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장벽 붕괴 30년] ‘교류’로 통일 기반

입력 2019.11.09 (08:02) 수정 2019.11.09 (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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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통일된 독일에서 찾는 한반도 평화의 길.

물론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국과의 이해관계를 풀어나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눈앞에 놓인 과제는 바로 남북관계 개선일 겁니다.

그러기 위해선 아주 작은 실마리부터 풀어나가는 게 중요할 텐데요.

독일 역시 베를린 장벽 붕괴 20년 전부터 통일이라는 거창한 목표보다는 ‘협력 관계’를 발전시키는 데 집중했습니다.

결국, 장기간의 교류가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통일의 밑거름이 되었다는 평가가 큰데요.

‘접근을 통한 변화’로 대표되는 독일식 교류 협력들을 살펴봤습니다.

[리포트]

1945년, 2차 세계대전의 종전으로 동독과 서독으로 분단된 독일.

1950년대 중반 이후 서독은 ‘라인강의 기적'이라 불릴 만큼 경제 부흥기를 맞았지만, 동독은 이렇다 할 경제적 변화를 이뤄내지 못했습니다.

경제적 격차는 체제의 비교로, 체제에 대한 불만은 이탈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1961년, 마침내 동독 정부는 소련군의 지원을 받아 주민 도피를 막기 위한 장벽을 세우기 시작합니다.

베를린 장벽입니다.

갑작스럽게 세워진 장벽과 삼엄한 경비.

수많은 사람들이 졸지에 이산가족 신세가 됐습니다.

그러나 철조망도, 콘크리트 벽도 동-서독 주민들 간의 교류를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총을 든 군인들의 감시와 동원된 탱크부대에도 동독 주민들은 끊임없이 탈출을 감행했습니다.

그리고 이 시기, 새로운 방식으로 베를린 장벽 문제에 접근한 인물이 있습니다.

당시 서베를린 시장이었던 빌리 브란트입니다. 인도적 사안과 이념 문제를 온전히 분리하려 했던 빌리 브란트.

그가 내놓은 방식은 ‘접근을 통한 변화’입니다.

먼저 대화와 협력을 통해 상대방을 변화시키고, 상대가 변화하면 좀 더 다가갈 수 있다는 정책.

빌리 브란트는 동베를린시 당국자를 만나 수차례 대화를 한 끝에 ‘베를린 통행증 협정’을 체결합니다.

[빌리 브란트/당시 서베를린 시장 : "이제 우리는 동서 양쪽 10만 베를린 시민이 크리스마스 명절을 더 따뜻하게 보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1963년 체결된 동-서독의 통행증 협약은 이산가족 만남의 초석이 됐습니다.

120만 명의 서베를린 시민들이 헤어졌던 동베를린 가족을 만나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내게 된 겁니다.

[서베를린 이산가족 : "동독의 시누이를 방문하러 갑니다."]

[서베를린 이산가족 : "2년 반 동안 못 만난 어머니를 만나러 갑니다."]

이듬해 동독 정부는 은퇴 고령자에 한해 서독의 친인척 방문도 허가했습니다.

["(누굴 만날 겁니까?) 사촌요. (서독에는 몇 번째입니까?) 글쎄요. 항상 하루 일정이니까요."]

1969년 서독 총리에 오른 빌리 브란트는 동독과의 관계를 보다 유화적으로 이끌어 냅니다.

그리고 1970년. 특별열차를 타고 동독 땅을 밟습니다.

분단 25년 만에 처음 만난 동-서독 정상.

[빌리 브란트/당시 서독 총리 : "날씨가 참 좋습니다."]

[슈토프/당시 동독 의장 : "날씨는 정상회담과 관계가 없습니다."]

'자주 만나면 변한다', '작은 발걸음으로 동독으로 다가간다'는 자신의 동방정책을 몸소 실천하며 역사적인 정상회담을 성사시킨 겁니다.

[빌리 브란트/당시 서독 총리 : "동서독은 동등한 자격으로 통일을 시작해야 합니다."]

두 달 뒤, 서독 카셀에서 열린 2차 정상회담.

동서독은 브란트 총리가 제안한 20개 항을 바탕으로 ‘동서독 기본조약’을 체결합니다.

