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리포트] 끝이 보이지 않는 ‘혼란의 칠레’…어떤 결말을 맺을까?

입력 2019.11.06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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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는 나라 칠레, 환태평양조산대에 위치해 잦은 지진에 방재 시스템이 잘 갖춰진 나라이자 남미에서는 비교적 잘 사는 나라로 알려졌었다. 하지만 이면에는 '사회 불평등'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이 가득했다. 빈부 양극화와 치솟는 공공요금에 생활고는 깊어만 갔다. 사회 구조의 문제점을 외치는 칠레 시민들의 시위는 3주째를 맞고 있다. 많은 시민이 하루도 빠지지 않고 칠레 수도 산티아고 2곳의 주요 광장에 나와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 시위대는 돌을 던지고 경찰은 최루탄과 물대포로 맞선다. 지하철 요금 30페소(약 50원)인상에서 촉발돼 반정부 시위로 확산한 이번 사태는 전혀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혼란의 칠레는 어떤 결말을 맺을까?

인상 철회 뒤 급히 수정된 산티아고 지하철 요금표인상 철회 뒤 급히 수정된 산티아고 지하철 요금표

"요금 싸게 내려면 일찍 일어나라"

이번 시위의 직접적 원인은 10월 6일 정부가 발표한 지하철 요금 인상 때문이었다. 지난 1월 요금을 인상한 데 이어 10월 초 30페소(약 50원)를 또 인상한다는 발표가 학생들의 분노를 일으켰다. 칠레 산티아고의 전철은 6개 노선으로 학생들의 주요한 이동 수단이다. 이들은 지하철 주요 역사에 몰려가 요금 지불을 거부하고 개찰구를 뛰어넘으며 요금 인상에 항의했다.

학생들을 더욱 화나게 한 것은 경제 장관의 발언이었다. "요금을 싸게 내려면 일찍 일어나라"는 것이었다. 산티아고의 지하철 요금은 오전 7시부터 오전 9시까지 출퇴근 때에 요금이 할증되고 7시 이전에는 요금이 할인된다. 장관은 이어 "버스와 지하철 무료 환승을 따지면 다른 나라에 비해 요금은 비싸지 않다"고까지 말했다. 요금 인상의 이유와 당위성을 국민들에게 설득하기보다는 정부 입장만을 내세운 전형적인 불통의 모습이었다.

도심 건물에 쓰인 “30페소 아니고 30년입니다” 구호도심 건물에 쓰인 “30페소 아니고 30년입니다” 구호

"칠레는 깨어났다"

시위는 들불처럼 번졌다. 학생들이 중심이 된 시위는 전 계층의 항의 시위로 번져갔다. 산티아고 이탈리아 광장 등 주요 광장과 거리마다 수만 명의 시민이 몰려나왔다. 이들은 단지 30페소의 지하철 요금인상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불평등을 지적하며 "칠레는 깨어났다"고 외쳤다. "30페소의 문제가 아니라 30년의 문제다"라며 그동안 쌓인 사회 구조적 문제의 전반적인 개혁을 주장했다. 한 달 최저임금이 50여만 원, 근로자의 절반 정도가 60여만 원의 임금을 받는 현실에서 지하철 요금이 우리 돈 천 3백여 원으로 월급의 15%에서 많게는 30%까지 차지하는 생활고는 사회적 불평등 구조에서 비롯됐다고 지적했다.

중산층 세 식구의 파블로 씨 가정을 방문해 생활비를 조사해 보니, 월급에서 전기와 가스, 수돗물 요금이 차지하는 비중이 15%, 정부 연금과 의료비 지출이 20%, 이외에 집값 대출금 상환과 아이 교육비, 통신비 등을 제외하니 소비 지출 여력은 전혀 없었다.

