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발 10분 전 탑승 마감이라더니”…비행편 놓친 승객, 배상은?

입력 2019.12.10 (11:00) 수정 2019.12.10 (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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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출발해 이틀만 지나면 인간은―아직 생활에 굳게 뿌리를 박지 못한 청년이면 더욱 그러하거니와―일상생활, 즉 의무나 이해, 걱정,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던 일체의 것으로부터 멀어지고 만다. (…) 시간과 마찬가지로 공간도 망각하게 하는 힘을 갖고 있다. 공간은 인간을 갖가지 관계에서 해방하여 자유로운 자연 그대로의 상태로 옮겨주는 힘을 갖고 있으며, 사실 이 공간은 고루한 속인마저도 순식간에 방랑자로 만들어버린다. (토마스 만, '마의 산', 홍신문화사, p.12)

연말연시를 맞아, 일상과 관계에서의 '해방'을 꿈꾸며 해외여행을 계획하는 분들 많으시지요. 오늘은 그런 분들에게 작은 시사점을 줄 만한 최신 판결을 하나 소개하려 합니다. 해외여행의 필수 관문, 항공기 탑승과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닫혀 버린 게이트

A 씨와 B 씨는 2016년 여름, 스페인 여행을 계획하고 인천에서 터키를 경유해 스페인으로 가는 항공권을 온라인으로 구매했습니다. 출발 당일, 두 사람은 인천공항 창구에서 C 항공사 직원에게 탑승권을 수령했습니다. 인천에서 터키로 가는 탑승권(C 항공사)과 터키에서 스페인으로 가는 탑승권(D 항공사), 각자 2장씩을 나눠 가졌지요.

순조롭게 터키 공항까지 도착한 두 사람. 하지만 이 경유지에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스페인으로 가기 위한 두 번째 항공기로 환승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꿈에 부풀어 있던 여행자들은, 한순간에 공항 노숙자 신세로 전락했습니다. 어쩌다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요?


"믿던 탑승권에 발등 찍혔다"

A 씨 일행의 '주장'은 이렇습니다.

사건 당시 터키 공항에서 D 항공사가 탑승을 마감한 시간은 현지시각으로 오후 7시 5분. A 씨 일행은 그 직후인 7시 5분~10분 사이에 탑승구에 도착했다고 말합니다. 이미 게이트는 닫힌 뒤였고, 두 사람은 탑승을 거부당하고 말았습니다.

두 사람은 당시 '지각'의 원인으로 탑승권을 지목했습니다. 앞서 두 사람이 인천공항에서 받은 2장의 탑승권에는 모두 "출발시각 10분 전에 탑승이 종료됩니다"라고 써 있었습니다. 하지만 D 항공사의 실제 탑승 마감 시각은, 그보다 5분 이른 '출발 15분 전'이었습니다. 탑승권에 잘못된 정보가 기재돼 있었던 셈이지요.

A 씨 등은 탑승권에 적힌 탑승 마감 시각을 믿고 출발 10~15분 전 탑승구에 도착했지만, 결국 항공기에 타지 못했다면서 C 항공사를 상대로 1년 뒤 소송을 냈습니다.

C 항공사가 발권한 항공권 상의 문제로 비행편을 놓쳤고, 이로 인해 "생필품 구입비 등의 적극적 손해"와 "공항에 장시간 체류하는 동안의 공포심 등으로 인한 정신적 손해"를 입었다면서 한 사람당 2백여만 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했습니다.

"한 푼도 배상 못 받는다" 판결한 법원…왜?

지난해 1심을 맡은 서울중앙지법 소액 사건 재판부는 항공사의 배상 책임을 일부 인정했지만, A 씨 등은 더 많은 배상이 필요하다는 취지로 항소했습니다. 하지만 같은 법원 민사합의부가 맡은 2심은 A 씨 등의 주장을 모두 받아들일 수 없다며, 지난 5일 원고 패소로 판결했습니다. A 씨 등이 한 푼도 배상받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언뜻 보기에는 항공사의 잘못이 분명히 있는 것 같은데, 왜 이런 판결이 나온 걸까요?

