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좀 먹고 오면 안될까요”…어떤 ‘사장님’의 호소

입력 2019.11.27 (08:00)

읽어주기 기능은 크롬기반의
브라우저에서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지난달 24일, 어둠이 내려앉은 경남 진주의 한 도로에서 배달원 A군(19세)이 숨졌습니다. 배달을 마치고 돌아오다 가로등과 충돌한 겁니다. A군은 입대를 앞두고 휴학한 대학생이었습니다. 9월 6일 처음 일을 시작했고, 출근 49일 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50일 가까운 기간 동안 A군이 쉰 날은, 단 하루였습니다.


A군이 배달대행업체 측과 주고받은 카카오톡 메시지들입니다.

A군의 배달원 생활에는 별 여유가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배차 그만 해달라", "직권(강제배차를 일컫는 말) 한 개만 빼달라"며 끊임없이 과로를 호소합니다. 그리고 "급해서 사고가 날 것 같다"던 A군의 우려는 야속하게도 어느 날 현실이 돼 버렸습니다.


A군과 동료들은 밥을 먹는 것은 물론, 화장실에 다녀오는 것까지 업체 측에 허락을 받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출퇴근과 휴무 등 근태 관리도 직접적으로 받았습니다. 대화 내용으로 보면, 모든 것을 사장님에게 허락받고 움직이는 아르바이트생의 모습과 다르지 않습니다.

'알바생'처럼 일해야 하는 수많은 '사장님'들

하지만 A군의 법적 지위는 알바생이나 노동자가 아니었습니다. 흔히들 '사장님'으로 불리는 '개인사업자' 신분이었기 때문입니다. 배달대행업체는 배달원들과 '근로계약'이 아니라 '업무 위탁계약'을 맺었습니다. '사장님'대 '사장님'의 관계입니다. 그렇다면 배달 대행업체는 배달원들에게 구체적인 업무지시를 해서는 안 됩니다. 업무 위탁 계약이란 각자의 독립적인 업무를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계약은 '업무 위탁' 형태로 해 놓고 실제 업무는 '근로계약' 형태로 진행하는 '변칙'들이 횡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변칙적 업무형태의 피해는 대개 노동자들에게 돌아갑니다. 당장 일을 하다 사망한 A군 역시 산업재해보험 적용 과정에서 손해를 볼 가능성이 높습니다. 현행법상 '근로자'가 산재 승인을 받으면 실제 월수입의 평균 70%를 보장받지만, '개인사업자'로 산재 승인을 받으면 최저임금 수준의 보장만 받을 수 있습니다. 산재보험에도 일종의 등급이 있는 셈입니다.

"업무 지시를 하고 싶다면, '근로자'로 고용하라"

물론 업체 입장에서는 배달원들을 직접 관리하고 싶은 유혹에 노출되기 쉽습니다. 출퇴근이나 휴무 여부를 관리, 통제하고 업무 지시를 내릴 수 있어야 배달 업무의 '안정적인 수행'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배달원 노동조합인 '라이더유니온'이 내놓는 해답은 간결합니다. 만약 구체적인 업무지시를 하고 싶다면, 배달원들과 '업무 위탁계약'이 아닌 '근로계약'을 맺고 배달원들을 '근로자'로 고용하라는 겁니다. '라이더유니온'의 박정훈 위원장은 "사고가 나면 배달원에게 '너는 개인사업자야'라고 말하면서도, 막상 일을 시킬 때는 '근로자'처럼 일을 시키고 있다", "책임은 지지 않고 일은 시키겠다는 것이 플랫폼 산업의 본질이다"라고 지적했습니다.

최근 '요기요플러스'에서 일하던 배달원 5명이 '근로자성'을 최초로 인정받은 것을 계기로, 이런 '플랫폼노동자'들의 '근로자성' 논의가 우리 사회에 본격적으로 불붙는 모양새입니다.

'법 제도 손질'과 '취약계층 보호책 마련' 병행돼야

물론, 모든 '플랫폼노동자'를 '근로자'로 인정할 수는 없을 겁니다. 오히려 '개인사업자' 자격으로 일하는 걸 선호하는 플랫폼노동자들도 많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말로는 '사장님'이라고 부르면서도 실제로는 '노동자'로 대하는 우리 사회제도의 모순이 방치돼서는 안된다는 점도 분명해 보입니다. 모순의 피해자는 결국 구조의 제일 아래에 있는 개별적인 노동자들이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이 '관'의 역할입니다. A군의 유족들과 '라이더유니온'은 "사고가 난 뒤 관련 증거 자료들을 유족과 라이더유니온이 모두 직접 수집했다"며 "정부가 일을 안 하니까 유가족들이 관련법의 전문가가 됐다"고 정부의 소극적인 태도를 탓했습니다. 이른바 '4차 산업혁명'으로 새로운 직업군들이 급증하면서, 이렇게 기존의 법 제도의 테두리로 품어줄 수 없는 이들도 늘어날 수 밖에 없습니다. 장기적 관점에서의 제도 손질과 단기적 보호책 마련이 병행돼야 할 때입니다.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밥 좀 먹고 오면 안될까요”…어떤 ‘사장님’의 호소
    • 입력 2019-11-27 08:00:23
    취재K
지난달 24일, 어둠이 내려앉은 경남 진주의 한 도로에서 배달원 A군(19세)이 숨졌습니다. 배달을 마치고 돌아오다 가로등과 충돌한 겁니다. A군은 입대를 앞두고 휴학한 대학생이었습니다. 9월 6일 처음 일을 시작했고, 출근 49일 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50일 가까운 기간 동안 A군이 쉰 날은, 단 하루였습니다.


