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아프리카돼지열병 권위자 “수영·점프 귀재 멧돼지 최우선 관리해야”

입력 2019.10.22 (18:22) 수정 2019.10.22 (18:26)

읽어주기 기능은 크롬기반의
브라우저에서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10월의 어느 아침. KBS 신관 정문을 들어서는 호세 마누엘 산체스 비스카이노 박사를 처음 만났습니다. 한국 입국 이후 연이은 아프리카돼지열병 관련 세미나와 강연에 살짝 지친 모습이었지만, 사람 좋은 환한 웃음부터 지어보였습니다. 호세 박사는 세계동물보건기구(OIE)에서 운영하는 아프리카돼지열병 표준연구소 소장으로, 지난 40년 동안 아프리카돼지열병만을 연구해 왔습니다. 박사는 이날 KBS 취재진과 함께 북한 접경지역을 둘러보기로 약속했습니다. 자신도 북한 영토를 눈으로 확인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북한이 얼마나 남한과 가까운지, 북한에서의 ASF 전염 가능성은 어느 정도일지 한번 가늠해보겠다고 말했습니다.


"아프리카돼지열병, 北에서 왔을 가능성 높아"

취재진과 호세 박사 일행은 파주에 있는 오두산 통일 전망대에 갔습니다. 박사는 눈앞에 보이는 북한 영토를 보고는, 남한과 북한이 물리적으로 이렇게 가깝다는 것이 놀랍다고 했습니다. 강을 사이에 두고 남북한 거리는 불과 3km 내외, 이 정도라면 북쪽 영토에서 아프리카돼지열병이 전파됐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멧돼지 얘기를 했습니다. 야생멧돼지는 가장 위험한 바이러스 전파 매개체라며, 멧돼지에 의한 전파 가능성을 언급했습니다. 멧돼지가 얼마나 수영을 잘하는지, 얼마나 점프도 잘하는지, 기자에게 자세하게 설명해줬습니다.(호세 박사는 귀국 직후 취재진에게 이메일을 보내, 멧돼지가 본인들 키를 넘어서는 높은 장벽을 훌쩍 넘는 장면, 긴 강을 수영해서 건너고 산을 타는 장면 등이 담긴 동영상을 전해왔습니다.) 멧돼지가 설령 직접 철책을 넘지 못하더라도, 파리나 모기, 쥐 등 멧돼지와 접촉한 2차 매개체들을 통해 바이러스가 휴전선을 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덧붙였습니다.

하지만, 호세 박사는 다른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중국에서 들어오는 사람들이 ASF에 노출된 돼지 부산물들을 가지고 왔을 가능성이 매우 높고, 이런 음식물들이 감염의 원인이 됐을 가능성도 분명히 있다고 말했습니다.


'전파 매개체' 야생멧돼지…방역에 사활 걸어야

휴전선을 앞에 두고 호세 박사는 멧돼지를 어떻게 막아야 할지에 대해서 한참 더 설명했습니다. 일단 한반도에 있는 멧돼지 개체수를 적극적으로 줄이고, 일반 집돼지와의 접촉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을 신속하게 강구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면서 체코의 예를 들었습니다. 체코에서는 2017년 6월에 아프리카돼지열병이 발병한 이후 반년이 안 되는 기간 동안 202건이 발병했습니다. 하지만 이듬해 28건으로 발병 건수가 줄어들었고, 올해는 단 한 건도 발병하지 않았습니다. 최단 기간의 바이러스 박멸 사례인 셈입니다. 체코가 여타 국가들과 가장 달랐던 점은 강력한 '야생멧돼지 관리' 정책이었다고 합니다. 체코 방역당국은 야생멧돼지 절멸까지 염두에 두고 개체수를 적극적으로 줄였습니다. 멧돼지 사냥에 경찰과 군대까지 동원됐습니다. 야생멧돼지에 대한 사냥을 장려하고, 넉넉한 보상금까지 지급했습니다. 멧돼지 폐사체 발견자에게도 보상금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발병 초기부터 3개월 동안 강력한 멧돼지 방역에 들어간 결과 바이러스는 더 이상 확산되지 않았습니다.