재판부는 우선 A 씨 일행이 환승을 위한 탑승구에 도착한 시각이 정말 7시 5분~10분인지를 확인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A 씨 등이 이를 뒷받침하는 직접적인 증거를 제출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해당 항공기의 실제 탑승 마감 시각은 A 씨 등이 주장하는 7시 5분보다 더 늦은 시간이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했습니다.

당시 D 항공사의 기록을 보면 해당 항공기의 door close time(항공기 출입구 마감 시간)은 7시 18분이었습니다. 재판부는 통로 구조상 탑승구를 거쳐 항공기에 타기까지 그렇게 긴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보이지 않고, 결국 탑승 마감 시각이 door close time과 비슷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습니다.

재판부는 나아가 설사 그 시간에 탑승구에 도착한 것이 맞더라도, A 씨 일행의 지각과 C 항공사의 잘못된 정보 제공 사이에 '인과관계'를 따져봐야 한다고 했습니다. 즉, 두 사람이 D 항공사의 탑승 마감 시각인 7시 5분을 넘어서 탑승구에 도착하게 된 건 C 항공사의 잘못된 고지 때문이라는 점이 증명돼야 한다는 얘기죠.


재판부는 그 연결고리 역시 입증되지 않았다고 봤습니다.

재판부가 가장 먼저 주목한 건 두 사람이 받은 탑승권. 터키에서 스페인으로 가는 탑승권에는 탑승시각과 출발시각, 좌석 번호는 적혀 있었지만 유독 '탑승구(게이트)' 표시는 빈칸으로 돼 있었습니다. 탑승권만으로는 환승 장소가 어딘지 알 수 없으니, 어느 탑승구로 가야 하는지를 따로 확인해야 하는 상황이었다는 뜻입니다.

이런 사정 때문에 재판부는 두 사람이 터키 공항에 도착해 "탑승구 안내 전광판을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터키 공항의 D 항공사 안내 전광판에는 "출발 15분 전에 탑승이 마감된다"는 표시가 있었습니다.

재판부는 이를 근거로 "통상의 경우라면 이때(탑승구 안내 전광판을 확인했을 때) A 씨 등이 탑승 마감 시각까지 알게 되었다고 봄이 상당하다"라고 지적했습니다. 이 경우 항공사가 처음에 탑승 마감 시각을 잘못 알렸더라도 터키 공항에 도착해서 뒤늦게나마 정확한 탑승 마감 시각을 알게 됐으니, 항공사의 고지와 A 씨 등의 지각 사이에는 인과관계가 깨지게 됩니다.

재판부는 더불어 대부분 항공사들이 지각하는 승객들을 호명하는 'LAST CALL'을 시행하고 있다는 점에도 주목했습니다. D 항공사가 7시 5분에 탑승 마감을 했다면, 그 시점에 탑승 확인이 안 된 A 씨와 B 씨의 이름을 안내 방송으로 불렀을 개연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A 씨 등은 7시 5분~10분 사이에 탑승구에 도착했다고 주장하는 만큼, LAST CALL을 "듣지 못했을 리가 없다"고 재판부는 지적했습니다.

재판부는 그런데도 A 씨와 B 씨는 LAST CALL을 전혀 인식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며, 결국 두 사람이 "LAST CALL을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다른 일에 몰두"했거나, "LAST CALL을 듣지 못할 정도로 탑승구와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을 수 있다"는 의문을 "떨쳐버리기 어렵다"고 밝혔습니다. A 씨 등의 주장처럼 항공사 탓에 간발의 차로 비행편을 놓친 게 아니라, 실제로는 본인들 실수로 아예 지각해버렸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아직 상고심 판단을 받아볼 기회가 남아 있긴 하지만, A 씨와 B 씨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두 사람은 매우 허탈한 상황이 돼 버렸습니다. 혹시 모를 피해를 방지하고 여행을 즐기기 위해서는, 항공기 탑승 마감 시각을 정확히 확인하고 되도록 탑승구에 일찍 도착하는 게 안전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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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발 10분 전 탑승 마감이라더니”…비행편 놓친 승객, 배상은?
    • 입력 2019-12-10 11:00:19
    • 수정2019-12-10 22:19:48
    취재K
여행을 출발해 이틀만 지나면 인간은―아직 생활에 굳게 뿌리를 박지 못한 청년이면 더욱 그러하거니와―일상생활, 즉 의무나 이해, 걱정,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던 일체의 것으로부터 멀어지고 만다. (…) 시간과 마찬가지로 공간도 망각하게 하는 힘을 갖고 있다. 공간은 인간을 갖가지 관계에서 해방하여 자유로운 자연 그대로의 상태로 옮겨주는 힘을 갖고 있으며, 사실 이 공간은 고루한 속인마저도 순식간에 방랑자로 만들어버린다. (토마스 만, '마의 산', 홍신문화사, p.12)

