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시민이 중국 못 간 이유는…45년 만에 주민번호 개편

입력 2019.12.17 (15:00) 수정 2019.12.17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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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도입된 주민등록번호…박정희 1번, 육영수 2번

1968년 1월 21일 북한 무장공비 30여 명이 청와대 코앞까지 침투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른바 '김신조 사건'입니다. 이를 계기로 당시 박정희 정부는 "간첩과 불순분자를 색출하겠다"며 주민등록증을 만들었습니다.

당시에는 지금과 달리 12자리로 이뤄져 있었습니다.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110101-100001번을, 육영수 여사는 110101-200002번을 부여받았습니다. 대통령이 1번, 영부인이 2번이었습니다. 지금과 같은 주민등록번호 체계가 정착된 건 1975년부터입니다. 앞 6자리는 생년월일, 뒤 7자리는 성별과 출신 지역 등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생년월일도 개인정보이긴 하지만 뒷자리가 더 문제였습니다.

2009년 개원 10주년을 맞아 언론에 처음 공개된 하나원2009년 개원 10주년을 맞아 언론에 처음 공개된 하나원

'새터민' 낙인찍는 주민등록번호 뒷자리

2007년까지 북한을 탈출해 입국한 새터민의 주민등록번호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뒷번호가 남자는 '1XX'로 시작되고 여자는 '2XX'로 시작됐습니다. 이유는 새터민이 꼭 거쳐야 하는 기관인 '하나원'이 경기도 안성에 소재했는데, 경기도 안성시의 주민 번호상 지역 번호가 'XX'였기 때문입니다.

말투를 숨길지라도 주민등록번호 때문에 '안성에 있는 하나원 출신'이라는 게 드러날 소지가 있었습니다. 주민등록번호가 새터민이라는 낙인을 찍는 역할을 하게 된 겁니다. 새터민이 한국 사회에 적응하는 데 주민등록번호가 걸림돌이 된다는 비판이 제기되기 시작했습니다.


주민번호 때문에…중국 입국 거부당한 안성시민

새터민뿐 아니라 원래 안성 토박이들도 피해를 보았습니다. 안성 출신 역시 새터민과 마찬가지로 주민등록번호 뒷자리는 '1XX' 또는 '2XX'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중국에 여행을 가려던 안성시민이 입국장에서 탈북자 취급을 받게 된 겁니다. 호적 등본 등 추가 서류가 없으면 입국심사나 비자발급이 거절되는 경우가 발생했습니다. 북한을 탈출한 새터민들이 다시 중국 입국을 시도하려는 걸 막기 위한 중국 당국의 조치였습니다. 주민등록번호 뒷자리 숫자를 보고 새터민들을 식별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민원이 제기됐지만, 당시 소관 부처는 "외교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만 했지 주민등록번호는 손댈 수 없다는 입장이었습니다. (참고로 새터민에 대한 주민등록번호는 2007년 6월 하나원이 아닌 정착지를 거주지로 상정해 지역마다 무작위로 부여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전에 발급받은 새터민들은 여전히 불이익을 받을 소지가 있습니다.)

"특정 지역 안 뽑아요"…근거는 주민등록번호 뒷자리

2018년 경기도 부천의 한 편의점 점주가 아르바이트생 채용 공고를 올렸습니다. 그러면서 특정 지역 출신은 뽑지 않겠다고 밝혀 논란이 일었습니다. 당시 채용 공고를 보면 "주민등록번호 중 8·9번째 숫자가 48~66 사이에 해당하시는 분은 죄송합니다만 채용 어렵습니다."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심지어 가족 구성원이 그 번호에 해당할 때도 마찬가지라고 명시했습니다.

'48~66'은 전라남도와 전라북도 출신임을 뜻하는 번호입니다. 새터민 경우와 마찬가지로 특정 지역에 대한 배제 수단으로 주민등록번호가 악용된 겁니다.

