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스피싱 ‘행동책’은 일회용. 무죄!”…주범은?

입력 2019.12.20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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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스피싱에 걸려든 사람들의 돈을 받아 윗선에 넘기는 '행동책'으로 활동한 20대 초반 중국인 유학생들이 무죄 선고를 받았습니다.

서울동부지법 형사2단독 이형주 부장판사는 사기 방조 등 혐의로 기소된 중국인 25살 A 씨와 23살 B 씨에게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이들은 지난 6월 보이스피싱 조직의 지시를 받고 사기 피해자에게서 2천만 원씩을 받아 송금한 등의 혐의를 받습니다.

검찰은 이들이 평범한 시민인 피해자가 준 거액을 받으면서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조사에서 인정했고, 이미 여러 해 한국에서 지내면서 보이스피싱이 만연한 실정을 몰랐을 리 없다는 등의 근거를 제시하며 범죄 의도가 있었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재판부는 검찰의 증거로는 피고인들에게 범죄 의도가 있었다고 판단하기에 부족하다고 봤는데요. 이례적으로 판결문 두 쪽을 할애해 부연 설명까지 달았습니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행동책을 잡아서 엄중 처벌을 해봐야 근본적인 보이스피싱 범죄 예방에는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재판부는 보이스피싱 주범이 잡히는 경우가 거의 없어 행동책에게도 주범과 거의 같은 수준의 양형이 선고되고 있다는 데 우려를 표했습니다.

재판부가 설명한 세 가지 이유,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① "행동책은 '일회용 도구'…미련없이 버리는 '대포 통장' 같은 것"

가장 큰 이유는 주범 억제 효과가 없다는 겁니다. 재판부는 행동책들이 주범들과 사전에 면식이 있거나 관계가 있는 지인들이 아니고 국내외 아르바이트 시장에서 무한대로 조달될 수 있는 저렴한 '일회용 도구'에 불과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재판부의 관점이 담긴 재미있는 비유도 있었습니다. 행동책들은 조달에 약간의 노력과 비용을 들여야 하지만, 지급 정지될 경우에 미련 없이 버리면 되는 '대포 계좌'와 같은 존재라는 겁니다.

결국, 행동책에 대해 엄중하게 처벌한다고 해서 주범들이 범행을 자제하거나 회피하지 않는다는 점을 재판부는 무죄 선고의 가장 큰 이유로 지적했습니다.

② "행동책 체포되면 사건 종결…주범에 대해선 전혀 수사 안 해"

수사기관도 따가운 질책을 피해가지 못했습니다. 재판부는 행동책이 체포되면 보이스피싱 범죄 조직원이 체포됐다고 발표하고는 사건을 종결짓고, 주범에 대해서는 전혀 수사하지 않는다고 꼬집었습니다.

행동책만 잡아놓고 범인을 체포했으니 사건을 해결했다는 식의 태도가 부적절하다는 건데, 개별 사건 처리에 그치지 말고 제도적 보완을 해야 한다는 지적입니다.

재판부는 그래서 범행의 도구로 쓰이는 통신중계기를 일반인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게 어떠냐고 제언했습니다. 지금은 이 통신중계기를 이용해 외국에서 걸려온 전화를 국내 휴대전화 번호로 변조하는 등 범죄에 많이 활용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③ "실직자·청년들이 잠재적 도구…현재 수사·공판에 안주하지 말 것"

마지막으로 재판부는 피고인들 같은 행동책이 또 나오지 않기 위한 방지 대책을 주문했습니다. 형벌의 목적 중 하나는 일반인에 대한 범죄 예방 효과인데, 현재의 보이스피싱 사건들에선 그런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보이스피싱이 한국 사회에서 너무 일상화돼버린 탓에 역설적으로 사건 자체가 뉴스거리도 되지 못하고, 피해자를 막기 위한 홍보만 종종 있을 뿐 잠재적 행동책을 막을 대책은 없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재판부는 특히 보이스피싱 주범들의 잠재적 도구가 될 수 있는 건 수많은 실직자나 최저임금 수준에서 일하는 우리의 청년들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대부분 무일푼이라 배상 능력도 없는 이들이라는 거죠.

현재와 같은 수사와 처벌로 피해자 보호와 사회 방위를 다 하고 있다는 생각은 '실태에 무지한 자아도취'라는 강도 높은 비판도 이어졌습니다. 관행에 안주할 게 아니라 부족한 부분은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고, 재판부는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기존 수사·공판 관행 비판…실질적 대책 마련 노력해야

여러모로 이례적이고, 생각해봐야 할 대목이 많은 판결입니다. 보이스피싱 범죄자들을 묵인해준 게 아니냐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도 사실입니다. 실제로 검찰은 판결에 불복해 항소했습니다.