[김누리/중앙대 독어독문학과 교수 : "동방정책은 바로 2개의 커다란 원칙에 따라서 유지된 거예요. 첫 번째는 접근을 통한 변화. 동독에 계속 접근함으로써 변화를 만들어온다 하는 것이고요. 두 번째는 작은 발걸음 정책이라 그랬어요. 지금 우리 이산가족처럼 그런 것들을 최대한 없애는 방식으로 작은 일부터 가장 인간적인 수준에서 서로 교류한다 이런 방식을 일관되게 추진해온 거죠."]

기본 조약이라는 단단한 기반 위에 우편, 통신, 문화, 과학기술 협정도 체결되면서 사람과 물자, 정보 교류도 대폭 확대됩니다.

특히 1976년 3월 우편·통신협정이 체결된 후에는 연간 서신 2억 통, 소포 3,600만 건이 교환됐고 1,529개의 전화회선이 유지되면서 거의 제한 없는 교류가 유지될 수 있었습니다.

1984년 KBS 취재진이 촬영한 서베를린주민 율리히씨의 생활에서도 동독 가족들과의 전화 모습은 생생하게 포착됐습니다.

[KBS 뉴스 파노라마/1984년 : "안녕하세요. (네, 잘 있어요.) 늦었지만 생일 축하해요. (울리 이런 늙은이한테 무슨 생일 축하인가? ) 나이 얘기가 아니에요. (늙은이에게 나이 얘기 안 하는 거야.)"]

경제교류 역시 동서독 관계를 이어주는 중요한 연결고리의 역할을 해왔습니다.

양측 간의 경제교류 규모는 연평균 약 75억 달러에 달했고, 동독은 공식거래 수지와 서독 측의 비공식 지원을 합쳐 연평균 23억 달러의 경제적 이익을 얻을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양무진/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 "1972년 기본협정 체결 이후 동독과 서독의 인적 물적인 교류가 상당히 활발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양측 당국과 또 민간 간에 신뢰가 형성되고 이것이 자연스럽게 동독인들은 서독에 대한 의존성이랄까요? 또 신뢰성 이것이 심화 확대됨으로 해서 89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90년 통일된 데서 가지고 상당한 역할을 했다 저는 그렇게 분석을 합니다."]

교류가 확대될수록 정치, 경제적으로 자유와 번영을 향한 동독 주민들의 욕망도 커져갔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서독 TV를 통한 정보 유입이 결정적이었다는 분석이 나왔습니다.

1972년 기본조약 체결 이후 방송·언론 교류가 시작되면서 동독 정부는 주민들의 서독 TV 시청을 묵인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동독 주민들은 TV 앞으로 몰려들었고, 통일 전인 1985년에는 동독 주민 94%가 서독 TV를 매일 시청하는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에두아르드 슈타페리/옛 동독 기자 : "저 자신이 동독 언론에서 일했지만, 저녁 7시 이후에는 서독 주민이 되어 서독 방송만 시청했습니다."]

그 파장은 엄청났습니다.

외부 정보를 손쉽게 접한 동독 주민들은 점차 체제에 대한 환멸을 느꼈고, 동시에 서독과 자유세계를 동경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1989년 동독 주민들의 집단 탈출 사태가 서독 방송을 통해 집중 보도됐고, 이는 베를린 장벽 붕괴의 결정적 계기가 됐습니다.

[프리드리히 쇼를레머/옛 동독 역사학자 : "서독 TV가 없었더라면 동독 주민들의 용기 있는 저항 운동도 성공을 거두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산가족 통행증 협약으로 시작된 만남은 다방면의 교류로 이어졌고, 결국 바깥세상으로의 창을 열어둠으로써 동독 사회 스스로가 변화하게 된 것입니다.

[김누리/중앙대 독어독문학과 교수 : "그게 동서독 간에 서로를 이해하고 화해하고 접근하는 데 큰 역할을 한 거죠. 우리도 그걸 배워야죠. 우리처럼 게다가 지금 이런 소위 이데올로기적인 대립이 너무나 심각하고 심지어 내전까지 겪어서 양쪽 진영에 증오라는 그런 감정이 남아있는 그런 상황이죠. 그렇기 때문에 민간교류는 굉장히 중요하고요."]

그러나 우리의 상황은 독일과는 상반됩니다.

2000년 정상회담으로 물꼬를 튼 교류는 정부의 정책 방향에 따라 부침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다시 한번 남과 북이 손을 맞잡았지만 1년 만에 답보 상태에 빠진 상황.

가장 시급 한 일이자 교류의 첫걸음이라 할 수 있는 이산가족 상봉 문제도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습니다.