부의 집중…양극화의 그늘

실제, 칠레 정부 발표 자료에 따른 상위 부자 10%와 하위 10%의 소득 격차는 39배에 달한다. 2006년 30배에서 그 격차는 더욱 벌어졌다. 2017년 통계에서는 상위 1% 부자들이 국가 전체 부의 26%를 소유했고, 하위계층 50%의 재산은 2.1%에 불과했다. 칠레 1인당 국민소득이 만5천 달러에서 2만 달러로 추정돼 남미에서는 경제적으로 안정된 나라로 알려졌지만, 양극화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공공재 전기와 가스의 민영화 이후, 요금은 빈번하게 인상됐다는 게 칠레 시민들의 얘기다. 소득 불균형과 양극화 속에서 공공요금의 인상은 서민들의 삶을 무겁게 억누르고 있었다. 산티아고 중심가 호텔 직원 호세(60세)씨는 "지하철 요금 인상은 물이 꽉 찬 컵을 넘치게 하는 마지막 한 방울의 물과 같은 거였습니다. 오랜 기간 불만이 쌓인 거죠" 라며 임계점에 달했던 시민들의 분노를 표현했다.

광장 동상 위에서 국기 흔드는 시위대광장 동상 위에서 국기 흔드는 시위대

"헌법 개정"…'펭귄 혁명'을 간과한 걸까
피녜라 대통령은 지속되는 시위에 기초 연금 수령액을 20% 올리고 최저임금을 17% 올리겠다는 등의 복지개선안을 포함한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했다. 국가 재정 약 12억 달러의 예산이 들어갈 것으로 예상한다고 현지 언론은 보도했다. 재원 마련을 위해서 고소득층 고세율 구간을 신설하고 고위 공무원의 임금도 대폭 줄인다는 계획이다. 하지만 시위대는 대통령의 유화책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맞서면서 다시 거리로 나왔다. 이는 미흡한 정책 개선안으로, 근원적인 문제인 전기와 가스, 수돗물 등 공공재의 국영화와 헌법의 개정을 요구하고 있다. 1990년까지 17년간의 피노체트 군부 독재 시절 제정된 헌법을 바꾸고 이를 위해 새로운 의회를 구성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사회 불평등에 대한 실질적인 개혁, 인간으로서의 삶을 보장하기 위해 헌법을 뜯어고치라는 것이다.

2006년 칠레에서는 '펭귄 혁명'으로 불리는 대규모 학생 시위가 있었다. 칠레 고등학생들의 교복이 펭귄 모습과 닮았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이 시위에는 60만 명 이상의 학생들이 거리로 나와 대입 시험 수험료 인상과 학생 대중교통 카드 사용 한도 제한에 항의했다. 이번 시위를 제외하고 칠레 역사상 대규모 시위로 기록됐다. 수험료와 교통요금 인상 반대에서 비롯된 '펭귄 혁명'은 국가 교육의 개선을 요구하는 시위로 확대됐다. 3주째 이어지는 이번 사태를 시민들은 '펭귄 혁명'에 연장선이라고 보고 있다.

냄비 두드리며 대통령 하야 촉구

시위대는 피녜라 대통령의 하야까지 촉구하며 물러서지 않고 있다. "단결된 국민은 반드시 이긴다"라는 노래를 부르며 시위는 멈추지 않고 있다. 밤이 되면 시민들은 창문을 열고 너나 할 것 없이 냄비를 두드리며 정부에 항의하고 있다.

피녜라 대통령은 이달 중순 예정됐던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APEC 정상회의와 12월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 등 2가지 굵직한 국제행사를 포기했다. 고통스러운 고민 끝에 국가 질서 안정이 우선이라는 판단에서 이같은 결정을 내렸다고 밝혔다. 대외적 이미지 타격에도 이 같은 결정을 내린 배경에는 스스로 물러나기보다는 야당과의 대화 등 사태 해결책 마련을 위해 시위대와의 장기전에 돌입한 양상이다.

