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몸에 포르노까지”…‘고객님’의 성폭력 참아야만 하나요?

입력 2019.10.31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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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성추행입니다. 지난 10월 21일, 고객 집에 방문한 서울지역 도시가스 고객센터 소속 점검원 A 씨가 겪은 일입니다.

당시 남성 고객은 홀로 술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A 씨가 점검 업무를 시작하려 하자, 고객은 불쑥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그리고는 A 씨의 팔과 허리 사이에 손을 쑥 집어넣었습니다.

너무 놀라 주방 쪽으로 급히 피했지만, 고객은 추근거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고객 집에) 방문하면 성추행도 많다면서요"라고 운을 띄우더니, "남자의 성기를 잘라야 한다"라며 불필요한 말을 늘어놓았습니다.

두려움이 몰려왔고, 이곳을 무사히 빠져나가야겠다는 생각만 들었습니다. A 씨는 그 자리에서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고 이를 들은 고객은 "누구와 통화한 거냐?"라고 물어왔습니다.

"남편과 통화했다"라고 답하자, 그제야 추근거림이 멈췄습니다. 하지만 끔찍했던 그 집을 도망치듯 떠난 뒤에도, A 씨의 심장은 무겁게 뛰었습니다.

결국 그날 밤 과호흡이 생겨 응급실에 내원했고, A 씨는 열흘이 지난 지금도 정신과 통원 진료를 받고 있습니다.


■ "이런 일이 한두 번이겠습니까"…성희롱·성추행에 우는 점검원들

여성 가스 점검원들은 고객의 성희롱과 성추행, 폭언과 협박을 '일상'처럼 겪고 있다고 말합니다. 점검원 김윤숙 씨는, 오늘(31일) 오전 서울시청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자신과 동료들이 마주한 경험들을 절박한 마음으로 공개했습니다.

알몸으로 성큼성큼 다가온 고객 앞에서 바위처럼 굳어버렸던 기억부터, 때릴 것처럼 다가오며 욕설을 쏟아내는 고객에 놀라 다른 집으로 도망쳤던 기억, 포르노를 틀어놓고 반응을 기다리는 고객 앞에서 아무 말도 못 했던 기억, 갑작스레 끌어안는 고객을 피해 경찰서까지 미친 듯이 뛰었던 기억까지….

떠올릴 때마다 아찔하고 모멸감이 느껴지는 순간들입니다. 그래도 용기를 내 사람들 앞에 선 건, 이대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마음 놓고 일하기 위해서, 더 나아가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점검원들은 서울시와 도시가스공급사에 안전대책을 마련해달라고 외쳤습니다.

■ "그래도 저는 다시 가야 합니다"…실적 압박에 위험 감수

성추행을 당했던 집에 다시 가는 일이 괜찮을 리 없습니다. 들어가기도 전에 심장이 뛰고 식은땀이 납니다. 그래도 다시 한번 문을 두드리고, 벨을 누를 수밖에 없는 건 '실적 압박' 때문입니다.

서울의 한 점검원은 6개월 동안 4천5백 가구에 대한 방문을 마쳐야 합니다. 도시가스 공급사들이 자체적으로 정한 할당량입니다. 한 번 방문했을 때 점검을 못 했다면 두 번, 세 번 계속해서 찾아야 합니다.

점검하지 않아도 되는 경우는 거주자의 장기 부재나 공가 등의 사유로 세 번 이상 방문했지만 점검을 할 수 없었을 때나, 거주자 본인이 점검을 거부한다는 동의서를 작성했을 때뿐입니다. 점검원 스스로 점검을 하지 않을 권한은 없습니다.

점검원들은 '2인 1조' 근무를 위한 인원 충원과 불합리한 점검 완료 실적 평가를 폐지해달라고 요구하고 있지만, 회사와 지자체는 비용 문제부터 얘기합니다. 도시가스 요금을 올리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며 손을 놓고 있습니다.

여성 도시가스 점검원들이 오늘(31일) 오전 서울시청 앞에서 ‘안전대책 마련 촉구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여성 도시가스 점검원들이 오늘(31일) 오전 서울시청 앞에서 ‘안전대책 마련 촉구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 "결국, 시민 안전을 위한 일입니다"…근본적 대책 마련해야

도시가스사업법에 따라 도시가스를 사용하는 모든 세대는 1년에 한두 번 안전 점검을 받아야 합니다. 결국, 점검원들의 안전은 시민 안전과 직결됩니다.

이태의 공공운수노조 부위원장은 "가스 점검원들은 시민 안전을 위해서 성폭력이 발생해도 모든 가정에 방문해서 안전을 책임져야 한다"라며 "이런 책임을 고스란히 당사자들에게 희생으로 감내하게 하는 건 온당한 정책이 아니다"라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서울시와 도시가스공급사가 제도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라는 겁니다.

앞서 지난 5월 17일 울산에서는 감금과 성폭력 피해를 당한 여성 가스 점검원이 트라우마를 겪다가 극단적인 선택을 시도한 일도 있었습니다. 지금도 전국 곳곳의 가스 점검원들은 각종 위협에 무방비하게 노출돼 있습니다. '안전할 권리'를 요구하는 여성 노동자들의 간절한 목소리가 이번에는 과연 사측과 지자체에 가 닿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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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알몸에 포르노까지”…‘고객님’의 성폭력 참아야만 하나요?
    • 입력 2019-10-31 15:46:54
    취재K
또 성추행입니다. 지난 10월 21일, 고객 집에 방문한 서울지역 도시가스 고객센터 소속 점검원 A 씨가 겪은 일입니다.

