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심야심] 법안 164건 통과된 날, 185건 발의…대체 무슨 일이?
입력 2019.11.02 (12:00)
수정 2019.11.02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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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의 마지막 날, 국회에선 모처럼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국회가 본회의를 열어 여야 비쟁점 법안 164건을 처리했다는 소식입니다. 가장 최근에 본회의에서 법안이 통과된 게 8월 2일이니, 딱 90일 만입니다.
하루 만에 법안을 이만큼 통과시켰는데도, 여전히 쌓여있는 법안이 만 5천여 개나 됩니다. 20대 국회는 이제 반년 남았고, 총선을 코앞에 둔 상황이니 남은 법안 처리는 더 쉽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164건의 법안이 본회의에서 통과되던 그 날, 국회에는 그보다 21건이 더 많은 185건의 새 법안이 발의됐습니다.
이날 왜 이렇게 많은 법안이 한꺼번에 발의가 됐는지, 도대체 국회에선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요?
'패스트트랙' 사태 이후 가장 북적였던 국회 의안과
국회 본청 7층에는 국회사무처 의사국 산하 '의안과' 사무실이 있습니다. 국회의원들이 발의한 법안을 접수하는 곳인데, 국회 관계자가 아니면 생소한 곳이죠.
대중에게 의안과가 가장 잘 알려진 사건이 바로 지난 4월 '동물 국회'라고 불린 패스트트랙 사태입니다. 당시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선거법 개정안 등 패스트트랙 법안 제출을 막겠다며 점거한 곳이 바로 이 의안과입니다.
지난달 31일, 의안과는 이 패스트트랙 점거 사태 이후 가장 북적였습니다.
공무원 퇴근 시간이 임박했던 오후 6시, 의안과 사무실에는 보좌진 10여 명이 법안 접수를 하기 위해 하염없이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누구는 스마트폰에 얼굴을 묻고, 누구는 꾸벅 졸다가 의안과 직원이 이름을 부르면 '네' 하고 달려나갔습니다.
안에도 자리가 없어 밖에서 기다려야 했던 어느 보좌진은 언제 내 순서가 오냐며 투덜거렸습니다. 모두, 하루 만에 법안을 185개나 발의하겠다고 몰려왔기 때문에 벌어진 일입니다.
이들은 모두 민주당 보좌진입니다. 이날 발의 접수된 법안 185개 가운데, 민주당 의원이 대표 발의안 법안은 181개, 사실상 전부입니다.
하루 전인 30일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접수 법안 108건 가운데 102건이 민주당 의원 법안입니다.
심지어 이 중 20건은 민주당 이춘석 의원이 전부 대표 발의했습니다. 이 의원은 20대 국회 들어와서 모두 87건의 법안을 발의했는데, 이날 하루에만 20건을 쏟아낸 겁니다.
도대체 민주당에선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요?
"의원 평가가 뭐길래…하위 20%를 피하라!"
모든 건 한 장의 공문에서 시작됐습니다.
민주당은 지난 9월 내년 총선의 공천 심사 평가 자료로 쓸 '국회의원 평가 시행세칙' 개정안을 확정하고, 소속 의원과 보좌진들에게 '제20대 국회의원 최종평가 시행에 관한 안내의 건'이라는 공문을 보냈습니다.
핵심은 '심사 대상기간'입니다. 10월까지 제출한 자료만 국회의원 최종평가의 심사대상으로 인정해주겠다는 겁니다.
이번에 실시하는 최종평가는 크게 ▲의정활동 ▲기여활동 ▲공약이행활동 ▲지역활동으로 구성되는데, 총점의 1/3가량을 차지하는 의정활동에 '대표발의 법안 수'가 입법수행실적 점수로 포함됩니다.
최종평가와 이전에 실시한 중간평가를 합산한 종합평가 점수가 하위 20%에 해당할 경우, 해당 의원은 내년 공천에서 20%의 감점을 받습니다.
경선 상대가 정치 신인이나 여성, 혹은 청년이라 가산점까지 받는다고 하면, 아무리 현역 의원이라도 쉽지 않습니다.
10월의 마지막 날, 그 어느 때보다 의안과 앞이 붐볐던 이유입니다.