연말연시를 맞아, 일상과 관계에서의 '해방'을 꿈꾸며 해외여행을 계획하는 분들 많으시지요. 오늘은 그런 분들에게 작은 시사점을 줄 만한 최신 판결을 하나 소개하려 합니다. 해외여행의 필수 관문, 항공기 탑승과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닫혀 버린 게이트

A 씨와 B 씨는 2016년 여름, 스페인 여행을 계획하고 인천에서 터키를 경유해 스페인으로 가는 항공권을 온라인으로 구매했습니다. 출발 당일, 두 사람은 인천공항 창구에서 C 항공사 직원에게 탑승권을 수령했습니다. 인천에서 터키로 가는 탑승권(C 항공사)과 터키에서 스페인으로 가는 탑승권(D 항공사), 각자 2장씩을 나눠 가졌지요.

순조롭게 터키 공항까지 도착한 두 사람. 하지만 이 경유지에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스페인으로 가기 위한 두 번째 항공기로 환승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꿈에 부풀어 있던 여행자들은, 한순간에 공항 노숙자 신세로 전락했습니다. 어쩌다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요?


"믿던 탑승권에 발등 찍혔다"

A 씨 일행의 '주장'은 이렇습니다.

사건 당시 터키 공항에서 D 항공사가 탑승을 마감한 시간은 현지시각으로 오후 7시 5분. A 씨 일행은 그 직후인 7시 5분~10분 사이에 탑승구에 도착했다고 말합니다. 이미 게이트는 닫힌 뒤였고, 두 사람은 탑승을 거부당하고 말았습니다.

두 사람은 당시 '지각'의 원인으로 탑승권을 지목했습니다. 앞서 두 사람이 인천공항에서 받은 2장의 탑승권에는 모두 "출발시각 10분 전에 탑승이 종료됩니다"라고 써 있었습니다. 하지만 D 항공사의 실제 탑승 마감 시각은, 그보다 5분 이른 '출발 15분 전'이었습니다. 탑승권에 잘못된 정보가 기재돼 있었던 셈이지요.

A 씨 등은 탑승권에 적힌 탑승 마감 시각을 믿고 출발 10~15분 전 탑승구에 도착했지만, 결국 항공기에 타지 못했다면서 C 항공사를 상대로 1년 뒤 소송을 냈습니다.

C 항공사가 발권한 항공권 상의 문제로 비행편을 놓쳤고, 이로 인해 "생필품 구입비 등의 적극적 손해"와 "공항에 장시간 체류하는 동안의 공포심 등으로 인한 정신적 손해"를 입었다면서 한 사람당 2백여만 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했습니다.

"한 푼도 배상 못 받는다" 판결한 법원…왜?

지난해 1심을 맡은 서울중앙지법 소액 사건 재판부는 항공사의 배상 책임을 일부 인정했지만, A 씨 등은 더 많은 배상이 필요하다는 취지로 항소했습니다. 하지만 같은 법원 민사합의부가 맡은 2심은 A 씨 등의 주장을 모두 받아들일 수 없다며, 지난 5일 원고 패소로 판결했습니다. A 씨 등이 한 푼도 배상받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언뜻 보기에는 항공사의 잘못이 분명히 있는 것 같은데, 왜 이런 판결이 나온 걸까요?