남북은 지난해 9월 평양 정상회담에서 상설면회소 개소와 화상상봉, 영상편지 교환 등에 합의했지만 사실상 진전이 없는 상태입니다.

이런 가운데 북녘의 가족을 찾고 싶다고 신청한 이산가족 10명 가운데 6명은 이미 세상을 떠난 상황.

어쩌면 가장 가까이에 있는 통일의 첫걸음이자, 먼저 풀어야 할 실마리를 놓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윱니다.

[양무진/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 "북한은 이산가족 문제에 대해서 정치적인 접근을 해서는 안 됩니다. 또 우리 정부 또한 이산가족 문제는 유엔 안보리의 대북제재 대상도 아니고 또 인간의 보편적인 가치 속에 되기 때문에 북측에 대해서 조금 지원을 하더라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가장 시급한 현안으로서 취급해야 된다. 어쩌면 우리 민족의 동질성 회복 하나됨 이에 대해서 시작은 이산가족 상봉부터 될 수 있기 때문에 남북한 모두 빨리 당국 간 회담 적십자회담을 열어서 이산가족 문제 해결에 지혜를 짜야 된다. 그런 생각이 듭니다."]

브란덴부르크 문에 사랑과 평화의 메시지가 적힌 리본 3만 개가 바람에 흩날립니다.

그 안엔 한반도 평화를 위한 바람도 담겨 있습니다.

30년 전 온몸으로 장벽 붕괴의 기쁨을 만끽했던 독일인들은 작은 첫걸음, 오랜 시간 쌓은 신뢰가 한반도의 장벽을 허물 수 있을 거라고 이야기합니다.

[페터 코이프/독일 주민 : "양국의 교류가 중요합니다. 서로 왕래를 해야 해요. 평창 올림픽 때 모두 뭔가 일어날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DMZ에서 국경을 넘는 남북 정상을 보면서 이를 계기로 양국관계에 진전이 생길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사람들은 그런 장면들을 보고 희망을 갖게 되는 거죠."]

[한스 모드로/전 동독 총리 : "우리는 서로를 신뢰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고 협력하여 서로 적대시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더 많은 자유가 주어질 수 있습니다. 이런 사고가 독일이 분단되었던 1950년대부터 팽배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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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베를린 장벽 붕괴 30년] ‘교류’로 통일 기반
    • 입력 2019-11-09 08:14:19
    • 수정2019-11-09 08:17:43
    남북의 창
[앵커]

통일된 독일에서 찾는 한반도 평화의 길.

물론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국과의 이해관계를 풀어나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눈앞에 놓인 과제는 바로 남북관계 개선일 겁니다.

그러기 위해선 아주 작은 실마리부터 풀어나가는 게 중요할 텐데요.

독일 역시 베를린 장벽 붕괴 20년 전부터 통일이라는 거창한 목표보다는 ‘협력 관계’를 발전시키는 데 집중했습니다.

결국, 장기간의 교류가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통일의 밑거름이 되었다는 평가가 큰데요.

‘접근을 통한 변화’로 대표되는 독일식 교류 협력들을 살펴봤습니다.

[리포트]

1945년, 2차 세계대전의 종전으로 동독과 서독으로 분단된 독일.

1950년대 중반 이후 서독은 ‘라인강의 기적'이라 불릴 만큼 경제 부흥기를 맞았지만, 동독은 이렇다 할 경제적 변화를 이뤄내지 못했습니다.

경제적 격차는 체제의 비교로, 체제에 대한 불만은 이탈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1961년, 마침내 동독 정부는 소련군의 지원을 받아 주민 도피를 막기 위한 장벽을 세우기 시작합니다.

베를린 장벽입니다.

갑작스럽게 세워진 장벽과 삼엄한 경비.

수많은 사람들이 졸지에 이산가족 신세가 됐습니다.

그러나 철조망도, 콘크리트 벽도 동-서독 주민들 간의 교류를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총을 든 군인들의 감시와 동원된 탱크부대에도 동독 주민들은 끊임없이 탈출을 감행했습니다.

그리고 이 시기, 새로운 방식으로 베를린 장벽 문제에 접근한 인물이 있습니다.

당시 서베를린 시장이었던 빌리 브란트입니다. 인도적 사안과 이념 문제를 온전히 분리하려 했던 빌리 브란트.

그가 내놓은 방식은 ‘접근을 통한 변화’입니다.

먼저 대화와 협력을 통해 상대방을 변화시키고, 상대가 변화하면 좀 더 다가갈 수 있다는 정책.

