 "일상적인 주거침입의 경우보다는 무겁게 다루어져야 한다는 법조계의 목소리가 있었다"라면서 "(징역 1년이라는) 양형을 보았을 때 재판부에서도 그런 부분을 받아들인 것으로 보여진다" "그런 점에서 굉장히 의미 있는 판결이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변호사는 이어 "대중적으로 알려진 사건과 그렇지 않은 사건을 대하는 검찰과 법원의 온도차가 있었다는 건 엄연한 현실"이라면서 이번 판결이 "주거에 침입한 이후 강도와 성폭력 등 범죄로 나아갈 수 있었을 법한 상황이 인정되는 경우에는, 양형에 실질적으로 반영해줄 수 있는 계기가 돼야 한다"라고 밝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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