"평가항목의 극히 일부"…"다 아는 사람들끼리 왜 이러세요."
민주당은 억울하다는 입장입니다.
투명한 공천, 예측 가능한 공천을 위해 평가 기준을 일찍이 마련해 공지했고, 대표발의 법안 수는 여러 평가지표 가운데 극히 일부라는 겁니다.
이에 대해 익명의 보좌진은 페이스북에서 이렇게 반박합니다.
한 민주당 보좌진도 비슷하게 얘기합니다. 점수 반영 비중이 크지 않더라도, 의원실마다 경쟁적으로 법안을 제출하면 의원들은 초연할 수 없는 거라고 말이죠.
좋은 법안이 많이 제출된 거라면 환영할 일입니다. 문제는 하루 동안 수 십개씩 발의된 법이 제대로 만들어졌을 리 없다는 겁니다.
민주당 또 다른 보좌진은 통화에서 법안 하나를 제대로 공들여서 만들려면 한 달에 한두 개 만들기도 쉽지 않다고 털어놨습니다.
실제 민주당 이춘석 의원이 최근 잇따라 제출한 개정 법안들을 보면 "임원 임명 후 파산선고를 받거나 금고 이상의 형의 선고유예를 받은 임원의 당연퇴직에 관해서는 '국가공무원법'에 따른 당연퇴직 규정을 적용받도록 한다"는 내용이 공공기관 이름만 바꿔가며 반복됩니다.
국회 행정력이 낭비되는 것도 문제입니다.
국회 상임위원회 전문위원들은 발의된 모든 법안에 대해 검토보고서를 작성해야 하는데, '실적 채우기용' 법안들에 치이다 보면, 정작 유의미한 법안에 대한 검토가 밀릴 수 있습니다.
국회의원의 가장 중요한 역할 중 하나가 '입법'입니다. 일 많이 하는 의원, 좋은 법안을 많이 제출해 통과에 힘쓴 의원에게 공천에서 더 높은 점수를 주는 건 응당 바람직합니다.
하지만 본래의 선한 취지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꼼수'로 국회의 행정력까지 낭비하게 한다면, 과연 가산점을 주는 게 옳은 일일까요?
하루 만에 법안을 이만큼 통과시켰는데도, 여전히 쌓여있는 법안이 만 5천여 개나 됩니다. 20대 국회는 이제 반년 남았고, 총선을 코앞에 둔 상황이니 남은 법안 처리는 더 쉽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164건의 법안이 본회의에서 통과되던 그 날, 국회에는 그보다 21건이 더 많은 185건의 새 법안이 발의됐습니다.
이날 왜 이렇게 많은 법안이 한꺼번에 발의가 됐는지, 도대체 국회에선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요?
'패스트트랙' 사태 이후 가장 북적였던 국회 의안과
국회 본청 7층에는 국회사무처 의사국 산하 '의안과' 사무실이 있습니다. 국회의원들이 발의한 법안을 접수하는 곳인데, 국회 관계자가 아니면 생소한 곳이죠.
대중에게 의안과가 가장 잘 알려진 사건이 바로 지난 4월 '동물 국회'라고 불린 패스트트랙 사태입니다. 당시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선거법 개정안 등 패스트트랙 법안 제출을 막겠다며 점거한 곳이 바로 이 의안과입니다.
지난 4월,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패스트트랙 법안 제출을 막기 위해 국회 의안과 사무실 앞을 점거하고 있다.
지난달 31일, 의안과는 이 패스트트랙 점거 사태 이후 가장 북적였습니다.
공무원 퇴근 시간이 임박했던 오후 6시, 의안과 사무실에는 보좌진 10여 명이 법안 접수를 하기 위해 하염없이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누구는 스마트폰에 얼굴을 묻고, 누구는 꾸벅 졸다가 의안과 직원이 이름을 부르면 '네' 하고 달려나갔습니다.
안에도 자리가 없어 밖에서 기다려야 했던 어느 보좌진은 언제 내 순서가 오냐며 투덜거렸습니다. 모두, 하루 만에 법안을 185개나 발의하겠다고 몰려왔기 때문에 벌어진 일입니다.