빌리 브란트는 동베를린시 당국자를 만나 수차례 대화를 한 끝에 ‘베를린 통행증 협정’을 체결합니다.

[빌리 브란트/당시 서베를린 시장 : "이제 우리는 동서 양쪽 10만 베를린 시민이 크리스마스 명절을 더 따뜻하게 보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1963년 체결된 동-서독의 통행증 협약은 이산가족 만남의 초석이 됐습니다.

120만 명의 서베를린 시민들이 헤어졌던 동베를린 가족을 만나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내게 된 겁니다.

[서베를린 이산가족 : "동독의 시누이를 방문하러 갑니다."]

[서베를린 이산가족 : "2년 반 동안 못 만난 어머니를 만나러 갑니다."]

이듬해 동독 정부는 은퇴 고령자에 한해 서독의 친인척 방문도 허가했습니다.

["(누굴 만날 겁니까?) 사촌요. (서독에는 몇 번째입니까?) 글쎄요. 항상 하루 일정이니까요."]

1969년 서독 총리에 오른 빌리 브란트는 동독과의 관계를 보다 유화적으로 이끌어 냅니다.

그리고 1970년. 특별열차를 타고 동독 땅을 밟습니다.

분단 25년 만에 처음 만난 동-서독 정상.

[빌리 브란트/당시 서독 총리 : "날씨가 참 좋습니다."]

[슈토프/당시 동독 의장 : "날씨는 정상회담과 관계가 없습니다."]

'자주 만나면 변한다', '작은 발걸음으로 동독으로 다가간다'는 자신의 동방정책을 몸소 실천하며 역사적인 정상회담을 성사시킨 겁니다.

[빌리 브란트/당시 서독 총리 : "동서독은 동등한 자격으로 통일을 시작해야 합니다."]

두 달 뒤, 서독 카셀에서 열린 2차 정상회담.

동서독은 브란트 총리가 제안한 20개 항을 바탕으로 ‘동서독 기본조약’을 체결합니다.

[김누리/중앙대 독어독문학과 교수 : "동방정책은 바로 2개의 커다란 원칙에 따라서 유지된 거예요. 첫 번째는 접근을 통한 변화. 동독에 계속 접근함으로써 변화를 만들어온다 하는 것이고요. 두 번째는 작은 발걸음 정책이라 그랬어요. 지금 우리 이산가족처럼 그런 것들을 최대한 없애는 방식으로 작은 일부터 가장 인간적인 수준에서 서로 교류한다 이런 방식을 일관되게 추진해온 거죠."]

기본 조약이라는 단단한 기반 위에 우편, 통신, 문화, 과학기술 협정도 체결되면서 사람과 물자, 정보 교류도 대폭 확대됩니다.

특히 1976년 3월 우편·통신협정이 체결된 후에는 연간 서신 2억 통, 소포 3,600만 건이 교환됐고 1,529개의 전화회선이 유지되면서 거의 제한 없는 교류가 유지될 수 있었습니다.

1984년 KBS 취재진이 촬영한 서베를린주민 율리히씨의 생활에서도 동독 가족들과의 전화 모습은 생생하게 포착됐습니다.

[KBS 뉴스 파노라마/1984년 : "안녕하세요. (네, 잘 있어요.) 늦었지만 생일 축하해요. (울리 이런 늙은이한테 무슨 생일 축하인가? ) 나이 얘기가 아니에요. (늙은이에게 나이 얘기 안 하는 거야.)"]

경제교류 역시 동서독 관계를 이어주는 중요한 연결고리의 역할을 해왔습니다.

양측 간의 경제교류 규모는 연평균 약 75억 달러에 달했고, 동독은 공식거래 수지와 서독 측의 비공식 지원을 합쳐 연평균 23억 달러의 경제적 이익을 얻을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양무진/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 "1972년 기본협정 체결 이후 동독과 서독의 인적 물적인 교류가 상당히 활발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양측 당국과 또 민간 간에 신뢰가 형성되고 이것이 자연스럽게 동독인들은 서독에 대한 의존성이랄까요? 또 신뢰성 이것이 심화 확대됨으로 해서 89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90년 통일된 데서 가지고 상당한 역할을 했다 저는 그렇게 분석을 합니다."]

교류가 확대될수록 정치, 경제적으로 자유와 번영을 향한 동독 주민들의 욕망도 커져갔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서독 TV를 통한 정보 유입이 결정적이었다는 분석이 나왔습니다.

