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움을 받으려면 치부를 다 드러내야 합니다”

입력 2019.12.04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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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등급 조사를 받을 때면, 저는 손가락도 까딱 못 하는 사람이 돼야 합니다. 기저귀를 안 하는 제가 기저귀를 해야 합니다. 기저귀를 찬 채로 치부를 다 드러내야 합니다. (..) 진짜 거짓말해야 하는 이 현실이 싫습니다. 마음 놓고 살고 싶어요."

어제(3일) 오후 3시.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 마련된 연단에서 한 장애 여성이 마이크를 들더니, 거짓을 고백합니다. 이 여성은 왜 치부를 드러내야 했을까요? 왜 본인의 모멸감을 참아가며 본인의 무능을 입증해야 했던 걸까요?

'장애등급 몇 급이세요'에서 '어떤 도움을 필요로 하시나요'로

지난 7월, 장애등급제가 폐지됐습니다. 한국에 장애인에 대한 직접적인 복지제도가 없던 1988년 처음 도입된 지 31년 만입니다. 이 제도는 장애인을 1급부터 6급까지 분류해, 장애인 복지 제도가 단계적으로 도입되고 확대되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장애인 복지에 접근하기 위한 절대적 기준으로 작동해 오히려 복지로부터 멀어지는 결과를 낳았다는 비판도 동시에 받았습니다. '장애인'으로 등록하지 않으면 '장애인'이 아니라 서비스도 받을 수 없고, 또 1~6급으로 나뉜 등급에 따라 서비스의 수준이 달라져 문턱처럼 여겨졌습니다.

이런 지적에 결국 지난 7월 장애등급제가 폐지됐습니다. 이에 따라 앞으로 장애등급은 '중증'과 '경증'으로 단순화되고, 기존에 1~3급 장애인만 받을 수 있었던 활동지원·보조기기·거주시설 혜택을 모든 장애인이 신청할 수 있게 됐습니다. 개개인의 필요에 맞는 복지 서비스를 제공해 더 넓게 보장하겠다는 겁니다.

누운 채로 자세 못 바꾸면 '12점', 옷 못 갈아입으면 '24점'

하지만 장애등급제 폐지 이후 도입된 종합조사도 여전히 기능 중심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가령 활동지원 시간을 받기 위해서 '옷 갈아입기' 문항 (최대 24점), '누운 상태에서 자세 바꾸기' 문항 (12점) 등을 통해 총점 532점을 채우는 식입니다.

반면 시각장애인들이 하기 어려운 '인쇄자료 읽기', '건물 내 보행' 등은 항목에 없습니다. 장애 단체가 '시각장애인의 활동시간을 빼앗아 뇌 병변 장애인에게 주는 식'이라고 비판하는 이유이며, 기사 앞부분의 여성이 치부를 드러내며 기저귀를 차야 하는 이유입니다.

물론 장애등급제 폐지의 긍정적인 효과도 있습니다. 실제 등급제 폐지 이후 기존 수급자 중 80%는 기존 수급 시간 대비 활동지원 시간이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문제는 하락자 비율입니다. 20%는 되려 활동지원 시간이 줄었습니다. 특히 활동지원 서비스를 반드시 필요로 하는 기존 1등급 장애인 중 하락된 비율은 21.7%로 더 높았습니다.

2014년, 한 중증장애인이 활동보조인이 없는 동안에 발생한 화재로 방문이 열려있는데도 탈출하지 못한 채 사망한 일을 떠올려보면, 활동지원 시간이 단 몇 시간이라도 줄어드는 것은 치명적입니다.

예산 탓입니다. 활동지원 예산은 지난해 6,900억 원에서 올해 1조 원으로 대폭 늘어났으나, 최저임금 영향으로 서비스 단가가 늘어나는 등 실제 장애인 활동시간을 늘리기엔 부족했습니다.


장애등급제, 폐지 말고 '진짜' 폐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는 어제(3일) 27회 세계 장애인의 날을 맞아 '장애인차별철폐 2020총선연대 출범식'을 가졌습니다.

대통령의 공약에도 불구하고 예산을 책정하지 않는 기획재정부를 비판하고 장애인 권리보장에 대한 실질적 입법, 장애등급제의 폐지와 부양의무자 기준 폐지 등을 요구했습니다. 장애등급제는 이미 폐지됐지만, 장애인 단체는 '진짜' 폐지하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 참고자료
- 장애인의 권리가 ‘폐지(廢紙)’되지 않는, 장애등급제 ‘진짜 폐지(廢止)’를 위하여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조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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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움을 받으려면 치부를 다 드러내야 합니다”
    • 입력 2019-12-04 08:10:42
    취재K
"장애등급 조사를 받을 때면, 저는 손가락도 까딱 못 하는 사람이 돼야 합니다. 기저귀를 안 하는 제가 기저귀를 해야 합니다. 기저귀를 찬 채로 치부를 다 드러내야 합니다. (..) 진짜 거짓말해야 하는 이 현실이 싫습니다. 마음 놓고 살고 싶어요."