국회 의안과 사무실에서 민주당 보좌진들이 법안 접수를 위해 대기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민주당 보좌진입니다. 이날 발의 접수된 법안 185개 가운데, 민주당 의원이 대표 발의안 법안은 181개, 사실상 전부입니다.
하루 전인 30일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접수 법안 108건 가운데 102건이 민주당 의원 법안입니다.
심지어 이 중 20건은 민주당 이춘석 의원이 전부 대표 발의했습니다. 이 의원은 20대 국회 들어와서 모두 87건의 법안을 발의했는데, 이날 하루에만 20건을 쏟아낸 겁니다.
지난달 30일 의안정보시스템에 등록된 법안 목록. 이날 접수 법안 108건 가운데 민주당 이춘석 의원이 20건을 발의했다.
도대체 민주당에선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요?
"의원 평가가 뭐길래…하위 20%를 피하라!"
모든 건 한 장의 공문에서 시작됐습니다.
민주당은 지난 9월 내년 총선의 공천 심사 평가 자료로 쓸 '국회의원 평가 시행세칙' 개정안을 확정하고, 소속 의원과 보좌진들에게 '제20대 국회의원 최종평가 시행에 관한 안내의 건'이라는 공문을 보냈습니다.
민주당 중앙당 선출직공직자평가위원회가 당 소속 국회의원과 보좌진에게 발송한 공문
핵심은 '심사 대상기간'입니다. 10월까지 제출한 자료만 국회의원 최종평가의 심사대상으로 인정해주겠다는 겁니다.
이번에 실시하는 최종평가는 크게 ▲의정활동 ▲기여활동 ▲공약이행활동 ▲지역활동으로 구성되는데, 총점의 1/3가량을 차지하는 의정활동에 '대표발의 법안 수'가 입법수행실적 점수로 포함됩니다.
최종평가와 이전에 실시한 중간평가를 합산한 종합평가 점수가 하위 20%에 해당할 경우, 해당 의원은 내년 공천에서 20%의 감점을 받습니다.
경선 상대가 정치 신인이나 여성, 혹은 청년이라 가산점까지 받는다고 하면, 아무리 현역 의원이라도 쉽지 않습니다.
10월의 마지막 날, 그 어느 때보다 의안과 앞이 붐볐던 이유입니다.
"평가항목의 극히 일부"…"다 아는 사람들끼리 왜 이러세요."
민주당은 억울하다는 입장입니다.
투명한 공천, 예측 가능한 공천을 위해 평가 기준을 일찍이 마련해 공지했고, 대표발의 법안 수는 여러 평가지표 가운데 극히 일부라는 겁니다.
이에 대해 익명의 보좌진은 페이스북에서 이렇게 반박합니다.
한 민주당 보좌진도 비슷하게 얘기합니다. 점수 반영 비중이 크지 않더라도, 의원실마다 경쟁적으로 법안을 제출하면 의원들은 초연할 수 없는 거라고 말이죠.
좋은 법안이 많이 제출된 거라면 환영할 일입니다. 문제는 하루 동안 수 십개씩 발의된 법이 제대로 만들어졌을 리 없다는 겁니다.
민주당 또 다른 보좌진은 통화에서 법안 하나를 제대로 공들여서 만들려면 한 달에 한두 개 만들기도 쉽지 않다고 털어놨습니다.
실제 민주당 이춘석 의원이 최근 잇따라 제출한 개정 법안들을 보면 "임원 임명 후 파산선고를 받거나 금고 이상의 형의 선고유예를 받은 임원의 당연퇴직에 관해서는 '국가공무원법'에 따른 당연퇴직 규정을 적용받도록 한다"는 내용이 공공기관 이름만 바꿔가며 반복됩니다.
국회 행정력이 낭비되는 것도 문제입니다.
국회 상임위원회 전문위원들은 발의된 모든 법안에 대해 검토보고서를 작성해야 하는데, '실적 채우기용' 법안들에 치이다 보면, 정작 유의미한 법안에 대한 검토가 밀릴 수 있습니다.
국회의원의 가장 중요한 역할 중 하나가 '입법'입니다. 일 많이 하는 의원, 좋은 법안을 많이 제출해 통과에 힘쓴 의원에게 공천에서 더 높은 점수를 주는 건 응당 바람직합니다.