하지만 재판부가 거듭 강조한 '실질적인 대책 마련'에 대해선 우리 사회가 함께 고민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제2, 제3의 범죄가 발생하지 않도록 수사 기관과 제도를 담당하는 행정 기관의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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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이스피싱 ‘행동책’은 일회용. 무죄!”…주범은?
    • 입력 2019-12-20 14:25:56
    취재K
보이스피싱에 걸려든 사람들의 돈을 받아 윗선에 넘기는 '행동책'으로 활동한 20대 초반 중국인 유학생들이 무죄 선고를 받았습니다.

서울동부지법 형사2단독 이형주 부장판사는 사기 방조 등 혐의로 기소된 중국인 25살 A 씨와 23살 B 씨에게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이들은 지난 6월 보이스피싱 조직의 지시를 받고 사기 피해자에게서 2천만 원씩을 받아 송금한 등의 혐의를 받습니다.

검찰은 이들이 평범한 시민인 피해자가 준 거액을 받으면서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조사에서 인정했고, 이미 여러 해 한국에서 지내면서 보이스피싱이 만연한 실정을 몰랐을 리 없다는 등의 근거를 제시하며 범죄 의도가 있었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재판부는 검찰의 증거로는 피고인들에게 범죄 의도가 있었다고 판단하기에 부족하다고 봤는데요. 이례적으로 판결문 두 쪽을 할애해 부연 설명까지 달았습니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행동책을 잡아서 엄중 처벌을 해봐야 근본적인 보이스피싱 범죄 예방에는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재판부는 보이스피싱 주범이 잡히는 경우가 거의 없어 행동책에게도 주범과 거의 같은 수준의 양형이 선고되고 있다는 데 우려를 표했습니다.

재판부가 설명한 세 가지 이유,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① "행동책은 '일회용 도구'…미련없이 버리는 '대포 통장' 같은 것"

가장 큰 이유는 주범 억제 효과가 없다는 겁니다. 재판부는 행동책들이 주범들과 사전에 면식이 있거나 관계가 있는 지인들이 아니고 국내외 아르바이트 시장에서 무한대로 조달될 수 있는 저렴한 '일회용 도구'에 불과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재판부의 관점이 담긴 재미있는 비유도 있었습니다. 행동책들은 조달에 약간의 노력과 비용을 들여야 하지만, 지급 정지될 경우에 미련 없이 버리면 되는 '대포 계좌'와 같은 존재라는 겁니다.

결국, 행동책에 대해 엄중하게 처벌한다고 해서 주범들이 범행을 자제하거나 회피하지 않는다는 점을 재판부는 무죄 선고의 가장 큰 이유로 지적했습니다.

② "행동책 체포되면 사건 종결…주범에 대해선 전혀 수사 안 해"

수사기관도 따가운 질책을 피해가지 못했습니다. 재판부는 행동책이 체포되면 보이스피싱 범죄 조직원이 체포됐다고 발표하고는 사건을 종결짓고, 주범에 대해서는 전혀 수사하지 않는다고 꼬집었습니다.

행동책만 잡아놓고 범인을 체포했으니 사건을 해결했다는 식의 태도가 부적절하다는 건데, 개별 사건 처리에 그치지 말고 제도적 보완을 해야 한다는 지적입니다.

재판부는 그래서 범행의 도구로 쓰이는 통신중계기를 일반인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게 어떠냐고 제언했습니다. 지금은 이 통신중계기를 이용해 외국에서 걸려온 전화를 국내 휴대전화 번호로 변조하는 등 범죄에 많이 활용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③ "실직자·청년들이 잠재적 도구…현재 수사·공판에 안주하지 말 것"

마지막으로 재판부는 피고인들 같은 행동책이 또 나오지 않기 위한 방지 대책을 주문했습니다. 형벌의 목적 중 하나는 일반인에 대한 범죄 예방 효과인데, 현재의 보이스피싱 사건들에선 그런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보이스피싱이 한국 사회에서 너무 일상화돼버린 탓에 역설적으로 사건 자체가 뉴스거리도 되지 못하고, 피해자를 막기 위한 홍보만 종종 있을 뿐 잠재적 행동책을 막을 대책은 없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재판부는 특히 보이스피싱 주범들의 잠재적 도구가 될 수 있는 건 수많은 실직자나 최저임금 수준에서 일하는 우리의 청년들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대부분 무일푼이라 배상 능력도 없는 이들이라는 거죠.

현재와 같은 수사와 처벌로 피해자 보호와 사회 방위를 다 하고 있다는 생각은 '실태에 무지한 자아도취'라는 강도 높은 비판도 이어졌습니다. 관행에 안주할 게 아니라 부족한 부분은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고, 재판부는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기존 수사·공판 관행 비판…실질적 대책 마련 노력해야

여러모로 이례적이고, 생각해봐야 할 대목이 많은 판결입니다. 보이스피싱 범죄자들을 묵인해준 게 아니냐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도 사실입니다. 실제로 검찰은 판결에 불복해 항소했습니다.

하지만 재판부가 거듭 강조한 '실질적인 대책 마련'에 대해선 우리 사회가 함께 고민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제2, 제3의 범죄가 발생하지 않도록 수사 기관과 제도를 담당하는 행정 기관의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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