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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장벽 붕괴 30년…“누구도 예상 못했다”
입력 2019.11.09 (22:00) 수정 2019.11.09 (22:25) 특파원 보고 세계는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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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30년 전 오늘은 독일 수도 베를린을 동서로 양분했던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날입니다.

베를린 시민들은 그동안 자유를 억압했던 장벽에 올라 환호했고, 그 여세를 몰아 독일은 이듬해 마침내 통일까지 달성했는데요.

당시 그 어떤 사람들보다 상징적인 위치에서 베를린장벽 붕괴를 경험했고, 그래서 장벽에 대해 남다른 추억을 갖고 있는 인물들을 베를린 유광석 특파원이 만났습니다.

[리포트]

베를린장벽 붕괴 30주년 행사 준비로 분주한 브란덴부르크문.

30년 전 오늘 카렝케 씨는 이 곳 경비대에서 근무했습니다.

원래 튀링엔주의 장교학교 2학년 학생이었지만, 동독의 민주화 시위가 거세지면서 10월 말 베를린으로 차출됐습니다.

11월 9일 저녁에 있었던 동독 정부의 TV 기자회견.

[귄터 샤보브스키/당시 공산당 정치국 대변인 : "(여행자유화 조치는) 내가 알기로 지금 당장, 지체없이 시행됩니다."]

공산당 정치국 대변인 샤보브스키가 여행자유화 조치의 내용을 숙지하지 못하고 얼떨결에 '지금 당장' 서독 방문이 가능하다고 말하자마자 시민들이 장벽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카렝케 씨와 동급생들은 잠을 자다말고 비상 출동했습니다.

[마이크 카렝케/당시 장벽 경비대원 : "밤에 갑자기 경보가 내려졌고 트럭에 탑승해야 했습니다. 총은 두고 갔습니다."]

전혀 상상 못한 풍경이 눈 앞에 펼쳐졌습니다.

수많은 시민들이 장벽 위로 올라가 환호했고, 일부는 망치로 장벽을 부수기도 했습니다.

[마이크 카렝케/당시 장벽 경비대원 : "브란덴부르크문은 봉쇄된 공간이었습니다. 이것이 언젠가 변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동독이 영원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질서를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상부의 구체적인 지시는 없었습니다.

[마이크 카렝케/당시 장벽 경비대원 : "저희는 처음에 이 상황에 대처해야 할 지 몰랐습니다. 왜냐하면 저희는 명령을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도 그럴듯이 당시 동독 지도부에게도 장벽 붕괴는 전혀 예상 못한 사건이었습니다.

마지막 공산당 총리로 임명된 한스 모드로 전 총리도 귀가하는 길에서야 장벽 개방 소식을 들었습니다.

[한스 모드로/동독 공산당 마지막 총리 :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한 청년이 오더니 저에게 물었습니다. "국경이 열렸습니다. 소식 들었습니까?" 그래서 저는 "왜 그런 생각을 하죠?"라고 답했습니다."]

동독 총리에게도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서독에 살던 가족 생각이었습니다.

[한스 모드로/동독 공산당 마지막 총리 : "저는 부모님과 형제, 자매들이 함부르크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어머니와 형제를 안 본 지 20년이 지났었습니다."]

기쁨과 당혹감이 교차한 순간, 총리로서 새로운 책임감이 엄습했습니다.

국경을 열어 더 큰 혼란을 막자는 생각에 12월 22일 헬무트 콜 서독 총리를 브란덴부르크문에서 맞았고, 콜 총리와 5차례 만나 통일방안을 협의했습니다.

[한스 모드로/동독 공산당 마지막 총리 : "저는 계획경제에서 (사회적인 시장경제로) 점진적인 전환을 원했습니다. 콜 총리는 빠른 속도를 원했습니다."]

옛 동베를린의 한 기념관.

통일 전까지 이 곳은 동독 비밀경찰 슈타지가 운영하던 정치범 수감소 중에서도 본부 건물이었습니다.

[페터 코이프/기념관 안내인 : "동독 지역에 모두 16개의 슈타지 감옥이 있었는데, 아시다시피 정치범 수감소였습니다."]

가이드로서 당시 상황을 증언하는 코이프 씨도 수감자였습니다.

코이프 씨 가족은 코이프 씨가 태어나기 2년 전인 1956년 사회주의자였던 아버지의 결정에 따라 동독지역인 드레스덴 인근으로 이주했습니다.

하지만 자유가 억압된 생활이 계속된 탓에 19년 만에 다시 서독으로 이주허가신청을 냈는데, 이게 비극의 시작이었습니다.

[페터 코이프/기념관 안내인 : "저는 학교에서 퇴학을 당했고 대학교를 갈 수 없었고, 하고 싶은 일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유를 갈망했던 청년은 급기야 22살 때이던 1981년 동독 탈출을 감행하다 기차역에서 붙잡혔습니다.

[페터 코이프/기념관 안내인 : "거의 40시간 동안 계속 취조를 받아 탈출을 시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수감생활은 감시와 억압의 연속이었습니다.