하지만 본래의 선한 취지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꼼수'로 국회의 행정력까지 낭비하게 한다면, 과연 가산점을 주는 게 옳은 일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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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19-11-02 12:00:32
- 수정2019-11-02 13:15:41
10월의 마지막 날, 국회에선 모처럼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국회가 본회의를 열어 여야 비쟁점 법안 164건을 처리했다는 소식입니다. 가장 최근에 본회의에서 법안이 통과된 게 8월 2일이니, 딱 90일 만입니다.
하루 만에 법안을 이만큼 통과시켰는데도, 여전히 쌓여있는 법안이 만 5천여 개나 됩니다. 20대 국회는 이제 반년 남았고, 총선을 코앞에 둔 상황이니 남은 법안 처리는 더 쉽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164건의 법안이 본회의에서 통과되던 그 날, 국회에는 그보다 21건이 더 많은 185건의 새 법안이 발의됐습니다.
이날 왜 이렇게 많은 법안이 한꺼번에 발의가 됐는지, 도대체 국회에선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요?
'패스트트랙' 사태 이후 가장 북적였던 국회 의안과
국회 본청 7층에는 국회사무처 의사국 산하 '의안과' 사무실이 있습니다. 국회의원들이 발의한 법안을 접수하는 곳인데, 국회 관계자가 아니면 생소한 곳이죠.
대중에게 의안과가 가장 잘 알려진 사건이 바로 지난 4월 '동물 국회'라고 불린 패스트트랙 사태입니다. 당시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선거법 개정안 등 패스트트랙 법안 제출을 막겠다며 점거한 곳이 바로 이 의안과입니다.
지난달 31일, 의안과는 이 패스트트랙 점거 사태 이후 가장 북적였습니다.
공무원 퇴근 시간이 임박했던 오후 6시, 의안과 사무실에는 보좌진 10여 명이 법안 접수를 하기 위해 하염없이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누구는 스마트폰에 얼굴을 묻고, 누구는 꾸벅 졸다가 의안과 직원이 이름을 부르면 '네' 하고 달려나갔습니다.
안에도 자리가 없어 밖에서 기다려야 했던 어느 보좌진은 언제 내 순서가 오냐며 투덜거렸습니다. 모두, 하루 만에 법안을 185개나 발의하겠다고 몰려왔기 때문에 벌어진 일입니다.
이들은 모두 민주당 보좌진입니다. 이날 발의 접수된 법안 185개 가운데, 민주당 의원이 대표 발의안 법안은 181개, 사실상 전부입니다.
하루 전인 30일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접수 법안 108건 가운데 102건이 민주당 의원 법안입니다.
심지어 이 중 20건은 민주당 이춘석 의원이 전부 대표 발의했습니다. 이 의원은 20대 국회 들어와서 모두 87건의 법안을 발의했는데, 이날 하루에만 20건을 쏟아낸 겁니다.
도대체 민주당에선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요?
"의원 평가가 뭐길래…하위 20%를 피하라!"
모든 건 한 장의 공문에서 시작됐습니다.
민주당은 지난 9월 내년 총선의 공천 심사 평가 자료로 쓸 '국회의원 평가 시행세칙' 개정안을 확정하고, 소속 의원과 보좌진들에게 '제20대 국회의원 최종평가 시행에 관한 안내의 건'이라는 공문을 보냈습니다.
핵심은 '심사 대상기간'입니다. 10월까지 제출한 자료만 국회의원 최종평가의 심사대상으로 인정해주겠다는 겁니다.
이번에 실시하는 최종평가는 크게 ▲의정활동 ▲기여활동 ▲공약이행활동 ▲지역활동으로 구성되는데, 총점의 1/3가량을 차지하는 의정활동에 '대표발의 법안 수'가 입법수행실적 점수로 포함됩니다.
최종평가와 이전에 실시한 중간평가를 합산한 종합평가 점수가 하위 20%에 해당할 경우, 해당 의원은 내년 공천에서 20%의 감점을 받습니다.