당시 남성 고객은 홀로 술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A 씨가 점검 업무를 시작하려 하자, 고객은 불쑥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그리고는 A 씨의 팔과 허리 사이에 손을 쑥 집어넣었습니다.

너무 놀라 주방 쪽으로 급히 피했지만, 고객은 추근거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고객 집에) 방문하면 성추행도 많다면서요"라고 운을 띄우더니, "남자의 성기를 잘라야 한다"라며 불필요한 말을 늘어놓았습니다.

두려움이 몰려왔고, 이곳을 무사히 빠져나가야겠다는 생각만 들었습니다. A 씨는 그 자리에서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고 이를 들은 고객은 "누구와 통화한 거냐?"라고 물어왔습니다.

"남편과 통화했다"라고 답하자, 그제야 추근거림이 멈췄습니다. 하지만 끔찍했던 그 집을 도망치듯 떠난 뒤에도, A 씨의 심장은 무겁게 뛰었습니다.

결국 그날 밤 과호흡이 생겨 응급실에 내원했고, A 씨는 열흘이 지난 지금도 정신과 통원 진료를 받고 있습니다.


■ "이런 일이 한두 번이겠습니까"…성희롱·성추행에 우는 점검원들

여성 가스 점검원들은 고객의 성희롱과 성추행, 폭언과 협박을 '일상'처럼 겪고 있다고 말합니다. 점검원 김윤숙 씨는, 오늘(31일) 오전 서울시청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자신과 동료들이 마주한 경험들을 절박한 마음으로 공개했습니다.

알몸으로 성큼성큼 다가온 고객 앞에서 바위처럼 굳어버렸던 기억부터, 때릴 것처럼 다가오며 욕설을 쏟아내는 고객에 놀라 다른 집으로 도망쳤던 기억, 포르노를 틀어놓고 반응을 기다리는 고객 앞에서 아무 말도 못 했던 기억, 갑작스레 끌어안는 고객을 피해 경찰서까지 미친 듯이 뛰었던 기억까지….

떠올릴 때마다 아찔하고 모멸감이 느껴지는 순간들입니다. 그래도 용기를 내 사람들 앞에 선 건, 이대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마음 놓고 일하기 위해서, 더 나아가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점검원들은 서울시와 도시가스공급사에 안전대책을 마련해달라고 외쳤습니다.

■ "그래도 저는 다시 가야 합니다"…실적 압박에 위험 감수

성추행을 당했던 집에 다시 가는 일이 괜찮을 리 없습니다. 들어가기도 전에 심장이 뛰고 식은땀이 납니다. 그래도 다시 한번 문을 두드리고, 벨을 누를 수밖에 없는 건 '실적 압박' 때문입니다.

서울의 한 점검원은 6개월 동안 4천5백 가구에 대한 방문을 마쳐야 합니다. 도시가스 공급사들이 자체적으로 정한 할당량입니다. 한 번 방문했을 때 점검을 못 했다면 두 번, 세 번 계속해서 찾아야 합니다.

점검하지 않아도 되는 경우는 거주자의 장기 부재나 공가 등의 사유로 세 번 이상 방문했지만 점검을 할 수 없었을 때나, 거주자 본인이 점검을 거부한다는 동의서를 작성했을 때뿐입니다. 점검원 스스로 점검을 하지 않을 권한은 없습니다.

점검원들은 '2인 1조' 근무를 위한 인원 충원과 불합리한 점검 완료 실적 평가를 폐지해달라고 요구하고 있지만, 회사와 지자체는 비용 문제부터 얘기합니다. 도시가스 요금을 올리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며 손을 놓고 있습니다.

여성 도시가스 점검원들이 오늘(31일) 오전 서울시청 앞에서 ‘안전대책 마련 촉구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 "결국, 시민 안전을 위한 일입니다"…근본적 대책 마련해야

도시가스사업법에 따라 도시가스를 사용하는 모든 세대는 1년에 한두 번 안전 점검을 받아야 합니다. 결국, 점검원들의 안전은 시민 안전과 직결됩니다.

이태의 공공운수노조 부위원장은 "가스 점검원들은 시민 안전을 위해서 성폭력이 발생해도 모든 가정에 방문해서 안전을 책임져야 한다"라며 "이런 책임을 고스란히 당사자들에게 희생으로 감내하게 하는 건 온당한 정책이 아니다"라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서울시와 도시가스공급사가 제도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라는 겁니다.

앞서 지난 5월 17일 울산에서는 감금과 성폭력 피해를 당한 여성 가스 점검원이 트라우마를 겪다가 극단적인 선택을 시도한 일도 있었습니다. 지금도 전국 곳곳의 가스 점검원들은 각종 위협에 무방비하게 노출돼 있습니다. '안전할 권리'를 요구하는 여성 노동자들의 간절한 목소리가 이번에는 과연 사측과 지자체에 가 닿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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