전기와 수도물 공급, 심지어 변기 물까지 감방 바깥에서 교도관이 통제했습니다.

밤에는 불빛을 깜빡이게 해놔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습니다.

[페터 코이프/기념관 안내인 : "어떤 정보도 얻지 못하고, 질문을 하면 안되고, 가족과 연락할 수 없는 것이 가장 힘들었습니다."]

모두 20만 명의 정치범이 이같이 슈타지 감옥에서 고통을 겪었습니다.

코이프 씨가 끔찍했던 수감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건 '돈으로 자유를 산다'는 의미의 '프라이카우프' 제도 덕분이었습니다.

서독은 1963년부터 89년까지 정치범 3만 4천여 명을 동독의 감옥에서 빼내왔습니다.

아홉 달만에 풀려난 코이프 씨는 곧장 조부모가 계신 에센에 정착해 스포츠댄스 학원을 차렸습니다.

그러던 중 1989년 들려온 장벽 붕괴 소식은 기쁨이 아닌 크나큰 두려움이었습니다.

출감하던 날 "우리는 당신을 어디든 추적할 수 있다"고 말하던 교도관들이 떠올랐습니다.

[페터 코이프/기념관 안내인 : "굉장히 두려웠습니다. 동독은 제게 국경 뒤에 있는, 철의 커튼 뒤에 있는 것이었는데 '이 사람들이 다시 나에게 접근할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1961년 동서 베를린 사이에 들어선 43km의 콘크리트 장벽, 서베를린은 총 156km의 담벼락으로 섬처럼 둘러 쌓였습니다.

5천여 명이 자유를 찾아 장벽을 넘었고, 최소 140여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30년 전 베를린장벽 초소 중 처음으로 뚫린 곳입니다.

장벽 붕괴는 뜻밖의 사건이었지만 그 이전에도 꾸준히 명맥을 이어온 동서독 간 교류가 바탕이 됐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페터 코이프/기념관 안내인 : "독일 사람들은 서로 편지를 주고 받을 수 있었습니다. 60년대 중반 이후에는 방문도 할 수 있었습니다."]

[한스 모드로/동독 공산당 마지막 총리 : "통일이 되려면 서로간에 신뢰가 생겨야 하고, 문제가 있는 부분에서는 화해가 있어야 하고, 대립상태가 몇 세대를 거쳐 계속 유지되어선 안됩니다."]

70년 이상 진행형인 한반도의 분단 상황.

교류를 이어가고 차이를 해소하는 노력이 쌓일 때 장벽 대신 통로가 생길 것입니다.

베를린에서 유광석입니다.
  • 베를린 장벽 붕괴 30년…“누구도 예상 못했다”
    • 입력 2019-11-09 22:08:17
    • 수정2019-11-09 22:25:43
    특파원 보고 세계는 지금
[앵커]

30년 전 오늘은 독일 수도 베를린을 동서로 양분했던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날입니다.

베를린 시민들은 그동안 자유를 억압했던 장벽에 올라 환호했고, 그 여세를 몰아 독일은 이듬해 마침내 통일까지 달성했는데요.

당시 그 어떤 사람들보다 상징적인 위치에서 베를린장벽 붕괴를 경험했고, 그래서 장벽에 대해 남다른 추억을 갖고 있는 인물들을 베를린 유광석 특파원이 만났습니다.

[리포트]

베를린장벽 붕괴 30주년 행사 준비로 분주한 브란덴부르크문.

30년 전 오늘 카렝케 씨는 이 곳 경비대에서 근무했습니다.

원래 튀링엔주의 장교학교 2학년 학생이었지만, 동독의 민주화 시위가 거세지면서 10월 말 베를린으로 차출됐습니다.

11월 9일 저녁에 있었던 동독 정부의 TV 기자회견.

[귄터 샤보브스키/당시 공산당 정치국 대변인 : "(여행자유화 조치는) 내가 알기로 지금 당장, 지체없이 시행됩니다."]

공산당 정치국 대변인 샤보브스키가 여행자유화 조치의 내용을 숙지하지 못하고 얼떨결에 '지금 당장' 서독 방문이 가능하다고 말하자마자 시민들이 장벽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카렝케 씨와 동급생들은 잠을 자다말고 비상 출동했습니다.

[마이크 카렝케/당시 장벽 경비대원 : "밤에 갑자기 경보가 내려졌고 트럭에 탑승해야 했습니다. 총은 두고 갔습니다."]

전혀 상상 못한 풍경이 눈 앞에 펼쳐졌습니다.

수많은 시민들이 장벽 위로 올라가 환호했고, 일부는 망치로 장벽을 부수기도 했습니다.

[마이크 카렝케/당시 장벽 경비대원 : "브란덴부르크문은 봉쇄된 공간이었습니다. 이것이 언젠가 변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동독이 영원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질서를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상부의 구체적인 지시는 없었습니다.

[마이크 카렝케/당시 장벽 경비대원 : "저희는 처음에 이 상황에 대처해야 할 지 몰랐습니다. 왜냐하면 저희는 명령을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도 그럴듯이 당시 동독 지도부에게도 장벽 붕괴는 전혀 예상 못한 사건이었습니다.