어제(3일) 오후 3시.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 마련된 연단에서 한 장애 여성이 마이크를 들더니, 거짓을 고백합니다. 이 여성은 왜 치부를 드러내야 했을까요? 왜 본인의 모멸감을 참아가며 본인의 무능을 입증해야 했던 걸까요?

'장애등급 몇 급이세요'에서 '어떤 도움을 필요로 하시나요'로

지난 7월, 장애등급제가 폐지됐습니다. 한국에 장애인에 대한 직접적인 복지제도가 없던 1988년 처음 도입된 지 31년 만입니다. 이 제도는 장애인을 1급부터 6급까지 분류해, 장애인 복지 제도가 단계적으로 도입되고 확대되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장애인 복지에 접근하기 위한 절대적 기준으로 작동해 오히려 복지로부터 멀어지는 결과를 낳았다는 비판도 동시에 받았습니다. '장애인'으로 등록하지 않으면 '장애인'이 아니라 서비스도 받을 수 없고, 또 1~6급으로 나뉜 등급에 따라 서비스의 수준이 달라져 문턱처럼 여겨졌습니다.

이런 지적에 결국 지난 7월 장애등급제가 폐지됐습니다. 이에 따라 앞으로 장애등급은 '중증'과 '경증'으로 단순화되고, 기존에 1~3급 장애인만 받을 수 있었던 활동지원·보조기기·거주시설 혜택을 모든 장애인이 신청할 수 있게 됐습니다. 개개인의 필요에 맞는 복지 서비스를 제공해 더 넓게 보장하겠다는 겁니다.

누운 채로 자세 못 바꾸면 '12점', 옷 못 갈아입으면 '24점'

하지만 장애등급제 폐지 이후 도입된 종합조사도 여전히 기능 중심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가령 활동지원 시간을 받기 위해서 '옷 갈아입기' 문항 (최대 24점), '누운 상태에서 자세 바꾸기' 문항 (12점) 등을 통해 총점 532점을 채우는 식입니다.

반면 시각장애인들이 하기 어려운 '인쇄자료 읽기', '건물 내 보행' 등은 항목에 없습니다. 장애 단체가 '시각장애인의 활동시간을 빼앗아 뇌 병변 장애인에게 주는 식'이라고 비판하는 이유이며, 기사 앞부분의 여성이 치부를 드러내며 기저귀를 차야 하는 이유입니다.

물론 장애등급제 폐지의 긍정적인 효과도 있습니다. 실제 등급제 폐지 이후 기존 수급자 중 80%는 기존 수급 시간 대비 활동지원 시간이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문제는 하락자 비율입니다. 20%는 되려 활동지원 시간이 줄었습니다. 특히 활동지원 서비스를 반드시 필요로 하는 기존 1등급 장애인 중 하락된 비율은 21.7%로 더 높았습니다.

2014년, 한 중증장애인이 활동보조인이 없는 동안에 발생한 화재로 방문이 열려있는데도 탈출하지 못한 채 사망한 일을 떠올려보면, 활동지원 시간이 단 몇 시간이라도 줄어드는 것은 치명적입니다.

예산 탓입니다. 활동지원 예산은 지난해 6,900억 원에서 올해 1조 원으로 대폭 늘어났으나, 최저임금 영향으로 서비스 단가가 늘어나는 등 실제 장애인 활동시간을 늘리기엔 부족했습니다.


장애등급제, 폐지 말고 '진짜' 폐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는 어제(3일) 27회 세계 장애인의 날을 맞아 '장애인차별철폐 2020총선연대 출범식'을 가졌습니다.

대통령의 공약에도 불구하고 예산을 책정하지 않는 기획재정부를 비판하고 장애인 권리보장에 대한 실질적 입법, 장애등급제의 폐지와 부양의무자 기준 폐지 등을 요구했습니다. 장애등급제는 이미 폐지됐지만, 장애인 단체는 '진짜' 폐지하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 참고자료
- 장애인의 권리가 ‘폐지(廢紙)’되지 않는, 장애등급제 ‘진짜 폐지(廢止)’를 위하여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조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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