호세 박사는 우리나라도 적극적으로 개체수를 줄이는 한편, 일반 농장에 멧돼지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이중으로 농장 담장을 치고 방충망까지 꼭 설치하라고 당부했습니다.


박멸 위해 강력한 '컨트롤 타워' 필요

호세 박사는 강력하고 효율적인 방역을 위해 정부 부처간 협력도 정말 중요하다고 역설했습니다. 호세 박사는 우리나라의 경우 집돼지는 농식품부가, 멧돼지는 환경부가 담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나라 환경부가 초기에 멧돼지가 아프리카돼지열병의 전파 매개체일 가능성을 높게 보지 않았다는 점, 감염 조사에도 종종 소극적인 모습을 보여왔다는 점, 이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높다는 것도 알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유럽도 똑같은 어려움을 겪어왔는데,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면 범정부적인 별도의 위원회가 마련되는 것이 필요하다고 조언했습니다. 모든 부처가 절대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컨트롤타워가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환경부와 농식품부, 그리고 농장주들이 함께 모여 협의하고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덧붙였습니다. 멧돼지 방역과 집돼지 방역이 따로 놀면, 결코 성공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호세 박사와 함께 여의도로 돌아왔습니다. 호세 박사는 본인 휴대전화에 저장된 스페인의 방목형 양돈농장을 보여줬습니다. 풀밭에서 쉬고 있는 돼지가 행복해보이지 않느냐며 말했습니다. “스페인은 이 병을 이기는데 30년이 넘게 걸렸습니다. 너무 긴 시간이었죠. 돼지는 인류의 중요한 식량 자원입니다. 돼지들이 병에 걸려 죽어가는 이 현실을 인류가 막아야죠. 그건 우리의 의무입니다.”

호세 박사는 앞으로도 계속 아프리카돼지열병을 이기는 방법을 연구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백신은 개발 중이지만, 유전적으로 안정되는 데는 최소한 1년 이상의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국에 하고 싶은 이야기가 없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활짝 웃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국은 이 질병을 길지 않은 시간 안에 반드시 극복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정말, 정말 확신합니다.”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취재후] 아프리카돼지열병 권위자 “수영·점프 귀재 멧돼지 최우선 관리해야”
    • 입력 2019-10-22 18:22:23
    • 수정2019-10-22 18:26:51
    취재후·사건후
10월의 어느 아침. KBS 신관 정문을 들어서는 호세 마누엘 산체스 비스카이노 박사를 처음 만났습니다. 한국 입국 이후 연이은 아프리카돼지열병 관련 세미나와 강연에 살짝 지친 모습이었지만, 사람 좋은 환한 웃음부터 지어보였습니다. 호세 박사는 세계동물보건기구(OIE)에서 운영하는 아프리카돼지열병 표준연구소 소장으로, 지난 40년 동안 아프리카돼지열병만을 연구해 왔습니다. 박사는 이날 KBS 취재진과 함께 북한 접경지역을 둘러보기로 약속했습니다. 자신도 북한 영토를 눈으로 확인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북한이 얼마나 남한과 가까운지, 북한에서의 ASF 전염 가능성은 어느 정도일지 한번 가늠해보겠다고 말했습니다.


"아프리카돼지열병, 北에서 왔을 가능성 높아"

취재진과 호세 박사 일행은 파주에 있는 오두산 통일 전망대에 갔습니다. 박사는 눈앞에 보이는 북한 영토를 보고는, 남한과 북한이 물리적으로 이렇게 가깝다는 것이 놀랍다고 했습니다. 강을 사이에 두고 남북한 거리는 불과 3km 내외, 이 정도라면 북쪽 영토에서 아프리카돼지열병이 전파됐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멧돼지 얘기를 했습니다. 야생멧돼지는 가장 위험한 바이러스 전파 매개체라며, 멧돼지에 의한 전파 가능성을 언급했습니다. 멧돼지가 얼마나 수영을 잘하는지, 얼마나 점프도 잘하는지, 기자에게 자세하게 설명해줬습니다.(호세 박사는 귀국 직후 취재진에게 이메일을 보내, 멧돼지가 본인들 키를 넘어서는 높은 장벽을 훌쩍 넘는 장면, 긴 강을 수영해서 건너고 산을 타는 장면 등이 담긴 동영상을 전해왔습니다.) 멧돼지가 설령 직접 철책을 넘지 못하더라도, 파리나 모기, 쥐 등 멧돼지와 접촉한 2차 매개체들을 통해 바이러스가 휴전선을 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덧붙였습니다.