지금까지 20여 명이 숨졌다. 하지만,시간이 갈수록 경찰의 진압은 거칠어지고 시위대의 반정부 항의 목소리는 더욱 커져 인명 피해는 더 늘 것으로 우려된다. 허술한 치안을 틈탄 약탈과 방화도 잇따르고 상점들은 이른 낮에 철시하는 등 경제적 손실이 늘어나고 있다. 지금까지 2조 원에 가까운 손실이 예상되지만 얼마나 더 큰 피해가 날지는 미지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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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11-06 07:05:32
    특파원 리포트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는 나라 칠레, 환태평양조산대에 위치해 잦은 지진에 방재 시스템이 잘 갖춰진 나라이자 남미에서는 비교적 잘 사는 나라로 알려졌었다. 하지만 이면에는 '사회 불평등'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이 가득했다. 빈부 양극화와 치솟는 공공요금에 생활고는 깊어만 갔다. 사회 구조의 문제점을 외치는 칠레 시민들의 시위는 3주째를 맞고 있다. 많은 시민이 하루도 빠지지 않고 칠레 수도 산티아고 2곳의 주요 광장에 나와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 시위대는 돌을 던지고 경찰은 최루탄과 물대포로 맞선다. 지하철 요금 30페소(약 50원)인상에서 촉발돼 반정부 시위로 확산한 이번 사태는 전혀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혼란의 칠레는 어떤 결말을 맺을까?

인상 철회 뒤 급히 수정된 산티아고 지하철 요금표
"요금 싸게 내려면 일찍 일어나라"

이번 시위의 직접적 원인은 10월 6일 정부가 발표한 지하철 요금 인상 때문이었다. 지난 1월 요금을 인상한 데 이어 10월 초 30페소(약 50원)를 또 인상한다는 발표가 학생들의 분노를 일으켰다. 칠레 산티아고의 전철은 6개 노선으로 학생들의 주요한 이동 수단이다. 이들은 지하철 주요 역사에 몰려가 요금 지불을 거부하고 개찰구를 뛰어넘으며 요금 인상에 항의했다.

학생들을 더욱 화나게 한 것은 경제 장관의 발언이었다. "요금을 싸게 내려면 일찍 일어나라"는 것이었다. 산티아고의 지하철 요금은 오전 7시부터 오전 9시까지 출퇴근 때에 요금이 할증되고 7시 이전에는 요금이 할인된다. 장관은 이어 "버스와 지하철 무료 환승을 따지면 다른 나라에 비해 요금은 비싸지 않다"고까지 말했다. 요금 인상의 이유와 당위성을 국민들에게 설득하기보다는 정부 입장만을 내세운 전형적인 불통의 모습이었다.

도심 건물에 쓰인 “30페소 아니고 30년입니다” 구호
"칠레는 깨어났다"

시위는 들불처럼 번졌다. 학생들이 중심이 된 시위는 전 계층의 항의 시위로 번져갔다. 산티아고 이탈리아 광장 등 주요 광장과 거리마다 수만 명의 시민이 몰려나왔다. 이들은 단지 30페소의 지하철 요금인상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불평등을 지적하며 "칠레는 깨어났다"고 외쳤다. "30페소의 문제가 아니라 30년의 문제다"라며 그동안 쌓인 사회 구조적 문제의 전반적인 개혁을 주장했다. 한 달 최저임금이 50여만 원, 근로자의 절반 정도가 60여만 원의 임금을 받는 현실에서 지하철 요금이 우리 돈 천 3백여 원으로 월급의 15%에서 많게는 30%까지 차지하는 생활고는 사회적 불평등 구조에서 비롯됐다고 지적했다.

중산층 세 식구의 파블로 씨 가정을 방문해 생활비를 조사해 보니, 월급에서 전기와 가스, 수돗물 요금이 차지하는 비중이 15%, 정부 연금과 의료비 지출이 20%, 이외에 집값 대출금 상환과 아이 교육비, 통신비 등을 제외하니 소비 지출 여력은 전혀 없었다.