경선 상대가 정치 신인이나 여성, 혹은 청년이라 가산점까지 받는다고 하면, 아무리 현역 의원이라도 쉽지 않습니다.
10월의 마지막 날, 그 어느 때보다 의안과 앞이 붐볐던 이유입니다.
"평가항목의 극히 일부"…"다 아는 사람들끼리 왜 이러세요."
민주당은 억울하다는 입장입니다.
투명한 공천, 예측 가능한 공천을 위해 평가 기준을 일찍이 마련해 공지했고, 대표발의 법안 수는 여러 평가지표 가운데 극히 일부라는 겁니다.
이에 대해 익명의 보좌진은 페이스북에서 이렇게 반박합니다.
한 민주당 보좌진도 비슷하게 얘기합니다. 점수 반영 비중이 크지 않더라도, 의원실마다 경쟁적으로 법안을 제출하면 의원들은 초연할 수 없는 거라고 말이죠.
좋은 법안이 많이 제출된 거라면 환영할 일입니다. 문제는 하루 동안 수 십개씩 발의된 법이 제대로 만들어졌을 리 없다는 겁니다.
민주당 또 다른 보좌진은 통화에서 법안 하나를 제대로 공들여서 만들려면 한 달에 한두 개 만들기도 쉽지 않다고 털어놨습니다.
실제 민주당 이춘석 의원이 최근 잇따라 제출한 개정 법안들을 보면 "임원 임명 후 파산선고를 받거나 금고 이상의 형의 선고유예를 받은 임원의 당연퇴직에 관해서는 '국가공무원법'에 따른 당연퇴직 규정을 적용받도록 한다"는 내용이 공공기관 이름만 바꿔가며 반복됩니다.
국회 행정력이 낭비되는 것도 문제입니다.
국회 상임위원회 전문위원들은 발의된 모든 법안에 대해 검토보고서를 작성해야 하는데, '실적 채우기용' 법안들에 치이다 보면, 정작 유의미한 법안에 대한 검토가 밀릴 수 있습니다.
국회의원의 가장 중요한 역할 중 하나가 '입법'입니다. 일 많이 하는 의원, 좋은 법안을 많이 제출해 통과에 힘쓴 의원에게 공천에서 더 높은 점수를 주는 건 응당 바람직합니다.
하지만 본래의 선한 취지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꼼수'로 국회의 행정력까지 낭비하게 한다면, 과연 가산점을 주는 게 옳은 일일까요?
하루 만에 법안을 이만큼 통과시켰는데도, 여전히 쌓여있는 법안이 만 5천여 개나 됩니다. 20대 국회는 이제 반년 남았고, 총선을 코앞에 둔 상황이니 남은 법안 처리는 더 쉽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164건의 법안이 본회의에서 통과되던 그 날, 국회에는 그보다 21건이 더 많은 185건의 새 법안이 발의됐습니다.
이날 왜 이렇게 많은 법안이 한꺼번에 발의가 됐는지, 도대체 국회에선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요?
'패스트트랙' 사태 이후 가장 북적였던 국회 의안과
국회 본청 7층에는 국회사무처 의사국 산하 '의안과' 사무실이 있습니다. 국회의원들이 발의한 법안을 접수하는 곳인데, 국회 관계자가 아니면 생소한 곳이죠.
대중에게 의안과가 가장 잘 알려진 사건이 바로 지난 4월 '동물 국회'라고 불린 패스트트랙 사태입니다. 당시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선거법 개정안 등 패스트트랙 법안 제출을 막겠다며 점거한 곳이 바로 이 의안과입니다.
지난달 31일, 의안과는 이 패스트트랙 점거 사태 이후 가장 북적였습니다.
공무원 퇴근 시간이 임박했던 오후 6시, 의안과 사무실에는 보좌진 10여 명이 법안 접수를 하기 위해 하염없이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누구는 스마트폰에 얼굴을 묻고, 누구는 꾸벅 졸다가 의안과 직원이 이름을 부르면 '네' 하고 달려나갔습니다.
안에도 자리가 없어 밖에서 기다려야 했던 어느 보좌진은 언제 내 순서가 오냐며 투덜거렸습니다. 모두, 하루 만에 법안을 185개나 발의하겠다고 몰려왔기 때문에 벌어진 일입니다.