마지막 공산당 총리로 임명된 한스 모드로 전 총리도 귀가하는 길에서야 장벽 개방 소식을 들었습니다.

[한스 모드로/동독 공산당 마지막 총리 :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한 청년이 오더니 저에게 물었습니다. "국경이 열렸습니다. 소식 들었습니까?" 그래서 저는 "왜 그런 생각을 하죠?"라고 답했습니다."]

동독 총리에게도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서독에 살던 가족 생각이었습니다.

[한스 모드로/동독 공산당 마지막 총리 : "저는 부모님과 형제, 자매들이 함부르크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어머니와 형제를 안 본 지 20년이 지났었습니다."]

기쁨과 당혹감이 교차한 순간, 총리로서 새로운 책임감이 엄습했습니다.

국경을 열어 더 큰 혼란을 막자는 생각에 12월 22일 헬무트 콜 서독 총리를 브란덴부르크문에서 맞았고, 콜 총리와 5차례 만나 통일방안을 협의했습니다.

[한스 모드로/동독 공산당 마지막 총리 : "저는 계획경제에서 (사회적인 시장경제로) 점진적인 전환을 원했습니다. 콜 총리는 빠른 속도를 원했습니다."]

옛 동베를린의 한 기념관.

통일 전까지 이 곳은 동독 비밀경찰 슈타지가 운영하던 정치범 수감소 중에서도 본부 건물이었습니다.

[페터 코이프/기념관 안내인 : "동독 지역에 모두 16개의 슈타지 감옥이 있었는데, 아시다시피 정치범 수감소였습니다."]

가이드로서 당시 상황을 증언하는 코이프 씨도 수감자였습니다.

코이프 씨 가족은 코이프 씨가 태어나기 2년 전인 1956년 사회주의자였던 아버지의 결정에 따라 동독지역인 드레스덴 인근으로 이주했습니다.

하지만 자유가 억압된 생활이 계속된 탓에 19년 만에 다시 서독으로 이주허가신청을 냈는데, 이게 비극의 시작이었습니다.

[페터 코이프/기념관 안내인 : "저는 학교에서 퇴학을 당했고 대학교를 갈 수 없었고, 하고 싶은 일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유를 갈망했던 청년은 급기야 22살 때이던 1981년 동독 탈출을 감행하다 기차역에서 붙잡혔습니다.

[페터 코이프/기념관 안내인 : "거의 40시간 동안 계속 취조를 받아 탈출을 시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수감생활은 감시와 억압의 연속이었습니다.

전기와 수도물 공급, 심지어 변기 물까지 감방 바깥에서 교도관이 통제했습니다.

밤에는 불빛을 깜빡이게 해놔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습니다.

[페터 코이프/기념관 안내인 : "어떤 정보도 얻지 못하고, 질문을 하면 안되고, 가족과 연락할 수 없는 것이 가장 힘들었습니다."]

모두 20만 명의 정치범이 이같이 슈타지 감옥에서 고통을 겪었습니다.

코이프 씨가 끔찍했던 수감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건 '돈으로 자유를 산다'는 의미의 '프라이카우프' 제도 덕분이었습니다.

서독은 1963년부터 89년까지 정치범 3만 4천여 명을 동독의 감옥에서 빼내왔습니다.

아홉 달만에 풀려난 코이프 씨는 곧장 조부모가 계신 에센에 정착해 스포츠댄스 학원을 차렸습니다.

그러던 중 1989년 들려온 장벽 붕괴 소식은 기쁨이 아닌 크나큰 두려움이었습니다.

출감하던 날 "우리는 당신을 어디든 추적할 수 있다"고 말하던 교도관들이 떠올랐습니다.

[페터 코이프/기념관 안내인 : "굉장히 두려웠습니다. 동독은 제게 국경 뒤에 있는, 철의 커튼 뒤에 있는 것이었는데 '이 사람들이 다시 나에게 접근할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1961년 동서 베를린 사이에 들어선 43km의 콘크리트 장벽, 서베를린은 총 156km의 담벼락으로 섬처럼 둘러 쌓였습니다.

5천여 명이 자유를 찾아 장벽을 넘었고, 최소 140여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30년 전 베를린장벽 초소 중 처음으로 뚫린 곳입니다.

장벽 붕괴는 뜻밖의 사건이었지만 그 이전에도 꾸준히 명맥을 이어온 동서독 간 교류가 바탕이 됐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페터 코이프/기념관 안내인 : "독일 사람들은 서로 편지를 주고 받을 수 있었습니다. 60년대 중반 이후에는 방문도 할 수 있었습니다."]

[한스 모드로/동독 공산당 마지막 총리 : "통일이 되려면 서로간에 신뢰가 생겨야 하고, 문제가 있는 부분에서는 화해가 있어야 하고, 대립상태가 몇 세대를 거쳐 계속 유지되어선 안됩니다."]

70년 이상 진행형인 한반도의 분단 상황.

교류를 이어가고 차이를 해소하는 노력이 쌓일 때 장벽 대신 통로가 생길 것입니다.

베를린에서 유광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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