부의 집중…양극화의 그늘

실제, 칠레 정부 발표 자료에 따른 상위 부자 10%와 하위 10%의 소득 격차는 39배에 달한다. 2006년 30배에서 그 격차는 더욱 벌어졌다. 2017년 통계에서는 상위 1% 부자들이 국가 전체 부의 26%를 소유했고, 하위계층 50%의 재산은 2.1%에 불과했다. 칠레 1인당 국민소득이 만5천 달러에서 2만 달러로 추정돼 남미에서는 경제적으로 안정된 나라로 알려졌지만, 양극화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공공재 전기와 가스의 민영화 이후, 요금은 빈번하게 인상됐다는 게 칠레 시민들의 얘기다. 소득 불균형과 양극화 속에서 공공요금의 인상은 서민들의 삶을 무겁게 억누르고 있었다. 산티아고 중심가 호텔 직원 호세(60세)씨는 "지하철 요금 인상은 물이 꽉 찬 컵을 넘치게 하는 마지막 한 방울의 물과 같은 거였습니다. 오랜 기간 불만이 쌓인 거죠" 라며 임계점에 달했던 시민들의 분노를 표현했다.

광장 동상 위에서 국기 흔드는 시위대
"헌법 개정"…'펭귄 혁명'을 간과한 걸까
피녜라 대통령은 지속되는 시위에 기초 연금 수령액을 20% 올리고 최저임금을 17% 올리겠다는 등의 복지개선안을 포함한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했다. 국가 재정 약 12억 달러의 예산이 들어갈 것으로 예상한다고 현지 언론은 보도했다. 재원 마련을 위해서 고소득층 고세율 구간을 신설하고 고위 공무원의 임금도 대폭 줄인다는 계획이다. 하지만 시위대는 대통령의 유화책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맞서면서 다시 거리로 나왔다. 이는 미흡한 정책 개선안으로, 근원적인 문제인 전기와 가스, 수돗물 등 공공재의 국영화와 헌법의 개정을 요구하고 있다. 1990년까지 17년간의 피노체트 군부 독재 시절 제정된 헌법을 바꾸고 이를 위해 새로운 의회를 구성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사회 불평등에 대한 실질적인 개혁, 인간으로서의 삶을 보장하기 위해 헌법을 뜯어고치라는 것이다.

2006년 칠레에서는 '펭귄 혁명'으로 불리는 대규모 학생 시위가 있었다. 칠레 고등학생들의 교복이 펭귄 모습과 닮았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이 시위에는 60만 명 이상의 학생들이 거리로 나와 대입 시험 수험료 인상과 학생 대중교통 카드 사용 한도 제한에 항의했다. 이번 시위를 제외하고 칠레 역사상 대규모 시위로 기록됐다. 수험료와 교통요금 인상 반대에서 비롯된 '펭귄 혁명'은 국가 교육의 개선을 요구하는 시위로 확대됐다. 3주째 이어지는 이번 사태를 시민들은 '펭귄 혁명'에 연장선이라고 보고 있다.

냄비 두드리며 대통령 하야 촉구

시위대는 피녜라 대통령의 하야까지 촉구하며 물러서지 않고 있다. "단결된 국민은 반드시 이긴다"라는 노래를 부르며 시위는 멈추지 않고 있다. 밤이 되면 시민들은 창문을 열고 너나 할 것 없이 냄비를 두드리며 정부에 항의하고 있다.

피녜라 대통령은 이달 중순 예정됐던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APEC 정상회의와 12월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 등 2가지 굵직한 국제행사를 포기했다. 고통스러운 고민 끝에 국가 질서 안정이 우선이라는 판단에서 이같은 결정을 내렸다고 밝혔다. 대외적 이미지 타격에도 이 같은 결정을 내린 배경에는 스스로 물러나기보다는 야당과의 대화 등 사태 해결책 마련을 위해 시위대와의 장기전에 돌입한 양상이다.

지금까지 20여 명이 숨졌다. 하지만,시간이 갈수록 경찰의 진압은 거칠어지고 시위대의 반정부 항의 목소리는 더욱 커져 인명 피해는 더 늘 것으로 우려된다. 허술한 치안을 틈탄 약탈과 방화도 잇따르고 상점들은 이른 낮에 철시하는 등 경제적 손실이 늘어나고 있다. 지금까지 2조 원에 가까운 손실이 예상되지만 얼마나 더 큰 피해가 날지는 미지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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