재판부는 우선 A 씨 일행이 환승을 위한 탑승구에 도착한 시각이 정말 7시 5분~10분인지를 확인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A 씨 등이 이를 뒷받침하는 직접적인 증거를 제출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해당 항공기의 실제 탑승 마감 시각은 A 씨 등이 주장하는 7시 5분보다 더 늦은 시간이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했습니다.

당시 D 항공사의 기록을 보면 해당 항공기의 door close time(항공기 출입구 마감 시간)은 7시 18분이었습니다. 재판부는 통로 구조상 탑승구를 거쳐 항공기에 타기까지 그렇게 긴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보이지 않고, 결국 탑승 마감 시각이 door close time과 비슷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습니다.

재판부는 나아가 설사 그 시간에 탑승구에 도착한 것이 맞더라도, A 씨 일행의 지각과 C 항공사의 잘못된 정보 제공 사이에 '인과관계'를 따져봐야 한다고 했습니다. 즉, 두 사람이 D 항공사의 탑승 마감 시각인 7시 5분을 넘어서 탑승구에 도착하게 된 건 C 항공사의 잘못된 고지 때문이라는 점이 증명돼야 한다는 얘기죠.


재판부는 그 연결고리 역시 입증되지 않았다고 봤습니다.

재판부가 가장 먼저 주목한 건 두 사람이 받은 탑승권. 터키에서 스페인으로 가는 탑승권에는 탑승시각과 출발시각, 좌석 번호는 적혀 있었지만 유독 '탑승구(게이트)' 표시는 빈칸으로 돼 있었습니다. 탑승권만으로는 환승 장소가 어딘지 알 수 없으니, 어느 탑승구로 가야 하는지를 따로 확인해야 하는 상황이었다는 뜻입니다.

이런 사정 때문에 재판부는 두 사람이 터키 공항에 도착해 "탑승구 안내 전광판을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터키 공항의 D 항공사 안내 전광판에는 "출발 15분 전에 탑승이 마감된다"는 표시가 있었습니다.

재판부는 이를 근거로 "통상의 경우라면 이때(탑승구 안내 전광판을 확인했을 때) A 씨 등이 탑승 마감 시각까지 알게 되었다고 봄이 상당하다"라고 지적했습니다. 이 경우 항공사가 처음에 탑승 마감 시각을 잘못 알렸더라도 터키 공항에 도착해서 뒤늦게나마 정확한 탑승 마감 시각을 알게 됐으니, 항공사의 고지와 A 씨 등의 지각 사이에는 인과관계가 깨지게 됩니다.

재판부는 더불어 대부분 항공사들이 지각하는 승객들을 호명하는 'LAST CALL'을 시행하고 있다는 점에도 주목했습니다. D 항공사가 7시 5분에 탑승 마감을 했다면, 그 시점에 탑승 확인이 안 된 A 씨와 B 씨의 이름을 안내 방송으로 불렀을 개연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A 씨 등은 7시 5분~10분 사이에 탑승구에 도착했다고 주장하는 만큼, LAST CALL을 "듣지 못했을 리가 없다"고 재판부는 지적했습니다.

재판부는 그런데도 A 씨와 B 씨는 LAST CALL을 전혀 인식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며, 결국 두 사람이 "LAST CALL을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다른 일에 몰두"했거나, "LAST CALL을 듣지 못할 정도로 탑승구와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을 수 있다"는 의문을 "떨쳐버리기 어렵다"고 밝혔습니다. A 씨 등의 주장처럼 항공사 탓에 간발의 차로 비행편을 놓친 게 아니라, 실제로는 본인들 실수로 아예 지각해버렸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아직 상고심 판단을 받아볼 기회가 남아 있긴 하지만, A 씨와 B 씨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두 사람은 매우 허탈한 상황이 돼 버렸습니다. 혹시 모를 피해를 방지하고 여행을 즐기기 위해서는, 항공기 탑승 마감 시각을 정확히 확인하고 되도록 탑승구에 일찍 도착하는 게 안전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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