2018년 경기도 부천의 한 편의점 점주가 내건 채용 공고문2018년 경기도 부천의 한 편의점 점주가 내건 채용 공고문

출신 지역이 노출되는 주민등록번호 체계를 개편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습니다. 2017년 행정안전부 국정감사장에서는 이재정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이런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김부겸 당시 행정안전부 장관의 주민등록번호 뒷자리를 "맞출 수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전부터도 여러 국회의원이 주민등록번호 뒷자리에서 지역 정보가 노출되는 문제점을 개선하는 내용의 주민등록법 개정안을 발의했습니다.

심지어 진영 행정안전부 장관도 17대 국회 때 이런 내용의 법안을 발의했습니다. 하나원을 거주지로 해 발급받은 새터민의 주민등록번호를 변경할 수 있는 법적 조항을 마련하자는 내용이었습니다. 하지만 관련 법안들은 번번이 통과되지 못했습니다. 주민등록번호 체계를 바꿀 수 없다는 안행부, 지금은 행안부의 의지가 많이 작용했습니다.

행안부, 내년 10월부터 뒷자리 임의번호 부여

행안부는 오늘(17일) 현행 주민등록번호 체계를 45년 만에 변경하기로 했습니다. 뒤 7자리 숫자 중 성별을 나타내는 제일 앞 숫자를 제외하고 모두 임의번호로 바꾸기로 했습니다. 행안부는 이런 개편 이유로 "특정 지역 출신에 대한 차별 논란 제기"됐고, "주민등록번호가 쉽게 추정되는 문제가 국정감사에서 지적"됐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행안부는 2020년 상반기 중 주민등록법 시행규칙을 개정해 현재 구축 중인 차세대 주민등록정보시스템에 번호 자동 부여기능을 반영하기로 했습니다. 내년 10월부터 새로운 주민등록번호 체계가 적용될 예정입니다. 다만 기존에 부여받은 주민등록번호는 그대로 사용됩니다. 지역 정보 노출에 따른 불이익이 발생할 여지는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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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성시민이 중국 못 간 이유는…45년 만에 주민번호 개편
    • 입력 2019-12-17 15:00:44
    • 수정2019-12-17 15:02:04
    취재K
1968년 도입된 주민등록번호…박정희 1번, 육영수 2번

1968년 1월 21일 북한 무장공비 30여 명이 청와대 코앞까지 침투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른바 '김신조 사건'입니다. 이를 계기로 당시 박정희 정부는 "간첩과 불순분자를 색출하겠다"며 주민등록증을 만들었습니다.

당시에는 지금과 달리 12자리로 이뤄져 있었습니다.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110101-100001번을, 육영수 여사는 110101-200002번을 부여받았습니다. 대통령이 1번, 영부인이 2번이었습니다. 지금과 같은 주민등록번호 체계가 정착된 건 1975년부터입니다. 앞 6자리는 생년월일, 뒤 7자리는 성별과 출신 지역 등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생년월일도 개인정보이긴 하지만 뒷자리가 더 문제였습니다.

2009년 개원 10주년을 맞아 언론에 처음 공개된 하나원
'새터민' 낙인찍는 주민등록번호 뒷자리

2007년까지 북한을 탈출해 입국한 새터민의 주민등록번호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뒷번호가 남자는 '1XX'로 시작되고 여자는 '2XX'로 시작됐습니다. 이유는 새터민이 꼭 거쳐야 하는 기관인 '하나원'이 경기도 안성에 소재했는데, 경기도 안성시의 주민 번호상 지역 번호가 'XX'였기 때문입니다.

말투를 숨길지라도 주민등록번호 때문에 '안성에 있는 하나원 출신'이라는 게 드러날 소지가 있었습니다. 주민등록번호가 새터민이라는 낙인을 찍는 역할을 하게 된 겁니다. 새터민이 한국 사회에 적응하는 데 주민등록번호가 걸림돌이 된다는 비판이 제기되기 시작했습니다.