A군이 배달대행업체 측과 주고받은 카카오톡 메시지들입니다.

A군의 배달원 생활에는 별 여유가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배차 그만 해달라", "직권(강제배차를 일컫는 말) 한 개만 빼달라"며 끊임없이 과로를 호소합니다. 그리고 "급해서 사고가 날 것 같다"던 A군의 우려는 야속하게도 어느 날 현실이 돼 버렸습니다.


A군과 동료들은 밥을 먹는 것은 물론, 화장실에 다녀오는 것까지 업체 측에 허락을 받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출퇴근과 휴무 등 근태 관리도 직접적으로 받았습니다. 대화 내용으로 보면, 모든 것을 사장님에게 허락받고 움직이는 아르바이트생의 모습과 다르지 않습니다.

'알바생'처럼 일해야 하는 수많은 '사장님'들

하지만 A군의 법적 지위는 알바생이나 노동자가 아니었습니다. 흔히들 '사장님'으로 불리는 '개인사업자' 신분이었기 때문입니다. 배달대행업체는 배달원들과 '근로계약'이 아니라 '업무 위탁계약'을 맺었습니다. '사장님'대 '사장님'의 관계입니다. 그렇다면 배달 대행업체는 배달원들에게 구체적인 업무지시를 해서는 안 됩니다. 업무 위탁 계약이란 각자의 독립적인 업무를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계약은 '업무 위탁' 형태로 해 놓고 실제 업무는 '근로계약' 형태로 진행하는 '변칙'들이 횡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변칙적 업무형태의 피해는 대개 노동자들에게 돌아갑니다. 당장 일을 하다 사망한 A군 역시 산업재해보험 적용 과정에서 손해를 볼 가능성이 높습니다. 현행법상 '근로자'가 산재 승인을 받으면 실제 월수입의 평균 70%를 보장받지만, '개인사업자'로 산재 승인을 받으면 최저임금 수준의 보장만 받을 수 있습니다. 산재보험에도 일종의 등급이 있는 셈입니다.

"업무 지시를 하고 싶다면, '근로자'로 고용하라"

물론 업체 입장에서는 배달원들을 직접 관리하고 싶은 유혹에 노출되기 쉽습니다. 출퇴근이나 휴무 여부를 관리, 통제하고 업무 지시를 내릴 수 있어야 배달 업무의 '안정적인 수행'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배달원 노동조합인 '라이더유니온'이 내놓는 해답은 간결합니다. 만약 구체적인 업무지시를 하고 싶다면, 배달원들과 '업무 위탁계약'이 아닌 '근로계약'을 맺고 배달원들을 '근로자'로 고용하라는 겁니다. '라이더유니온'의 박정훈 위원장은 "사고가 나면 배달원에게 '너는 개인사업자야'라고 말하면서도, 막상 일을 시킬 때는 '근로자'처럼 일을 시키고 있다", "책임은 지지 않고 일은 시키겠다는 것이 플랫폼 산업의 본질이다"라고 지적했습니다.

최근 '요기요플러스'에서 일하던 배달원 5명이 '근로자성'을 최초로 인정받은 것을 계기로, 이런 '플랫폼노동자'들의 '근로자성' 논의가 우리 사회에 본격적으로 불붙는 모양새입니다.

'법 제도 손질'과 '취약계층 보호책 마련' 병행돼야

물론, 모든 '플랫폼노동자'를 '근로자'로 인정할 수는 없을 겁니다. 오히려 '개인사업자' 자격으로 일하는 걸 선호하는 플랫폼노동자들도 많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말로는 '사장님'이라고 부르면서도 실제로는 '노동자'로 대하는 우리 사회제도의 모순이 방치돼서는 안된다는 점도 분명해 보입니다. 모순의 피해자는 결국 구조의 제일 아래에 있는 개별적인 노동자들이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이 '관'의 역할입니다. A군의 유족들과 '라이더유니온'은 "사고가 난 뒤 관련 증거 자료들을 유족과 라이더유니온이 모두 직접 수집했다"며 "정부가 일을 안 하니까 유가족들이 관련법의 전문가가 됐다"고 정부의 소극적인 태도를 탓했습니다. 이른바 '4차 산업혁명'으로 새로운 직업군들이 급증하면서, 이렇게 기존의 법 제도의 테두리로 품어줄 수 없는 이들도 늘어날 수 밖에 없습니다. 장기적 관점에서의 제도 손질과 단기적 보호책 마련이 병행돼야 할 때입니다.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오늘의 핫 클릭

실시간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뉴스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수신료 수신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