하지만, 호세 박사는 다른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중국에서 들어오는 사람들이 ASF에 노출된 돼지 부산물들을 가지고 왔을 가능성이 매우 높고, 이런 음식물들이 감염의 원인이 됐을 가능성도 분명히 있다고 말했습니다.


'전파 매개체' 야생멧돼지…방역에 사활 걸어야

휴전선을 앞에 두고 호세 박사는 멧돼지를 어떻게 막아야 할지에 대해서 한참 더 설명했습니다. 일단 한반도에 있는 멧돼지 개체수를 적극적으로 줄이고, 일반 집돼지와의 접촉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을 신속하게 강구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면서 체코의 예를 들었습니다. 체코에서는 2017년 6월에 아프리카돼지열병이 발병한 이후 반년이 안 되는 기간 동안 202건이 발병했습니다. 하지만 이듬해 28건으로 발병 건수가 줄어들었고, 올해는 단 한 건도 발병하지 않았습니다. 최단 기간의 바이러스 박멸 사례인 셈입니다. 체코가 여타 국가들과 가장 달랐던 점은 강력한 '야생멧돼지 관리' 정책이었다고 합니다. 체코 방역당국은 야생멧돼지 절멸까지 염두에 두고 개체수를 적극적으로 줄였습니다. 멧돼지 사냥에 경찰과 군대까지 동원됐습니다. 야생멧돼지에 대한 사냥을 장려하고, 넉넉한 보상금까지 지급했습니다. 멧돼지 폐사체 발견자에게도 보상금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발병 초기부터 3개월 동안 강력한 멧돼지 방역에 들어간 결과 바이러스는 더 이상 확산되지 않았습니다.

호세 박사는 우리나라도 적극적으로 개체수를 줄이는 한편, 일반 농장에 멧돼지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이중으로 농장 담장을 치고 방충망까지 꼭 설치하라고 당부했습니다.


박멸 위해 강력한 '컨트롤 타워' 필요

호세 박사는 강력하고 효율적인 방역을 위해 정부 부처간 협력도 정말 중요하다고 역설했습니다. 호세 박사는 우리나라의 경우 집돼지는 농식품부가, 멧돼지는 환경부가 담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나라 환경부가 초기에 멧돼지가 아프리카돼지열병의 전파 매개체일 가능성을 높게 보지 않았다는 점, 감염 조사에도 종종 소극적인 모습을 보여왔다는 점, 이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높다는 것도 알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유럽도 똑같은 어려움을 겪어왔는데,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면 범정부적인 별도의 위원회가 마련되는 것이 필요하다고 조언했습니다. 모든 부처가 절대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컨트롤타워가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환경부와 농식품부, 그리고 농장주들이 함께 모여 협의하고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덧붙였습니다. 멧돼지 방역과 집돼지 방역이 따로 놀면, 결코 성공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호세 박사와 함께 여의도로 돌아왔습니다. 호세 박사는 본인 휴대전화에 저장된 스페인의 방목형 양돈농장을 보여줬습니다. 풀밭에서 쉬고 있는 돼지가 행복해보이지 않느냐며 말했습니다. “스페인은 이 병을 이기는데 30년이 넘게 걸렸습니다. 너무 긴 시간이었죠. 돼지는 인류의 중요한 식량 자원입니다. 돼지들이 병에 걸려 죽어가는 이 현실을 인류가 막아야죠. 그건 우리의 의무입니다.”

호세 박사는 앞으로도 계속 아프리카돼지열병을 이기는 방법을 연구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백신은 개발 중이지만, 유전적으로 안정되는 데는 최소한 1년 이상의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국에 하고 싶은 이야기가 없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활짝 웃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국은 이 질병을 길지 않은 시간 안에 반드시 극복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정말, 정말 확신합니다.”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오늘의 핫 클릭

실시간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뉴스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수신료 수신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