주민번호 때문에…중국 입국 거부당한 안성시민

새터민뿐 아니라 원래 안성 토박이들도 피해를 보았습니다. 안성 출신 역시 새터민과 마찬가지로 주민등록번호 뒷자리는 '1XX' 또는 '2XX'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중국에 여행을 가려던 안성시민이 입국장에서 탈북자 취급을 받게 된 겁니다. 호적 등본 등 추가 서류가 없으면 입국심사나 비자발급이 거절되는 경우가 발생했습니다. 북한을 탈출한 새터민들이 다시 중국 입국을 시도하려는 걸 막기 위한 중국 당국의 조치였습니다. 주민등록번호 뒷자리 숫자를 보고 새터민들을 식별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민원이 제기됐지만, 당시 소관 부처는 "외교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만 했지 주민등록번호는 손댈 수 없다는 입장이었습니다. (참고로 새터민에 대한 주민등록번호는 2007년 6월 하나원이 아닌 정착지를 거주지로 상정해 지역마다 무작위로 부여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전에 발급받은 새터민들은 여전히 불이익을 받을 소지가 있습니다.)

"특정 지역 안 뽑아요"…근거는 주민등록번호 뒷자리

2018년 경기도 부천의 한 편의점 점주가 아르바이트생 채용 공고를 올렸습니다. 그러면서 특정 지역 출신은 뽑지 않겠다고 밝혀 논란이 일었습니다. 당시 채용 공고를 보면 "주민등록번호 중 8·9번째 숫자가 48~66 사이에 해당하시는 분은 죄송합니다만 채용 어렵습니다."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심지어 가족 구성원이 그 번호에 해당할 때도 마찬가지라고 명시했습니다.

'48~66'은 전라남도와 전라북도 출신임을 뜻하는 번호입니다. 새터민 경우와 마찬가지로 특정 지역에 대한 배제 수단으로 주민등록번호가 악용된 겁니다.

2018년 경기도 부천의 한 편의점 점주가 내건 채용 공고문
출신 지역이 노출되는 주민등록번호 체계를 개편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습니다. 2017년 행정안전부 국정감사장에서는 이재정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이런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김부겸 당시 행정안전부 장관의 주민등록번호 뒷자리를 "맞출 수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전부터도 여러 국회의원이 주민등록번호 뒷자리에서 지역 정보가 노출되는 문제점을 개선하는 내용의 주민등록법 개정안을 발의했습니다.

심지어 진영 행정안전부 장관도 17대 국회 때 이런 내용의 법안을 발의했습니다. 하나원을 거주지로 해 발급받은 새터민의 주민등록번호를 변경할 수 있는 법적 조항을 마련하자는 내용이었습니다. 하지만 관련 법안들은 번번이 통과되지 못했습니다. 주민등록번호 체계를 바꿀 수 없다는 안행부, 지금은 행안부의 의지가 많이 작용했습니다.

행안부, 내년 10월부터 뒷자리 임의번호 부여

행안부는 오늘(17일) 현행 주민등록번호 체계를 45년 만에 변경하기로 했습니다. 뒤 7자리 숫자 중 성별을 나타내는 제일 앞 숫자를 제외하고 모두 임의번호로 바꾸기로 했습니다. 행안부는 이런 개편 이유로 "특정 지역 출신에 대한 차별 논란 제기"됐고, "주민등록번호가 쉽게 추정되는 문제가 국정감사에서 지적"됐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행안부는 2020년 상반기 중 주민등록법 시행규칙을 개정해 현재 구축 중인 차세대 주민등록정보시스템에 번호 자동 부여기능을 반영하기로 했습니다. 내년 10월부터 새로운 주민등록번호 체계가 적용될 예정입니다. 다만 기존에 부여받은 주민등록번호는 그대로 사용됩니다. 지역 정보 노출에 따른 불이익이 발생할 여지는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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