이들은 모두 민주당 보좌진입니다. 이날 발의 접수된 법안 185개 가운데, 민주당 의원이 대표 발의안 법안은 181개, 사실상 전부입니다.
하루 전인 30일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접수 법안 108건 가운데 102건이 민주당 의원 법안입니다.
심지어 이 중 20건은 민주당 이춘석 의원이 전부 대표 발의했습니다. 이 의원은 20대 국회 들어와서 모두 87건의 법안을 발의했는데, 이날 하루에만 20건을 쏟아낸 겁니다.
도대체 민주당에선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요?
"의원 평가가 뭐길래…하위 20%를 피하라!"
모든 건 한 장의 공문에서 시작됐습니다.
민주당은 지난 9월 내년 총선의 공천 심사 평가 자료로 쓸 '국회의원 평가 시행세칙' 개정안을 확정하고, 소속 의원과 보좌진들에게 '제20대 국회의원 최종평가 시행에 관한 안내의 건'이라는 공문을 보냈습니다.
핵심은 '심사 대상기간'입니다. 10월까지 제출한 자료만 국회의원 최종평가의 심사대상으로 인정해주겠다는 겁니다.
이번에 실시하는 최종평가는 크게 ▲의정활동 ▲기여활동 ▲공약이행활동 ▲지역활동으로 구성되는데, 총점의 1/3가량을 차지하는 의정활동에 '대표발의 법안 수'가 입법수행실적 점수로 포함됩니다.
최종평가와 이전에 실시한 중간평가를 합산한 종합평가 점수가 하위 20%에 해당할 경우, 해당 의원은 내년 공천에서 20%의 감점을 받습니다.
경선 상대가 정치 신인이나 여성, 혹은 청년이라 가산점까지 받는다고 하면, 아무리 현역 의원이라도 쉽지 않습니다.
10월의 마지막 날, 그 어느 때보다 의안과 앞이 붐볐던 이유입니다.
"평가항목의 극히 일부"…"다 아는 사람들끼리 왜 이러세요."
민주당은 억울하다는 입장입니다.
투명한 공천, 예측 가능한 공천을 위해 평가 기준을 일찍이 마련해 공지했고, 대표발의 법안 수는 여러 평가지표 가운데 극히 일부라는 겁니다.
이에 대해 익명의 보좌진은 페이스북에서 이렇게 반박합니다.
한 민주당 보좌진도 비슷하게 얘기합니다. 점수 반영 비중이 크지 않더라도, 의원실마다 경쟁적으로 법안을 제출하면 의원들은 초연할 수 없는 거라고 말이죠.
좋은 법안이 많이 제출된 거라면 환영할 일입니다. 문제는 하루 동안 수 십개씩 발의된 법이 제대로 만들어졌을 리 없다는 겁니다.
민주당 또 다른 보좌진은 통화에서 법안 하나를 제대로 공들여서 만들려면 한 달에 한두 개 만들기도 쉽지 않다고 털어놨습니다.
실제 민주당 이춘석 의원이 최근 잇따라 제출한 개정 법안들을 보면 "임원 임명 후 파산선고를 받거나 금고 이상의 형의 선고유예를 받은 임원의 당연퇴직에 관해서는 '국가공무원법'에 따른 당연퇴직 규정을 적용받도록 한다"는 내용이 공공기관 이름만 바꿔가며 반복됩니다.
국회 행정력이 낭비되는 것도 문제입니다.
국회 상임위원회 전문위원들은 발의된 모든 법안에 대해 검토보고서를 작성해야 하는데, '실적 채우기용' 법안들에 치이다 보면, 정작 유의미한 법안에 대한 검토가 밀릴 수 있습니다.
국회의원의 가장 중요한 역할 중 하나가 '입법'입니다. 일 많이 하는 의원, 좋은 법안을 많이 제출해 통과에 힘쓴 의원에게 공천에서 더 높은 점수를 주는 건 응당 바람직합니다.
하지만 본래의 선한 취지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꼼수'로 국회의 행정력까지 낭비하게 한다면, 과연 가산점을 주는 게 옳은 일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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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나루 기자 naru@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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