1972년 기본조약 체결 이후 방송·언론 교류가 시작되면서 동독 정부는 주민들의 서독 TV 시청을 묵인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동독 주민들은 TV 앞으로 몰려들었고, 통일 전인 1985년에는 동독 주민 94%가 서독 TV를 매일 시청하는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에두아르드 슈타페리/옛 동독 기자 : "저 자신이 동독 언론에서 일했지만, 저녁 7시 이후에는 서독 주민이 되어 서독 방송만 시청했습니다."]

그 파장은 엄청났습니다.

외부 정보를 손쉽게 접한 동독 주민들은 점차 체제에 대한 환멸을 느꼈고, 동시에 서독과 자유세계를 동경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1989년 동독 주민들의 집단 탈출 사태가 서독 방송을 통해 집중 보도됐고, 이는 베를린 장벽 붕괴의 결정적 계기가 됐습니다.

[프리드리히 쇼를레머/옛 동독 역사학자 : "서독 TV가 없었더라면 동독 주민들의 용기 있는 저항 운동도 성공을 거두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산가족 통행증 협약으로 시작된 만남은 다방면의 교류로 이어졌고, 결국 바깥세상으로의 창을 열어둠으로써 동독 사회 스스로가 변화하게 된 것입니다.

[김누리/중앙대 독어독문학과 교수 : "그게 동서독 간에 서로를 이해하고 화해하고 접근하는 데 큰 역할을 한 거죠. 우리도 그걸 배워야죠. 우리처럼 게다가 지금 이런 소위 이데올로기적인 대립이 너무나 심각하고 심지어 내전까지 겪어서 양쪽 진영에 증오라는 그런 감정이 남아있는 그런 상황이죠. 그렇기 때문에 민간교류는 굉장히 중요하고요."]

그러나 우리의 상황은 독일과는 상반됩니다.

2000년 정상회담으로 물꼬를 튼 교류는 정부의 정책 방향에 따라 부침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다시 한번 남과 북이 손을 맞잡았지만 1년 만에 답보 상태에 빠진 상황.

가장 시급 한 일이자 교류의 첫걸음이라 할 수 있는 이산가족 상봉 문제도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습니다.

남북은 지난해 9월 평양 정상회담에서 상설면회소 개소와 화상상봉, 영상편지 교환 등에 합의했지만 사실상 진전이 없는 상태입니다.

이런 가운데 북녘의 가족을 찾고 싶다고 신청한 이산가족 10명 가운데 6명은 이미 세상을 떠난 상황.

어쩌면 가장 가까이에 있는 통일의 첫걸음이자, 먼저 풀어야 할 실마리를 놓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윱니다.

[양무진/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 "북한은 이산가족 문제에 대해서 정치적인 접근을 해서는 안 됩니다. 또 우리 정부 또한 이산가족 문제는 유엔 안보리의 대북제재 대상도 아니고 또 인간의 보편적인 가치 속에 되기 때문에 북측에 대해서 조금 지원을 하더라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가장 시급한 현안으로서 취급해야 된다. 어쩌면 우리 민족의 동질성 회복 하나됨 이에 대해서 시작은 이산가족 상봉부터 될 수 있기 때문에 남북한 모두 빨리 당국 간 회담 적십자회담을 열어서 이산가족 문제 해결에 지혜를 짜야 된다. 그런 생각이 듭니다."]

브란덴부르크 문에 사랑과 평화의 메시지가 적힌 리본 3만 개가 바람에 흩날립니다.

그 안엔 한반도 평화를 위한 바람도 담겨 있습니다.

30년 전 온몸으로 장벽 붕괴의 기쁨을 만끽했던 독일인들은 작은 첫걸음, 오랜 시간 쌓은 신뢰가 한반도의 장벽을 허물 수 있을 거라고 이야기합니다.

[페터 코이프/독일 주민 : "양국의 교류가 중요합니다. 서로 왕래를 해야 해요. 평창 올림픽 때 모두 뭔가 일어날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DMZ에서 국경을 넘는 남북 정상을 보면서 이를 계기로 양국관계에 진전이 생길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사람들은 그런 장면들을 보고 희망을 갖게 되는 거죠."]

[한스 모드로/전 동독 총리 : "우리는 서로를 신뢰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고 협력하여 서로 적대시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더 많은 자유가 주어질 수 있습니다. 이런 사고가 독일이 분단되었던 1950년대부터 팽배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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