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에서 쪽잠…사진 8장으로 보는 김우중 영욕의 삶

입력 2019.12.10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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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초반 스위스 취리히(추정) 공항. 그의 나이 50대 중반. (사진제공: 대우세계경영연구회)

1990년대 초반 스위스 취리히(추정) 공항. 그의 나이 50대 중반. (사진제공: 대우세계경영연구회)

한 중년 남성이 공항의 의자에서 쪽잠을 자고 있다. '일 중독자'로 유명했던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다. 김 전 회장은 1984년 KBS에 출연해서는 "대우그룹 직원들은 일요일도 한 달에 두 번만 쉰다"고 말하기도 했다. 스스로 일을 많이 한 만큼 직원들도 일해야 했다.

1989년(50대 초반)경 대우조선 거제 조선소에서 노동자들을 만나는 김 전 회장 (사진제공: 대우세계경영연구회)1989년(50대 초반)경 대우조선 거제 조선소에서 노동자들을 만나는 김 전 회장 (사진제공: 대우세계경영연구회)


1989년경 자전거로 조선소를 둘러보는 김 전 회장 (사진제공: 대우세계경영연구회)1989년경 자전거로 조선소를 둘러보는 김 전 회장 (사진제공: 대우세계경영연구회)

다른 많은 공장과 마찬가지로 1980년대 말 대우조선 거제 조선소에서 노동자들은 파업을 통해 자신들의 권리를 찾으려고 했다. 김 전 회장이 조금 달랐던 점은 노동자 대표들과 직접 대화를 했고 거제에서 한동안 살기도 했다는 것이다. 창업 1세대 경영자로서 최근의 재벌 3, 4세 상당수와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였다.



김 전 회장은 김일성과 쿠바의 카스트로 의장 등 당시 한국의 경영인으로 만나기 어려웠던 사람들을 만났다. (사진제공: 대우세계경영연구회)김 전 회장은 김일성과 쿠바의 카스트로 의장 등 당시 한국의 경영인으로 만나기 어려웠던 사람들을 만났다. (사진제공: 대우세계경영연구회)

이런 김 전 회장의 장점이 드러난 순간이 냉전 종식기였다. 김 전 회장이 이끄는 대우는 동유럽과 중남미, 동남아와 중앙아시아, 아프리카 곳곳까지 빠르게 진출했다. 이 과정에서 무리한 사업확장도 있었고 이후 빠른 몰락으로 이어졌다.



1977년(41세) 박정희 전 대통령으로부터 ‘4억 불 수출의 탑’을 받는 김 전 회장1977년(41세) 박정희 전 대통령으로부터 ‘4억 불 수출의 탑’을 받는 김 전 회장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제목의 저서는 베스트셀러가 됐다. 1967년 창업 이후 10여 년 만에 4대 재벌로 성장한 배경에는 본인의 재능 외에도 박정희 전 대통령과 신군부의 도움도 컸다. 김 전 회장의 부친인 김용하는 대구사범학교 교장을 지냈고 당시 박 전 대통령이 학생이었다. 대우조선과 대우자동차 등을 인수하며 빠르게 성장한 배경에는 군부와의 돈독한 관계가 바탕이 됐다.

2005년 6년간의 해외 도피 끝에 귀국하던 당시의 김 전 회장2005년 6년간의 해외 도피 끝에 귀국하던 당시의 김 전 회장

1997년과 98년 41조 원대 분식회계로 검찰의 조사를 받은 김 전 회장은 해외로 도피했다. 이후 6년 만에 귀국한 그는 징역 8년 6개월에 추징금 17조 9천억 원을 선고받았다. 징역형은 사면받았지만, 추징금은 거의 내지 않았다. '세계 경영'으로 많은 사람에게 꿈과 일자리를 줬지만, 사상 최대의 분식회계와 해고로 많은 아픔을 남기기도 했던 김우중 전 회장이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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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항에서 쪽잠…사진 8장으로 보는 김우중 영욕의 삶
    • 입력 2019-12-10 16:29:24
    취재K

1990년대 초반 스위스 취리히(추정) 공항. 그의 나이 50대 중반. (사진제공: 대우세계경영연구회)

한 중년 남성이 공항의 의자에서 쪽잠을 자고 있다. '일 중독자'로 유명했던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다. 김 전 회장은 1984년 KBS에 출연해서는 "대우그룹 직원들은 일요일도 한 달에 두 번만 쉰다"고 말하기도 했다. 스스로 일을 많이 한 만큼 직원들도 일해야 했다.

1989년(50대 초반)경 대우조선 거제 조선소에서 노동자들을 만나는 김 전 회장 (사진제공: 대우세계경영연구회)

1989년경 자전거로 조선소를 둘러보는 김 전 회장 (사진제공: 대우세계경영연구회)
다른 많은 공장과 마찬가지로 1980년대 말 대우조선 거제 조선소에서 노동자들은 파업을 통해 자신들의 권리를 찾으려고 했다. 김 전 회장이 조금 달랐던 점은 노동자 대표들과 직접 대화를 했고 거제에서 한동안 살기도 했다는 것이다. 창업 1세대 경영자로서 최근의 재벌 3, 4세 상당수와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였다.



김 전 회장은 김일성과 쿠바의 카스트로 의장 등 당시 한국의 경영인으로 만나기 어려웠던 사람들을 만났다. (사진제공: 대우세계경영연구회)
이런 김 전 회장의 장점이 드러난 순간이 냉전 종식기였다. 김 전 회장이 이끄는 대우는 동유럽과 중남미, 동남아와 중앙아시아, 아프리카 곳곳까지 빠르게 진출했다. 이 과정에서 무리한 사업확장도 있었고 이후 빠른 몰락으로 이어졌다.



1977년(41세) 박정희 전 대통령으로부터 ‘4억 불 수출의 탑’을 받는 김 전 회장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제목의 저서는 베스트셀러가 됐다. 1967년 창업 이후 10여 년 만에 4대 재벌로 성장한 배경에는 본인의 재능 외에도 박정희 전 대통령과 신군부의 도움도 컸다. 김 전 회장의 부친인 김용하는 대구사범학교 교장을 지냈고 당시 박 전 대통령이 학생이었다. 대우조선과 대우자동차 등을 인수하며 빠르게 성장한 배경에는 군부와의 돈독한 관계가 바탕이 됐다.

2005년 6년간의 해외 도피 끝에 귀국하던 당시의 김 전 회장
1997년과 98년 41조 원대 분식회계로 검찰의 조사를 받은 김 전 회장은 해외로 도피했다. 이후 6년 만에 귀국한 그는 징역 8년 6개월에 추징금 17조 9천억 원을 선고받았다. 징역형은 사면받았지만, 추징금은 거의 내지 않았다. '세계 경영'으로 많은 사람에게 꿈과 일자리를 줬지만, 사상 최대의 분식회계와 해고로 많은 아픔을 남기기도 했던 김우중 전 회장이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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